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을은 온다

나의 지난 여름은 무척 힘들었다. 폭염에, 반지하 울 집은 물난리까지 나서 수재민이 되어 혹독하게 보낸 여름. 구월이 되어서야 엉망진창이었던 살림살이 간신히 정리하고 나니, 문득 가을이다.

늦은 저녁이면 운동 삼아 동네 산책을 한다.  1 시간 정도 골목골목 아래 위로 걸어다니는 것.  시원한 그늘을 찾아 교회 정원 정자로 가거나 아랫동네 체육공원으로 가기도 하고, 이삼 일에 한 번은 도서관으로 간다.

지진 소식도 도서관에서 알았다. 책 읽으며 이어폰으로 꼬깔 님이 카카오로 올려준 음악들을 듣고 있는데, ‘삐삐’ 조선앱에서 새소식 알림이 들어온다.  지진이 났다고, 가슴이 철렁, 무섭다.

 

화초들 (10)

내 바이올렛은 이렇게 늦게서야  꽃이 피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가을볕을 더 받으라고 문턱에 가져다 놓았다.

서초동에서 말라시들어버린 작은 화분을 들고와 조금 큰 화분에다 옮겨 심고,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보며 토닥여줬더니…. 이제서야 꽃망울이 올라온다.

 

화초들 (2)

로그인 하기도 잘 안되고 비밀번호 고치기는 더 안돼서 여러 차례 시도하다 포기.

나는 넋이 나갈 정도로 힘든 여름나기 였지만, 대단한 폭염에다 날마다 들락거리는 길고양이들의 등쌀에도 내 화초들은 잘 자라주었다. (길고양이들이 깨트린 화분도 여러 개.) 사진에 보이는 건 집 안 보다 밖을 더 좋아하는 외눈이 콩이.  콩이는 밥 먹을 때와 잠잘 때(내가 잠들었다고 생각될 때)만 집으로 들어온다.

여름 두 달을 폭염 속에 피난민 생활을 하며 지내다보니 그림은 전혀 손대지 못한 채로 지냈다.

얼마 전엔 그림 그릴 큰 책상(작업대)도 구했는데,  여전히 손을 못 대고 있다.

초조함과 상실감, 무기력, 한없는 게으름… 핑게거리도 많다. 아마 지진을 겪은 경주 시민들이 나와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재난 앞에서 살림살이들을 건사하고 재정돈하느라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무기력이란 늪 속으로 가라앉는다. 정신 차리라고, 바득바득 열심히 살아야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꾸짖고 타이르지만, 쉽지 않다.

그래도 가을이 왔다.

자다가 한기를 느끼고 솜이불을 꺼내려보니 앗, 겨울 이불은 여전히 박스 안에 든 상태. 귀찮아서 겉옷 하나 더 껴입고 잔다. 그러면서도 가을이야…

 

말리기 (2)

말리기 (1)

따뜻한 이불은 안 꺼내고, 그림도 안 그리면서 떨이 해 온 가지를 말리고, 찐 꽈리고추도 말린다.

 

책 (3)

지금 읽고 있는 책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영주 씨가 읽어보라고 사다준 것)

폭염에 전기요금 폭탄 맞은 집들이 많다는데.. 울 집은 930 원 (저 이 고지서 보고 실실 웃었어요.)  지난 두 달은 전기 요금 많이 나왔다고 검침원 안부 전화까지 받았었는데.. (젖은 방바닥 말리느라 폭염에도 계속 보일러 틀고, 제습기와 선풍기 2 대도 계속 틀었던 탓.)

그래도 가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도시 경주의 안녕을 기도합니다.  안전 또 안전 어떤 재난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철저한 안전 시스템이 세워지는 가을이어야겠습니다.

경주에 계신 데레사 님 친지분들은 안녕하신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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