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세요, 나를 찾는 여행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육교에 걸린 플랜카드가 있어 눈여겨보게 된다. 대체로 계몽성 글이 적혀 있거나 행사안내 등이 주 내용인데 가끔은 시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글귀가 있어 오랜 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시작하세요. 나를 찾는 여행」
「BTN 불교TV」가 2016년 연중 캠페인으로 정한 문구(文句)다.
정초부터 내걸린 이 글귀를 늘 보아오는데, 쉬 잊혀 지지 않는 문구여서 수시로 머리에 떠올려보지만, 그럼에도 오늘은 몇 번이나 입속으로 이 말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부처님 오신날이 지났음에도 오늘은 내가 머무르는 거소에서 가까운 동네 절을 찾았다. 정작 부처님 오신날인 엊그제는 절을 찾지 못했었다. 몸과 마음이 여의치 못해서였다. 내가 신앙하는 종교와는 다르지만, 불교가 내뿜는 매력이 적지 않아서 나는 평소에도 자주 홀로 절을 찾는 편이다. 핑계로는 우선 사진적 소재가 많으므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실인즉슨 불교가 간직한 문화와 무궁한 지혜의 깊이가 나를 유인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하여 틀리지 않는 말이다.
나는 인간의 운명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출생과 성장의 이력이 남다름을 알고서부터 파고든 인간의 본질과 행‧불행의 연원에 깊은 궁금증이 일어서인지 모를 일이다. 인간의 운명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해석과 처방은 종교마다 다르다. 모든 인간고의 근원을 기독교는 죄 때문이라 하고, 불교는 무지와 욕심,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본다. 부처님 오신날이 되면 연등을 내거는 것도 다 무명에서 깨어나 지혜를 터득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연유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에 나는 관심이 없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문제가 예외 없이 인간의 불행에 기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된다. 현실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은 죗값을 치러야 마음이 편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의 사상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낙원에서의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았는데, 죄를 범함으로 인해 낙원에서의 추방으로 죄악 세상에서 살게 됐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 범죄로 인한 죗값을 대신 치른 이가 예수다. 고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기독교의 기본사상이다. 이 사상에 충실한 신자를 독실한 신자로 믿고 받드는 풍조가 현재의 크리스천에게 미만해 있음을 본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크리스천인 나는 금년 정초 교구에 속한 구역의 저녁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간단한 예배 후에는 친교를 목적으로 한 간담 시간을 갖는 것이 통례인데 거기서 참석원 각자는 새해의 목표라든가 계획을 털어놓으며 환담을 나누게 되었다. 아무개 장노가 나를 보고 새해의 목표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도 현역에 종사하는 분으로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기독교의 불모지(외국)에 가 선교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 오랜 꿈이라고 했다. 실재의 생활에서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하다. 거기에 비하면 솔직히 나는 나이롱신자에 가깝다. 엄격한 자기절제의 용기도 없고, 교회가 정한 생활규범에 잘 따르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 내가 새해의 꿈이라야 뭐 별 거가 있겠는가. 늦었지만 젊었을 때 하지 못했던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자 꿈일 뿐이다.
「나는 새해에 동양학을 좀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참석원 모두가 동그란 눈을 하고 나를 이상스레 쳐다보는 인상을 받았다. 동양인이 동양학을 하고 싶어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한 처사라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현재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너무나 서구화되어 있지 않은가.
