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tnam 베트남 치과진료단파견에 얽힌 이야기 (1)

이 여행기는 인천광역시의 자매도시인 베트남의 하이퐁에 두 도시간의 국제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시청의 요청으로 베트남치과진료봉사단장을 맡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2002년 7월)

 

 

참 힘들었다. 찜통처럼 견디기 어려운 무더운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진료봉사이지만 진료 자체가 우리들한테 무슨 어려움이 되겠는가. 우리를 힘들게 하였던 것은 다름아니라 사회주의국가의 경직된 관료들을 중간에 두고서 이 사업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던 것이다.

원래 베트남진료단파견은 인천시치과의사협회의 자체사업이 아니라 인천시청과 자매도시인 베트남 하이퐁시와의 국제교류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사업이었다.  인천시장으로부터 사업수행을 의뢰받았을 때만 해도 무의촌진료봉사활동 정도로만 얘기를 들어서 진료단의 왕복항공료를 인천시 예산에서 지원받고 진료에 들어가는 경비는 인천시치과의사회가 부담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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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하이퐁 아동병원에서의 진료하는 모습, 에어컨도 없이 체감온도 90도 ! >

진료단장으로는 치과의사들한테 오지여행가로 알려졌고 베트남도 세 번씩이나 여행한 경험이 있는 내가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는 비보(?)를 전해듣고 현직 회장단에서 맡아야지 왜 내가 가야 하느냐고 항의를 하였지만, 이 사업이 내가 부회장 및 국제교류 위원장을 맡았던 전임집행부의 마지막 이사회에서 결정한 것이어서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막상 진료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어려운 문제들이 연이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내부적으로는 우선 진료단을 정하는 문제부터가 어려웠다. 진료단을 파견하는 시기가 여름휴가철과도 겹치고 갑자기 일주일동안 병원을 비워햐 하는 문제가 있어서 자원자가 선뜻 나서지 않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인천시국제통상국으로부터 넘겨 받은 하이퐁시와 주고 받은 공문을 검토해보니 그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내용이라 당황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공문의 원본을 보니 하이퐁시에서는 시립병원격인 베트남-체코 친선병원의 치과진료시설을 지원해 달라는 의료시설원조를 요청한 것인데, 인천시 국제통상국에서는 이것을 60-70년대 우리나라 농어촌 무의촌진료봉사활동 정도로만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 나는 인천시청 담당직원에게 이런 문제점을 알려주며 이 사업은 우리치과의사회가 담당할 성격은 아니라 인천시청의 예산으로 추진해야 할 것 이고 물품구입 과정은 전문가들인 우리들이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인천시 국제통상국에서는 펄쩍 뛰면서 두 도시의 국제교류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인천시의 체면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형식적이라도 사업을 진행해 달라는 애걸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그 후 구체적인 지원내역서를 살펴보면 모두 8000만원 이란 예산이 필요한 것이지만 인천시치과의 사회의 당시 일년 예산이 3억원이 채 못되는 것을 감안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거니와 그럴 명분도 없는 것이었다. 공무원들이 전문가의 조언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화근된 것이었다. 

 

우선 인천시치과의사회의 예산을 샅샅히 살펴보고  중요하거나 급하지 않은 사업을 취소하거나 미루고 자매단체인 치과의사 신용협동조합의 지원을 받아 1500만원의 예산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인천시청은 경직된 관료사회라 더 이상의 예산지원이 불가능하다는 판에 더 이상 우리가 마련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어서 모두 2000만원의 예산으로 이 사업을 꾸려나갈 구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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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진료단의 실무계획을 총지휘한 인천시치과의사회 박경일 사업이사 (현 부회장) >

2000만원 정도면 아쉬운 대로 치과용 X-RAY와 소독기 그리고 치과진료기구 한 세트 정도는 구입할 수 있을것 같아서 치과진료단 파견규모를 5명에서 2명으로 줄이고  대신 치과기자재를 기증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경직된 관료는 사회주의 국가인 하이퐁시공무원이나 민주주의 국가인 인천시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천시의 예산 500명은 진료단 5명의 여행경비로 책정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항목으로 사용되면 곤란하다는 얘기지만 내 생각은 그것 보다는 한 두명이 가서 의료기구를 전해주는 것 보다는 여러명을 파견하여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필요한 전시행정을 위한 구실이 아닌가도 생각되었다.

