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콘서트가 뜸해 집에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 막심하지만 10여 년 전 오래 된 가구와 짐을 치우면서 CD, DVD에 밀려 자주 찾지 않게 된 1000여 장의 LP판도 처분했지만, 그나마 아버님한테 물려받은 1950년대 말 나온 RCA Living Stereo, Columbia Masterwork 원판들과 고교생이었던 1971년부터 수집한 성음사 라이센스 음반 중에 나름 의미 있는 50여장은 지금도 갖고 있어 틈틈이 듣고 있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클래식음반이 나온 것은 1971년 성음사(成音社)가 영국의 DECCA, 네덜란드의 PHILIPS, 독일의 DG Deutsche Grammophone사의 음반을 로얄티를 지불하고 기술제휴를 얻어 제작한 라이센스 음반이 처음 이었다.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의 클래식음반은 미군 PX에서 유출된 RCA, Columbia 등의 음반과 외국을 다녀온 여행자들이 반입한 것 등 아주 귀하고 비싼 것 뿐 이었다. 그 외에는 ‘빽판’으로 불렸던 외국 음반을 허가 없이 복제한 음반 뿐 이었지만 그때 만해도 저작권이란 인식이 없던 때라 불법인지 합법인지는 큰 의미는 없었고 다만 영세업체들이 만든 것이라 품질은 좋지 않았다.
성음사의 라이센스 음반은 유럽기술제휴 회사로부터 Stamper를 제공 받아 국내에서 음반제작의 마지막 과정인 LP를 찍어 내는 방식으로 외국 원판과 거의 동일한 제품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당시 불법복제판인 ‘빽판’은 원료를 절감하기 위해 너무 얇게 찍어 내어 여름에는 직사광선을 쬐면 음반이 휠 정도였지만 라이센스 음반은 원판 규격대로 나와 빽판과 비교해서 내구성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라이센스 음반 1호(SEL 0001)는 1971년 나온 Andre Previn이 지휘하는 London Symphony와 정경화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시벨리우스 바이올린협주곡의 DECCA 음반 (SXL 6493) 이다. 이 음반은 정경화의 첫 음반이기도 하다. 정경화의 이 음반은 몇 년 후 재발간 되었는데 표지는 처음 나온 것과 다른 것으로 기억된다.
PHILIPS 라이센스 1호는 Janos Starker와 Antal Dorati 지휘의 런던심포니가 협연한 Dvorak과 Bruch 첼로협주곡 이다. 그런데 이 음반은 PHILIPS 음반 1호라 구입한 기억이 나는데 어쩐 일인지 뷴류번호는 SEL 100 007 이며 성음사 발간목록에도 100 001 ~ 100 005은 결번으로 남아 있다.
성음사의 DECCA, PHILIPS, DG 브랜드 중 DG는 가장 늦게 나왔는데 DG 1호(SEL 200 001)는 김영욱의 멘델스죤/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원판 2530 224)으로 협연은 다음 달 예술의전당에서 김선욱과 슈만협주곡을 협연하는 Bamberg Symphony다. 거의 동시에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동갑내기 정경화와 김영욱이 우리나라 음반시장에서 각각 DECCA와 DG의 라이센스 음반의 1호로 대결한 셈이다.
라이센스 음반이 처음 나온 시기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로 학생 신분에 음반을 수집하기에는 워낙 고가로 희미하게나마 1200~1300원 정도로 기억나는데 DG 음반이 DECCA, PHILIPS에 비해 100원 비쌌다. 이런 상황에 일반의 인식은 DG의 통일된 디자인의 노란딱지 레이블에서 카리스마를 느끼게 되고 DG 음반이 DECCA나 PHILIPS 보다 한 단계 위라고 느끼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성음사 라이센스 음반의 출발은 순조로왔지만 가격은 빠른 속도로 인상되었다. 1975년~1976년 나온 음반을 보니 정가가 1800~1900원으로 적혀져 있고 1982년 성음사에서 계간으로 나온 클래식 음반잡지 레코드 음악을 보면 음반가격이 클래식 2800원, 팝 2600원 정도로 나와 있다.
성음사 라이센스 음반의 분류표를 보면 초기에는 DECCA 음반의 경우 SEL xxxx 네자리 숫자로 시작되었지만 PHILIPS는 SEL 100 xxx, DG는 SEL 200 xxx 등 브랜드를 구분하는 100, 200 세자리 숫자 다음에 세 자리 숫자로 구분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얼마 안 되어 DECCA는 SEL RD xxxx, PHILIPS는 SEL RP xxxx, DG는 SEL RG xxxx 등 네 자리 숫자로 변경되었다. 아마 성음사도 초기에는 라이센스 음반사업의 전망을 크게 보지 않아 세 자리 숫자로 하였지만 진행상황을 보고 네 자리 숫자로 변경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실제 1980년대 중반 CD의 보급이 늘면서 1988년에 라이센스 음반 구입을 끊었는데 당시 구입했던 음반 분류번호가 SEL RD 1053, SEL RP 1115, SEL RG 1046 으로 모두 4자리 숫자를 돌파했다. 성음사가 1971년 라이센스 음반산업을 시작해서 1988년 까지 중간 결번이 어느 정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DECCA, PHILIPS, DG 브랜드의 라이센스 음반을 거의 3000장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내가 수집한 음반은 약 800여장 되었다.
한 때 듣지 않고 쌓아 둔 LP판이 짐이 된다고 처분한 것은 내 일생에 처음 집을 살 때 서울이 아닌 근무처인 인천에 집을 산 것 다음으로 두 번째 후회가 되는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