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를 이기는 한 가지 방법

추위를 이기는 한 가지 방법

『……영하 二十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낙없이 냉동고다. 천정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받아놓은 물도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도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콧속의 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위세를 총동원해서 만상을 얼어붙힐려고 기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처럼 얼지 않고 있다. 양어깨를 쪼아 숨이 가쁘리만큼 폐장과 심장을 압박하는 자세로 앉아 있기는 하나 나는 결코 얼어붙지 앉는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체온 三六도 五분의 기적을 이처럼 야무지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억센 자연의 위세 속에서 체온 三六도 五分을 유지해 나가는 육체란 이 얼마나 정교한 메카니즘이냐. 나는 나의 이 체온이 아득히 몇억년전 지구가 혼돈한 유액상(乳液狀)을 이루고 있을 때 비롯된 온도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상을 발견하고 지금 황홀하다.

그러나 체온 三六도 五분으로서 육체의 빙화는 피한다고 해도 마음의 빙화까질 피하기란 어렵다. 그래 노상 책에다 눈을 쏟고 있는 판이지만 종이 위의 활자가 내 눈으로 전달되는 그 도중에서 얼어붙는 탓인지 중추신경계에 까진 이르지 못하고 만다.』

『감옥살이에서 체험한 일이지만, 지식인과 무식자는 똑같은 곤란을 당했을 때 견디어 내는 정도가 월등하게 다른 것 같다. 지식인의 경우 감옥 속에 있어도 꼭 죽어야 할 중병에 걸리지 않는한 호락호락하게 잘 죽지 않는다. 그런데 무식자의 경우는, 육체적으론 지식인보다 훨씬 건장해도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려 나뭇가지가 꺾이듯 허무하게 쓰러져 버린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 여러 가지 원인을 들출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답안을 내 보았다.

교양인, 또는 지식인은 난관에 부딪쳤을 때 두 개의 자기로 분화된다. 하나는 그 난관에 부딪쳐 고통을 느끼는 자기, 또 하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기를 지켜보고, 그러한 자기를 스스로 위무(慰撫)하고 격려하는 자기로 분화된다. 그러니 웬만한 고통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무하고 지탱하고 격려하면서 견디어 낸다. 그런데 한편 무식한 사람에겐 고난을 당하는 자기만 있을 뿐이지 그러한 자기를 위무하고 지탱하고 격려하는 자기가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식인은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을 두 사람이 나누어 견디는 셈인데 무식자는 모든 고통을 혼자서 견디어야 하는 셈이다. 지식인이 난관을 견디어 나가는 정도가 무식자보다 낫다는 사실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혜라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라고 본다. 동물적인 자기, 육체적인 자기를 인도하고, 통제하고, 나쁜 짓을 했을 때는 책(責)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무, 격려하는 정신적인 자기를 가진다는 것. 어떠한 고난에 빠져 있더라도 절망하

 

위의 글은 이병주(李炳注)의 「소설알렉산드리아」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문사 논설위원이 통일에 관해 쓴 사설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수형생활을 하는 중 겪은 혹한의 감방생활에 대한 체험을 소설의 소재로 담은 내용이다. 영하 10도의 한파에도 히말라야 정상 정복에 나선 알피니스트의 복장을 하고서 춥다며 엄살을 떠는 호사에 겨운 룸펜과 비교하기에는 너무 예의가 아니지만, 그래도 영하 20도의 추위는 사람을 앉은 채로 동상을 만들기에 족하여, 기적처럼 용케도 이를 극복하는 수형자의 의지가 놀랍기만 하다. 24일 부산의 기온이 영하10도, 오늘은 영하 8도. 따뜻한 남쪽 부산이 이럴진대 북쪽으로 올라가면 기온은 더욱 떨어져 며칠 째 한반도는 냉동고가 된 느낌이다. 지구의 기후 온난화 영향으로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 북극의 한기가 남으로 확장되어 이토록 날씨가 춥다고 한다. 이상 기온은 전지구적으로 난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은 폭설로 비상사태다. 다행한 것은 주말께부터 평년 기온으로 회복하겠다는 기상대의 예보가 우리에게는 구원이 된다.

 

 

『수인(囚人)들은 늘 벽을 만납니다.