인천시청에는 하이퐁시에서 파견 나온 NGUYEN여사가 근무하고 있어서 함께 진료단파견문제를 논의하는데 NGUYEN여사도 진료단파견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체코친선병원의 시설 개선을 강조하기에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예산문제도 그렇지만 진료봉사를 하든지 아니면 의료시설을 지원하든지 효율적인 사업추진을 위해서는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해서 내가 직접 하이퐁시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하이퐁은 호치민(구 사이공), 하노이에 이어 베트남의 세번째 큰 도시로 호치민시에서 국내선항공편이 있으며 항공료는 95만원이라고 하며 그래서 인천시청이 마련한 예산도 500만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자라는 예산에 그것도 사전답사비용으로 낭비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인천시청으로부터 예산집행권을 요청하여 내가 책임지고 사용하기로 하고 여행준비를 하게 되었다.

하이퐁시는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자동차로 불과 2시간거리라, 하노이에서는 가깝기 때문에 국내선항공편은 없고 비행기는 호치민에서만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울-하노이 왕복항공권만 구입하면 하노이에서 하이퐁까지는 자동차를 이용하면 예산을 일인당 40만원이나  절감할 수 있었다. 하이퐁에 현장을 찾아가 그들과 회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이 사업자체가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무거운 마음으로 하이퐁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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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베트남의 계림이라 불리는 후아 루 탐콕 >

하노이는 이번 여행이 네 번째, 3년 전에 캄보디아를 거쳐 한 번, 2년 전에 라오스를 거쳐 한 번, 그리고 금년 초에 인천시 치과의사회의 임원들과 임기를 마치는 기념으로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여행하여 이미 낯선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노이의 여행사로 부터 기사와 렌트카를 빌려서 하이퐁시를 방문하자 처음부터 일이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하이퐁으로 출발하기 전날 인천시청의 담당공무원이 NGUYEN여사와 함께 찾아와 하이퐁의 외사국장, 보건국장과 통역이 참석하는 면담일정이 잡혀있다면서 그들한테 전해줄 인천시청의 로고가 새겨진 손목시계와 명함지갑 등을 전해 주었다. 특히 NGUEN여사는 회담후 저녁에는 하이퐁 인민위원회 부위원장(부시장)인 Madame Shin여사가 초청하는 만찬이 있을 거라고 생색을 내며 이는 파격적인 대접이니 진료단파견문제를 잘 해결해 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우리같은 치과의사들은 그런 공무원들과는 달리 의전같은 거야 관심이 없기에 부위원장이 아니라 베트남 부수상이 만나 준다 해도 별로 대단한 것 아니지만 그것 보다는 통역이 참석한다고 해서 안심이 되어 회담에 필요한 영어 단어를 정리한 메모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데 바로 이날 인천시 공무원한테 넘겨 받은 통역이 참석한다는 희소식과 선물상자가 하노이에 도착하자 문제가 된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마음 한 구석에 선물꾸러미가 세관통과할 때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는데 똑 같은 디자인의 손목시계가 다섯개가 든 짐가방이 X-ray 투시기에 걸린 것이다. 이미 나도 시청직원한테 똑같은 시계를 하나 선물로 받아 손목에 차고 있었는데 시계 자체는 고급은 아니었지만 베트남의 한류열풍에 휩쓸려 “made in Korea”는 우리들의 어린시절 “made in U.S.A.” 못지 않은 선망의 브랜드였고 특히 비싼것은 아니지만 인천시청의 공식선물이었기에 포장만은 근사해서 탐이났던 모양이었다. 

내가 베트남을 방문한 이유와 그 선물가방이 회담 상대방한테 줄 의전선물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압수할 것 처럼 태도를 보여 그러면 내가 출국할 때 가지고 나갈테니 보관증을 달라고 하니 그때서야 본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결국은 이렇게 많으면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손목에 찬 똑같은 시계를 풀어 주고 이것을 갖고 싶다면 줄 수 있지만  선물포장은 절대로 건드릴 수 없다고 하자 무사히 통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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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베트남에서 한류열풍으로 국산브랜드는 우리나라에서 60년대의 made in U.S.A. 못지 않다. >