「그거 점치는 책 아니냐?」는 의문부호가 달린 질문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즉각적으로 나의 면전에 날아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주역이란 ‘점치는 책’이 맞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 보다는 심오한 우주자연의 원리와 인간 삶의 도리를 설파한 철학책에 가깝다. 점(占)이란 무엇인가. 미래사나 궁금한 것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발견한 일종의 수단을 가리킴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종교는 점치는 행위를 금하고 있음을 본다. 아는 것이 부족한 사람이 기독교는 점을 부정하지만 불교는 점을 수용하고 있는 듯한 발언을 하는데 그건 오해다. 불교 역시도 정법에서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다만 핑계 대기를 중생을 제도하려면 근기에 따라 해야 하므로 하나의 방편으로 점치는 행위를 용인하고 있다는 변명을 해댄다. 웃기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사실 미래사는 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에 인간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절대자는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아도 점치는 사례는 수시로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은 일단 접어 두고라도 신약에서도 점치는 행위는 예사로 행사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가 자살 하고 난 뒤 빈자리를 메울 제자를 선택할 때에도 그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후계자를 선정했다. 인간사에 있어 점치는 행위는 고대나 현대나 무시로 행해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점치는 행위를 권장하거나 옹호할 생각에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주역」이라는 책을 점치는 책으로 오해한 나머지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을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독실하다는 크리스천의 자세가 잘못됐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 믿음이 맹신과 광신을 초래하고 화평스러워야 할 인간관계를 어색하게 단절시킴을 알아야 한다. 이현주라는 목사가 있는데 이분은 목사의 신분으로 불교의 금강경 해설서를 낸 분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어느 여교수님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크리스천 대학교에 재직하면서 평생을 무속연구에 바친 이도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점치는 책을 봐서도 안 되고, 무당을 연구하거나 상대해서도 안 되며, 절에도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편견을 넘어 미신에 이르며, 가없는 공포를 조장할 광신도가 될 개연성이 높다. 근간 세계적 테러 단체인 IS가 벌이는 가공할 테러 현상을 떠올리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행위인가를 깨닫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범죄와 해악은 평범한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에 비길 바가 되지 못할 만큼 크고 무거움을 인류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중세를 암흑시대로 부르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마녀사냥으로 악명 높은 가톨릭의 범죄, 십자군 전쟁, 천국행 부적을 팔아먹은 거룩한 사제들이 지옥에 갔다는 소식은 아직도 들어본 적이 없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세월호 사건의 원인제공자로 유병언이라는 인간이 있음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알고 있다. 그가 종교단체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를 곰곰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사이비 기독교의 수장이지 참된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지옥문은 항상 열려있어야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동네의 작은 절은 아직도 축제의 뒷마무리에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나는 조용히 대웅전과 전각들을 둘러보면서 육교의 플랜카드에 적힌 글의 내용을 거듭거듭 음미하길 했다.
이루거나 충족한 적도 없으면서 아직도 마음속에는 욕망이 꿈틀거리며, 세상의 불공평을 원망하고 모든 불행과 고난의 원인을 남이나 세상 탓으로 돌리며 분노를 참지 못해하는 어리석은 무명의 세계에서,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은 소중하고도 귀한 깨우침이다.
이번 글이 걸리기 전에는 「멈추고 자기에게로 돌아오세요」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었다.
그랬다 우리는.
모든 원인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고 남을 원망하고 비난하기에 바빴었다. 거리의 장삼이사로부터 저 위의 최고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잘못한 것은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렸다. 아직도 마무리 되지 못한 세월호 사건에서부터, 개혁을 통한 경제부흥의 시나리오가 시도조차 해 볼 수 없는 것은 법안 통과를 극력 저지하고 있는 세력 때문에 잘 되지 않는다는 푸념 아닌 한숨이 우리 사회에 근심을 더하고 있음을 본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모든 현상의 원인에는 국민 각자가 공범으로 위치하고 있었음을 정녕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세월호 사고 이후 안전에 대한 경고와 해법이 소나기 같이 쏟아졌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무법과 탈법과 방심이 천연덕스런 모습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땐 서슬이 시퍼렇게 범법자들을 단죄하더니 옷을 벗고 변호사가 되더니 공식적으로 나타난 일 년 수입만 91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린 그 변호사는 도대체 무슨 도깨비 방망이를 가졌기에 그게 가능했는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썩어도 너무 썩었고, 얼굴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다고 해야겠다. 먹물 먹은 자들의 행태가 이러니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을 해야 살아남을 수 기업도 근로자들의 반발을 사 뜻대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공멸의 길을 향해 치닫고 있다.
생각하면 환멸과 비애만 가득해 진다. 불만, 좌절, 가난, 고통, 비참을 어느 때까지 우리는 겪어야 할까.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이라도 세속의 근심걱정과 불평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것으로 의의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공휴일로 지정된 것도 어쩜 그것을 노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시작하여야 한다. 자신을 찾는 여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자세에서 돌아서 내 자신에게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최인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었다.
기독교를 그는 정신의 아버지로, 불교를 그는 영혼의 어머니로 삼고 살았다. “인생이야말로 길 위에서 태어나고 길 위에서 사랑하고 길 위에서 죽어가는 하나의 길 없는 길임을 절실히 느끼는 이즈음에도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불교소설 「길 없는 길」을 펴내면서 털어놓은 소회였다. 그러면서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소천(召天)했다. 이 이상의 장엄한 죽음이 있을 수 있을까.
두 부모를 간절히 섬기고 싶어 했던 그.
이마에 땀방울을 맺히면서 나는 절을 물러 나왔다. 절에 가서 배울 수 있는 건 하심(下心)이다. 방하착(方下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