인간의타고난심성에대하여두가지학설이있다.하나는순자의성악설이요또다른하나는맹자의성선설이다.두학설모두고대동양철학의대가들에의하여주창되었기에우리같은평범한인간들이그학설에의한평가의대상이될지언정어찌감히그들의학설에대하여논할수있겠냐마는지구촌곳곳을돌아다니다순자의성악설을뒷받침할만한흔적을엿볼수있는곳이많이남아있다.오랜역사속의얘기는제껴놓더라도영상기록수단이등장한이후필름을통하여실제로확인해볼수있는곳으로멀리서양에서는폴랜드의아우슈비츠,가깝게아시아에서는캄보디아의킬링필드가그대표적인곳이다.물론우리나라도반세기전에내란을겪었고집안어른들의얘기에의하면다른곳못지않은끔찍한골육상쟁을겪었지만6.25한국동란은지리적으로지구촌의변방에위치하였고,시기적으로는컬러TV,위성중계등의첨단통신과학문명이등장하기전이어서인지는몰라도,한국전쟁이세계역사의한기록으로남아있는것외에는전쟁과정에서우리민족이겪은참혹한과정은세계적으로는큰주목을끌지는못했던것같다.
<아우슈비츠제1수용소의입구>
아우슈비츠얘기를시작하자면유태인의유럽내에서의발자취를먼저거론해야할것같다.2000년전유대왕국이멸망하여유대인들이예루살렘을떠나유럽각지로흩어진이래로유대인들은예수를처형한민족으로기독교도인유럽인들의박해를받아오며살아올수밖에없었다.유대인들은그들의민족종교인유태교의종교생활은보장받았지만유럽의오래된도시에서는대부분게토(GHETTO)라는유대인거주지역이형성되어그들이얼마나유럽인들로부터소외된생활을하였는지알수있다.유럽인들의반유대감정은세익스피어의소설“베니스의상인”에서잘나타나고있다.
유럽의역사를통하여보면중세초기에는유대인들은봉건제도의구성원이아니었고유럽인들과의좋은관계를유지하기어려웠기에이들은비교적전직과이주가잦은편이어서상업,수공업등과의사등전문직종에진출하는사람들이많았다고한다.특히고리대금업으로통하는금융업에유대인들이많이거론되는것은그들은잦은이주생활을통하여재산증식수단으로처분이곤란한부동산보다는동산을선호할수밖에없었다는얘기도나오고있다.유럽이18세기에들어서서계몽운동가들을중심으로유대인들에대한차별철폐움직임이시작되고유대인들도자신들의부를바탕으로유럽사회에적극적으로대처하여대등한법적지위를얻게되었지만20세기에들어서서독일의히틀러에의해독일민족의우수성을내세우며새로운인종편견에의한유태인말살정책이끔찍한아우슈비츠대학살극을연출하였던것이다.
우리한테는아우슈비츠로잘알려져있지만아우슈비츠수용소의정확한지명은폴랜드의오슈비엥침이다.1940년수용소의설립당시에는폴랜드의정치범수용을위하여시작되었지만이곳이유럽각지에서기차노선으로접근하기수월하고인구밀집도시로부터멀리떨어져있어서폴랜드뿐만아니라유럽각지에서끌려온유태인들의수용소로변하게된것이다.나치는오슈비엥침의유태인수용소가수용인원이넘치자이곳에서3km떨어진브제진카(독일식표기는비르케나우)마을에제1수용소의10배크기로제2수용소를세우게되었으며우리들이영화나전쟁기록영화등을통하여보아온아우슈비츠수용소는바로브제진카의제2수용소의모습이다.
<사진왼쪽이브제징카제2수용소오른쪽아래가아우슈비츠제1수용소이다.>
아우슈비츠제1수용소의정문앞에있는안내소에서소련군이아우슈비츠를점령할당시에촬영한,영화감독에의해서연출된장면이아닌생생한기록영화를보면"쉰들러리스트","피아니스트"등나치의유태인학살을그린영화를볼때와다른것은컬러화면과흑백화면의차이일뿐인데새삼나치의잔혹한면과유태인의비참한모습이비로소현실로비쳐지게된다.
“일하면자유가된다.”(Arbeitmachtfrei)란기만적인나치의슬로건이세겨진정문입구를지나면조용한시골의학교나공장기숙사같은붉은벽돌건물이철조망에둘러싸여있는모습이시야에들어온다.어느곳에서도나치학살의장소였다는흔적은보이지않는다.제1수용소의28개건물중몇개가전시관으로공개되고있는데제4동,제5동에는당시이곳에끌려온유태인들의사진과유품들이전시되어있다.그들의가방에는한결같이큼직한글씨로이름과연락처가적힌것으로보아그들은최소한살아남아서돌아갈수있다는희망은잃지않았던것처럼보여진다.