하노이에서 하룻 밤을 지내고 미리 예약한 렌트카와 운전기사를 호텔에서 소개받아 하이퐁시로 찾아 갔는데 계속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이퐁시 외사국장과 함께 나타난 통역은 한국어 통역이 아니라 베트남-영어 통역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혼자서 지구촌 60개국을 돌아다닌 경력의 소유자라 남들 보다 영어를 잘한다고 하지만 어찌 배고플 때 밥사먹고, 잠잘 때 호텔 찾고, 차표 살 때 하는 영어와 그들과 업무문제로 회담을 하는 영어가 같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지고 그렇지 않아도 습한 날씨에 식은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하이퐁시 외사국의 통역은 러시아어를 전공한 직원으로 영어가 제2외국어라고 하지만 우선 발음자체가 본토 발음이 아닌 아시안 특유의 영어발음을 사용하여서 걱정했던것 보다는 쉽게 회담을 진행할 수 있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인천시청과 인천시치과의사회에서는 내가 영어로 외국인과 회담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과대평가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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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치과진료단이 하이퐁아동병원장을 찾아 진료절차를 협의하는 회담을 가졌다. > 

– 맨 우측이 인하대학병원치과과장 김일규 교수, 그 왼쪽이 필자, 엄인석원장 –

하이퐁시 외사국장과 보건국장, 베트남-체코친선병원의 이비인후과장, 그리고 통역이 참석한 오전 회담은 어차피 양측의 속셈이 따로 있기에 문제해결의 돌파구는 생기지 않았고 서로의 입장차이만 보인 셈이었다. 오전회담을 통해서 하이퐁시 당국이 우리들의 무의촌 순회진료를 반대하는 이유는 베트남이 모이도이로 알려진 경제적인 개방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통제가 이뤄지지 않는 곳에서 외국인들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만나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내가 벽지 학교를 순방하면서 이동진료의 중요성을 얘기하였지만 그 때는 이미 학교들이 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설명에 나는 완전히 코너에 몰리게 된 것이다.      

어차피 하이퐁시 당국이 우리들의 기획을 반대하는 이유가 진료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면 사회주의체제 아래서는 해결이 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여, 우선 하이퐁 시내의 의료기관을 둘러 본 후 오후에 다시 만나 구체적인 지원방법을 찾아보자는 제의를 하고 오전 회의를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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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하이퐁의 앞 바다에 있는 하롱베이의 절경 >

오전회담을 끝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식사하러 가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하이퐁시 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 (부시장)의 초청만찬이 있다는 얘기는 인천을 떠나기 전에 미리 통보를 받았지만 점심식사같은 것까지 인천시 직원이 일정을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 점심식사는 일정에 잡히지 않은것 같았다.

결국 눈치 빠른 내가 먼저 하이퐁시의 한국인 교민과 점심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 겠다고 둘러대고 두 시간 후에 하이퐁시 의료기관을 안내할 이비인후과 의사와 회의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회의장을 나섰다. 

이날은 오전 내내 비가 내려 길거리가 질퍽하여 시내를 걷기도 불편할 정도였는데 식당 문을 나서자 기다린 듯이 우산을 받쳐든 어린이가 쫓아와서 구두를 닦으라고 졸라댄다. 날씨라도 개이고 길이라도 마르면 모를까 간간히 비가 계속 내리는데 구두를 닦으라는 것은  아무리 돈벌이도 좋지만 좀 지나친 요구였다. 하노이에서 데리고 간 운전사를 통하여 몇 마디 나누는데 ……

이 아이는 구두닦이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 며칠째 비가 와서 구두를 하나도 못 닦았다고한다. 점심식사를 하였냐고 물으니 대답이 없다. 나는 이미 점심을 먹었지만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들어 가서 나와 운전기사는 차 한잔 마시며 아이한테는 점심을 권했는데 이 아이는 음식을 앞에 두고서 앞니로만 우물우물 할 뿐 제대로 먹지를 못하고 급기야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운전기사를 통해 그 사유를 들어보니 이 아이는 심한 치통 때문에 제대로 음식을 씹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입을 벌리게 하니 아래 어금니에 심한 충치로 잇몸까지 곪아서 제대로 씹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베트남 서민들이 즐겨 먹는 쌀국수나 주문했으면 좋았을것을 내 나름대로 맛있는 것을 사 준다고 내가 좋아하는 베트남 튀김만두인 스프링롤을 시켜 주었으니 제대로 씹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역시 남을 도와 준다는 것은 자기만족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입장에서 방법을 찾아 보아야 하는 것인데 내 생각만 한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그 아이가 다 좋아하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사실 이런 경우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임시로 치료만 해주어도 통증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경우였다. 식당주인한테 이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치과치료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시내 외곽에 있는 아동병원에 가면 일반치과의원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는 있는데 시설이 낙후 되어 지금은 별 도움이 안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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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하이퐁시내 거리의 이발사 >

