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의 표절시비

광복절에 느닷없이 광복회장이 애국가를 친일 음악가의 곡이라고 매도하는 바람에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사실 애국가는 광복 후 몇 차례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친일 음악가라는 문제 보다 먼저 나온 건 표절 시비다. 애국가가 불가리아의 민요를 표절했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1960년대 초 안익태선생이 귀국하여 국제음악제를 주도할 때 국내 음악인들에 의해 제기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문제가 해외파와 국내파 음악인들의 파벌싸움에서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만 해도 안익태 선생이 친일파라는 의혹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국내 매스컴이 인쇄매체와 라디오방송 정도로 영향력이 좁았던 탓인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후 우리나라가 공화당과 민정당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군사독재정부 시절에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운동이 불어 안익태 선생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잃은 슬픔을 노래했다는 봉선화와 수많은 동요와 가곡을 남긴 홍난파 선생 등의 음악가들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 으로 존경받았던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선생 등이 졸지에 친일파로 몰려 1960~1970년대에 교육을 받고 자라난 우리 세대한테는 커다란 혼란을 남기고 있다. 한편 우리 나라 체육인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횟 수가 늘어나면서 예전의 표절시비와는 별도로 친일작곡가가 지은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나왔다.

내가 애국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0년대 유럽을 여행할 때다. 유럽여행에서 불가리아 사람을 만나 애국가를 들려주면 모르는 곡이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인터넷 보급이 늘어나면서 표절했다는 원곡인 불가리아곡을 찾아 보면 불가리아의 민요가 아니고 불가리아의 Dobrich라는 지방에서 불리던 행진곡 풍의 노래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 (Oh ! Land of Dobrich) 다.  이 노래는 1914년 불가리아의 작곡가 Alexander Krastev가 지은 것으로 1998년에 이 곡이 Dobrich 지방의 공식찬가로 제정되었다고 한다.  Dobrich는 불가리아에서 인구 수로 8번 째 되는 지방이라고 한다.

< 불가리아 한 지방에서 불려지는 행진곡 도입부분 >

애국가는 이 노래와 첫 마디가 똑 같다. 이 정도가 표절에 속한다고 하면 표절시비에 오를 곡은 무수히 많다.  참고로 하나의 예를 들면 우리 귀에 익은  선구자는 멘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 Dm의 2악장과 굉장히 비슷하다.  멘덜스죤의 바이올린협주곡 Dm는 Em 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고 있지만 이곡을 들으면 마치 선구자의 반주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선구자’의 표절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멘델스존 Dm가 대중적으로 알져진 곳이 아니지만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인데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선구자’의 표절을 지적하지는 않고 있다.

< 우리 가곡 ‘선구자’와 너무 흡사한 멘델스존 바이올린협주곡 Dm 2악장 첫 부분 >

 

한국환상곡 1935년 작곡, 유럽여행은 1936년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를 미국에서 활동할 때인 1935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다. 안익태 선생이 유럽을 처음으로 여행하기 1년 전 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인터넷도 없어 세계가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는 것이 큰 제한이 있고  애국가의 원곡이라고 주장하는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이 유럽에서도 작은 국가인 불가리아의 한 지방에서 불려진 노래인데 안익태 선생이 이를 표절했다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애국가는 표절시비 외에도 저작권으로 또 한 번 시빗거리에 올려진 적이 있었다. 2003년에 각종 국가행사나 스포츠행사에서 행사의 일부로 연주되는 애국가에 대해 저작권을 내야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특히 저작권 대상에 된 것은 프로야구가 시작할 때 연주되는 애국가에 쏠려졌다.  애국가의 표절 시비는 그렇다 쳐도 애국가에 대해 저작권을 문제 삼는 시각에는 개인적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안익태 Korea Fantasy by L.A.Phil 안익태

* 1976년 서라벌레코드에서 출반한 안익태 한국환상곡, 1961년 안익태 선생이 L.A.필하모니를 지휘한 연주다.

 