수용소의전시관에들어서자긴복도양옆으로늘어선첫번째방에는폴랜드의오슈비엥침이유태인수용소로결정된이유를암시하는지도가걸려져있다.그옆에는“러시아인과,폴랜드,유태인들을독일에서쫓아버리자.”“유태인을멸종시켜야한다”는구호가전시되어있으며“쾰른의유태인들한테“라는편지들이전시되고있다.
복도에는줄무늬수용복을입은유태인들의정면과측면의그리고45도각도에서촬영한사진등의자료가공개되고있다.그중에서도관람객들의눈을끄는것은문자그대로피골이상접한벌거벗은어린아이들이의사앞에서진찰받는모습이었다.
전시관유리벽안에전시된유태인들의유품에는가방뿐만아니라칫솔,안경,구둣솔,거울등재활용이가능한모든물품이보관되고있었고심지어는유태인들이처형되기전깎은체모까지도보관되고있었다.재활용물품이야전쟁시절에는물자부족때문에재활용이불가피하다하더라도사람의머리카락등신체의일부를이용하여비누나,재떨이,카페트나쿠션을만들었다고하는것은아무래도재활용이라기보다는나치의광기가바탕에깔린정책탓이아닌가생각된다.
수용된유대인들의개인의프라이버시는이곳에서는사치일뿐,칸막이없이일렬로늘어선변기에서도그들의대우를짐작할수있었다.하기야생사의갈림길앞에서자신의운명을포기한채지내는이들한테,유태인의인간취급을거부하는나치앞에서인격체로서의“대우”라는단어자체가어울리지않는다.
<아우슈비츠제1수용소전시실복도에걸린유태인들의사진>
아우슈비츠제1수용소에서가스처형실과함께가장주목받는장소는제11동건물일것이다.이곳에는개인적인처벌을내리는시설이있는데,사방1미터의공간에4명을가두어놓는방,환기창도없는좁은방에만원지하철을타듯많은사람을가두어질식시키는방,앉지도서지도못할좁고낮은방등상상하기도힘든징벌을내리는시설들이모여있는것이다.특히나치치하폴랜드의반체제인사인콜베신부가굶어죽으라는처벌을받은다른수용자대신갇혀죽은방앞에는그를추모하는폴랜드인의참배행렬이끊이지않고있다.
<아우슈비츠제1수용소죽음의벽-유태인의총살장소>
제11동건물이악명높은것은이외에도밖에있는죽음의벽(DeathBlock)때문이다.이곳은제11동의감방에서수용된유태인을총살하던곳으로이곳을찾는유태인들이헌화한꽃다발이끊이지않고있는곳이다.당시유태인들이벌거벗긴채감방에서끌려나와이담벽에서처형되는모습을그린그림에서는누구나눈시울적시지않을수없었다.유태인을총살시킬때나개스실에서처형할때나나치는그들을꼭벌거벗겨서죽음의길로보낸것은그들의마지막길까지수치심으로짓밟으려는생각이아니었는지모르겠다.
<아우슈비츠제1수용소의개스실입구>
아우슈비츠수용소의핵심은아무래도개스처형실이라고할수있다.주변에는고압전류가흐르는철조망이쳐져있었지만이곳의생활이너무나고통스러워스스로철조망에매달려자살하는사람도있었다고하니그들이당한고통은우리들의상상을초월할것같다.아우슈비츠의개스실은단순한콘크리트벽으로둘러싼밀폐된210평방미터의좁은방으로건물위로뻗어있는굴뚝만아니라면이곳이참혹의현장이란것을알수없다.이좁은공간에서최대2000명까지처형하였다고하니그옆에있는시체소각시설로는쏟아져나오는시신들을처리하지못하여인근공터에그들의동료들손에의하여매장되었다고한다.
<브제징카제2유태인수용소>
브제징카의제2수용소는나치의만행을그린영화속에나오는아우슈비츠수용소의모델로수용소중심부를관통하는기차길과그양옆에광활하게늘어선300여동의목조수용소건물은대부분은파괴된채로남아있다.기초공사도없이습지에나무판자로만든수용소안은마굿간만도못한시설로한때는이곳에동시에10만명까지수용하였다고한다.
나치에의해유태인학살이저질러진지반세기가훨씬지난오늘,그동안세계각국의정치인들종교인들이이곳을방문한기록을자료속에는가해자였던독일의콜수상도포함되어있어자신들의과오를뉘우치고사죄하는사진도볼수있었다.
몇년전이스라엘의텔아비브에서는베를린필하모니와이스라엘필하모니의사죄와용서가오가는합동연주회가있었다.이스라엘에서도그동안금지하였던반유대인의상징적음악가인바그너의연주를하기시작했다는얘기도들린다.어느한구석에서도그래도우리들은할일을했다고공개적으로주장하는독일인들의목소리는아직은들리지않는것같다.지난봄노무현대통령이3.1절기념행사에서일본을직접거론하며나무라는연설을들었다.한국과일본의진정한화해는아직도멀었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