그렇다 ! 아동병원 ! 나는 그 아이의 점심 한끼만을 해결하여 주었지만, 그 아이는 나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 주었다. 나는 다시 그 아이가 먹고 싶은 것으로 직접 주문을 하도록 하고 치과를 찾아가 치과치료를 받으라고 약간의 용돈을 주고  이비인후과 의사와 만날 약속시간이 좀 남았지만 아동병원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기 위해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아동병원은 하이퐁시의 외곽이라 해도 그리 넓지 않은 도시고 교통체증도 없어서 쉽게 찾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오토바이나 자전거로 장거리를 다니기 때문에 장소가 외진 곳이라 해도 진료활동을 펼치는데 지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동병원을 다녀 오느라 조금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이비인후과 의사 뿐만 아니라 오전 회의에서 통역을 한 외사국직원도 나와 있었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어느 정도의 영어가 가능해서 통역이 필요 없었지만 그 통역은 외사국장의 지시를 받고 온 듯 하였다.

이비인후과 의사의 안내로 찾아간 베트남-체코친선병원은 상당히 규모가 큰 병원이었다. 우리나라의 현대식 대형건물은 아니지만 목조건물과 콘크리트 건물이 몇 동 나뉘어져 진료과목마다 병동이 떨어져 있는데 이비인후과와 치과는 독립된 병동에 낡은 유니트만 해도 열 대가 넘는 규모였다. 이정도면 우리 나라의 어느 종합병원치과의 규모에 뒤지지 않은 정도지만 제대로 가동되는 유니트는 한 두개에 불과한 것 같았다. 환자를 진료하는데 필수적인 장비인 핸드피스는 대부분 장착되지 않은채 트레이 위에 놓여 있는데 부품이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진료중 환자의 침을 빨아내주는 석션도 작동되지 않아서 환자가 직접 물받이 통을 턱아래에 받치고 입 안에 침이 가득 차면 일어나서 뱉어 옆의 물통에 쏟아 버리는 식이었다. 의사들은 여기 저기 모여 앉아 신문을 보거나 담소를 나누는데  나와 인사를 나누고 영어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젊은 의사들의 수준은 높아 보였다.   

얼핏 둘러본 베트남-체코친선병원의 치과진료시설을 제대로 돌아 가게 하려면 8000만원 갖고는 어림없는 일로 베트남-코리아 친선병원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예산이 투입되어야 정상가동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이어 이비인후과 의사한테 다른 병원을 둘러 보고 싶다고 하자 함께 따라 온 통역은 외사국장의 지시를 받은 듯 진료가 가능한 장소는 베트남-체코친선병원 뿐이라고 못을 박았지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며 아동병원을 가보고 싶다고 재차 요청하였다. 

이비인후과 의사의 안내로 아동병원을 정식으로 방문하여 둘러 보았는데 마침 근무가 끝난 시간이라 아동병원의 진료진과 시간 여유를 갖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동병원치과는 우리 나라의 개인치과의원 규모로 역시 시설이 낡아서 발치 외의 진료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어린이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충치질환치료이고 이 시설은 큰 예산이 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료실 한쪽 벽에는 구개파열 어린이 사진이 있어서 알아 보니 외국의 의료진이 찾아와서 안면기형환자들을 수술해 준 것이라고 하여 외과수술실을 살펴보니 기본적인 장비는 비교적 잘 갖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을 겪은 나라에서는 외과분야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내가 제의한 오후 회담은 외사국장의 일정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아서 보건국장을 찾아가서 아동병원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얘기를 진전시켰다. 보건국장은 자신의 결정권이 없어서 머뭇거리는 것 같았지만 6.25사변 이후 우리 나라의 선명회의 활동을 예를 들면서 나라의 새싹인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로 밀어 붙혔고 여전히 보건국장은 실권이 없는 듯 확답을 하지 못했다.

오후 회담 뿐만 아니라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의 만찬까지 취소된 것으로 보아 갑자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과 외사국장이 참석하는 중요한 회의가 열린듯 하지만, 내가 이곳에 대접받으로 온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공무로 찾아 온 손님한테 하노이공항-하이퐁의 교통편 제공도 없었고 식사 한끼 대접 받지 못하게 되자 무척 서운한 감정을 갖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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