저작권 존중해야지만 . . .  국민의례로 부르는  ‘애국가’와  ‘한국환상곡’ 중에 나오는 합창곡으로서의 ‘애국가’는 구분되어야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별도로 작곡한 곡이 아니다.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의 대표곡이 된 교향시 한국환상곡 Korea fantasy에서 나오는 합창부분 이다. 안익태 선생은 나라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국가도 없어 당시 널리 알려진 스코틀랜드 곡인 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이 안타까워 Korea Fantasy에 합창곡으로 애국가를 포함시켰다고 한다.  해방 후 우리 정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안익태 선생의 한국환상곡에 너오는 합창부분을 국가로 채택하였는지 몰라도 안익태 선생의 생존시에는 나오지 않던 저작권 문제가 안익태 선생이 돌아가신지 거의 40년이 다 되가는 시점에 나왔다는 것은 무척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애국가의 저작권은 국가가 아닌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신탁을 위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작권이 ‘한국환상곡’에 적용되는 것인지 그 일부인 ‘애국가’도 포함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당연히 국내외 연주단체가 한국환상곡을 공연에서 연주한다면 저작권료를 지불하겠지만 국가행사나 민간에서 국민의례로 부르는 애국가에 국가나 어느 단체가 저작권을 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솔.까.말 . . .  안익태 선생의 ‘한국환상곡’은 그리 자주 연주 되는 곡은 아니다.  이 곡의 음반이 처음 나올 때도 이 곡을 연주한 단체가 없어서 안익태 선생이 미국 L.A.에서 연주한 녹음으로 음반이 나왔다. ‘한국환상곡’에 대한 저작권 수입이 있어도 그리 큰 액수는 안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각종 행사에서 국민의례로 부르는 애국가에 대해 누가 저작권을 주장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유가족이 뒤늦게 새로운 소득원으로 저작권을 뒤늦게 주장한 것인지, 아니면 신탁을 위임 받은 저작권협회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프로야구협회를 타켓으로 삼아 저작권을 요구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내가 알기로는 안익태 선생은 우리 나라 정부로 부터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마요르카의 안익태 선생이 살던 집은 교포가 구입하여 정부에 기증했고 유가족이 이집에 살면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애국가의 작곡가로 온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것은 저작권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당시 해결책으로 정부에서 저작권을 일괄적으로 사들이겠다는 황당한 얘기도 나왔지만 다행히 애국가 저작권 시비는 유가족이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일단락 되었다. 애국가가 포함된 한국환상곡 전곡을 연주하는 경우는 당연히 저작권료를 내야하지만 공적으로 인정 받는 애국가에 저작권을 요구한다는 발상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매우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Karajan, Furtwaengler 도 나치 경력

이번에 광복절 또 다시 애국가가 친일시비에 걸렸다. 안악태 선생이 일제 말기에 어느 정도 친일행위에 가담했는지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환상곡을 작곡할 때에는 잃어 버린, 빼앗긴 나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국가를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안익태 선생이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넓힌 것은 애국가를 작곡한 다음 이다.  또 안익태 선생이 친나치활동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 때 나치당원 이었던 그의 스승인 독일의 Richard Strauss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 같다.  (월츠의 왕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Johann Strauss 와는 다른 가문 이다.) 그러나 나치에 대한 행위에 엄격한 유럽에서도 Richard Strauss 곡의 연주를 금지하지는 않고 있다. Richard Strauss는 클래식음악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 중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극적인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나와 귀에 익숙한 곡이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씨의 레파토리에도 R.Strauss의 곡이 있다.  지난 세대에서 유럽에서 가장 출중했던 지휘자로 꼽히는 Herbert von Karajan과 Furtwaengler도 나치에 가담하여 나치를 위해 지휘한 전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후에 활발한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다.

안익태 선생의 친일행각이 비난 받게 된 것은 안익태 선생의 스승인 R.Strauss의 국적이 독일이었고, 제2차세계대전 동안 독일과 일본이 동맹관계였기에 안익태 선생이 자연스럽게 일본의 영역에서 활동을 한 것은 사실 이다. 광복회장이 한 때 군사독재 집단인 공화당에 공채로 들어가 활동한 것이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안익태 선생이 나라를 잃어 버린 상황에서 음악활동을하기 위해 일본의 위성국가인 만주 땅에서 연주회 지휘봉을 잡은 것도 광복회장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일본군 출신으로 광복군의 항일운동을 진압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독립 후 백선엽 장군이 6.25 전쟁 때 나라를 구한 공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항일운동을 했다는 공적으로 독립 후에 6.25 전쟁 때 북한군 장군으로 참전하여 싸웠던 김원봉은 현충일에 대통령에 의해 칭송을 받고 우리나라 정부가 서훈을 고려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김원봉은 항일전쟁 후 해방이 되자 자진해서 월북을 선택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지만, 안익태 선생은 일제 말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일본의 영향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인데 엇갈린 평가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모든 영역에서 우군과 적군, 내편과 네편,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상태에서 어느 정권에 의해 어느 음악가에 의해 새로운 국가가 제정될지 몰라도 아마 최악의 경우는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국가도 바뀌는 불행한 사태가 올지도 모르겠다.  설사 새로운 애국가가 제정되어도 해방된지 75년 넘게 우리의 애국심의 구심점이란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던 애국가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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