통근길의 시민이 ‘stop’을 만나듯, 사슴이 엽사(獵師)를 만나듯 수인들은 징역의 도처에서 늘 벽을 만나고 있습니다. 가련한 자유의 시간—꿈 속에서마저 벽을 만나고 마는 것입니다. 무수한 벽과 벽 사이, 운신(運身)도 어려운 각진 공간에서 우리는 부단히 사고(思考)의 벽을 헐고자 합니다. 생각의 지붕을 벗고자 합니다.

흉회쇄락 광풍제월(胸懷灑落 光風霽月), 그리하여 이윽고 ‘광야(曠野)의 목소리’를, 달처럼 둥근 마음을 기르고 싶은 것입니다.

아버님 서한에 6년래의 혹한이라고 하였읍니다만 그런 추위를 실감치 않았음은 웬일일까, 심동(深冬)의 빙한(氷寒), 온기 한 점 없는 냉방에서 우리를 덮어준 것은 동료들의 체온이었습니다.

추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체온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냉방이 가르치는 ‘벗’의 의미를, 겨울이 가르치는 ‘이웃의 체온’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입춘도 지나고 머지 않아 강물이 풀리고 따사로운 춘풍에 이른 꽃들이 필 무렵, 겨우내 우리의 몸 속에 심어 둔 이웃들의 체온이 송이송이 빛나는 꽃들로 피어날는지……인정은 꽃들의 웃음 소리입니다.』

 

『……우리는 과거 쪽에 마음을 너무 많이 할애함으로써 현재의 갈등과 쟁투가 그 전진적 몸부림을 멈추고 거꾸로 과거에로 도피해버리는 예를 많이 봅니다. 과거에로의 도피는 한 마디로 패배이며, ‘패배가 주는 약간의 안식’에 귀의하여 과거에의 예종(隷從), 숙명론(宿命論)적 굴레를 스스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나는 이 숱한 문제들과 정면 대결하는 긴긴 겨울밤을 좋아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하늘을 치달리는 잡념을 다듬고 간추려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겪었던 하나하나의 일들과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의 의미를 세세히 점검하는 겨울밤을 좋아합니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들을 건져내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 담겨 있는 의외로 큰 의미에 놀라기도 하고, 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알았던 일에서 넘치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만나고 헤어진다는 일이 정반대의 의미로 남아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새삼 놀람을 금치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에서 만나는 것은 매양 나 자신의 이러저러한 모습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러한 겨울밤의 사색은 손시린 겨울 빨래처럼 마음내키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이는 자기와의 대면(對面)의 시간이며, 자기 해방의 시간이기 때문에 소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위의 글은 열흘 전(1월15일)에 타계하신 신영복 교수님의 편지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옮겨온 것이다.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징역살이를 한 ‘체험 삶의 현장’을 편지글로 남긴 것을 책으로 묶어낸 책이다.

공교롭게도 위의 두 개의 글 다 내용은 ‘감옥’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계절적으로 겨울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옥’이 어떤 곳인가. 자유가 억압되고 신체가 구속되며 소통이 저해되고 교류가 단절되는 공간을 말한다. 그럼에도 정신과 영혼은 한없는 자유를 누리며 가없는 사유(思惟)를 만끽한다. 사유(思惟)야 말로 참다운 자유이고 진리의 추구를 촉진한다. 구속이 없고 억압이 없으며 불만이 없는 세계다. 가장 큰 자유, 가장 위대한 사상, 무한 진리의 세계가 좁은 공간의 감옥에서 가능하다는 건 인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위대한 인간일수록 또 수형(受刑)의 이력을 지니고 있음은 어쩜 숙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참다운 지식인이 되고 우아한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감옥생활을 해봐야 할 일이다. 인내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워 나오는 곳이 감옥이다. 기나긴 수형생활을 견디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는 수밖에 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없으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는 것도 지혜다.

미움과 증오도, 원망과 저주도, 부자유의 속박도 따지고 보면 다 부질없는 유희(遊戲)에 불과할 터다. 생각이 다르다고, 제도를 비난했다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입에 재갈을 물리며, 손발을 착고(着錮)에 채우고, 감옥에 잡아넣은 무리에 대하여 복수를 하자면 가장 큰 형벌이 용서임을 깨닫는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용서한 김근태의 위대한 결단은 그 근본에 연민과 사랑이 있었음으로써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한 행위를 본받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분화시킬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기와, 연민을 느끼는 자기로 분화시킬 줄 아는 슬기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둘로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 법이다. 하나는 죽어도 하나는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위신을 지켜 나가려는 마음의 이법(理法)이 곧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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