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발매된 방수사양의 Heavy Duty 시리즈 “스포츠 워크맨” 이후 사라졌던 전천후 모델이 1991년 “FIELD”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활하였습니다. (모델명WM-SX77) 본체 캐비닛은 두께4mm의 수지재질 (WM-EX80 대비 6.7배)로 만들었고, 카세트 케이스도 1.0mm의 알루미늄 재질(타 모델 대비1.3배)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견고한 알루미늄 다이캐스트의 개폐버클을 장착하여 방수는 물론 낙하의 충격에 강한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외장 배터리 케이스도 워크맨 초기의 C 사이즈 건전지 수납형태로 당시로서는 최장시간인 33시간 재생을 실현하였습니다. 이렇게 튼튼한 재질과 구조덕분에 다소 격렬한 운동과 야외활동 시에도 문제없이 음악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 모델 이후 워크맨의 주요 기능인 “Anti Rolling Mechanism”이 부활하였는데, 이는 초창기 워크맨에서부터 장착된 기능으로 “Walking Stereo”로서의 워크맨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나1988년 중반 이후 출시된 모델에서부터 없어졌다 다시 채택되었습니다.
1974년 7월 3일 남아공더반의 낭보와 4전 5기의 신화, 홍 수 환 선수
1974년 세계 랭킹 2위였던 홍수환 선수(개인적으로는 중앙고 선배)는 당시 육군(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 일병의 신분으로 1974년 7월 3일 열린 남아공의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 매치에 초대받아 챔피언인 아놀드 테일러를 상대로 네 차례 다운을 빼앗아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1974년 7월 3일 경기에서 승리한홍수환 선수와 아놀드 테일러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어머니 황논성씨와 재회
홍수환 일병의 소속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환영인파 속에 카퍼레이드
홍수환 선수는 1966년 김기수 선수가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으로 등극한 후 2번째로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직항이 없어서 비행기를 35시간 동안 여섯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했기에 심신은 지쳐있었지만 세계 챔피언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려야겠다는 일념으로 통쾌하게 승리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1974년 7월 8일 故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을수여받는 홍수환 일병
故 육영수 여사와 악수하는 홍수환 일병.이 환영행사가 있고 불과 한달뒤인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는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조총련계 간첩인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경기를 마치고 한국의 어머니와 전화 통화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하자 어머니 황논성 씨는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경기 3시간쯤 후 한국에서 이 경기가 녹화 중계로 오전 6시쯤 방송되었고 경기뿐만 아니라 모자간의 대화도 방송되면서 온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홍수환 선수의 어머니는 평택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카투사 스낵바에서 일하셨고 1987년 1월 카투사 신병훈련 때 여러 번 뵐 수 있었습니다.)
계몽사가 발간했던 새소년 1974년 9월호의 표지로 등장했던 홍수환 선수
그로부터 3 후인 1977년 11월 27일 한국 권투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온 국민은 생중계로 보게 되었습니다. WBA 주니어 페더급 결정전, 상대는 파나마의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11전 11KO승의 17세 엑토르 카라스키야였습니다. 당시 파나마는 이미 3명의 세계 챔피언이 있었기 때문에 카라스키야가 승리하면 4명의 챔피언을 가진 국가가 될 것으로 기대를 하고 이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축제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치렀습니다. (이 경기 몇 주전에 코스타리카에서 위성중계 방송된 김태호 선수의 경기에서 김 선수가 KO패하면서 홍수환 선수의 경기를 위성중계를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TBC 홍진기 사장은 예정대로 위성중계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1977년 11월 28일 경향신문에 실린 홍수환 선수의 4전5기 승리소식 통상 권투 경기에서는 한 라운드에 3번 다운되면 KO로 끝나 버리지만 이 경기에서는 타이틀 조인식에서 카라스키야측에 프리넉다운(Free Knock-down)제를 제안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심판이 경기중단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많이 다운이 되도 경기가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11경기 모두를 KO로 승리한 겁 없는 17세의 카라스키야가 28세의 홍수환 선수를 철저히 짓밟아 버리려고 이러한 제안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프리 넉다운제로 홍수환 선수의 4전 5기의 신화가 탄생하였습니다. 1977년 11월 28일 동아일보사진기사 – 카라스키야가 홍수환 선수의 다운블로를 맞고 쓰러져 있는 모습
홍수환 선수는2회에 무려 4번이나 다운 당하면서 카라스키야는 승리를 굳히는 듯 했습니다. 당시 파나마는 총기 소지가 가능하여 경기장안에는 흥분한 관중들이 천장에 총을 쏘는 등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현지에서 경기 위성중계를 담당했던 TBC 박병학 캐스터는“역부족입니다..”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고 같이 TV를 보시던 아버님도 안되겠다며 낙담을 하셨습니다.
3라운드의 공이 울렸고 트레이너는 피투성이가 된 홍수환 선수에게 1라운드만 더 뛴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15 라운드 뛰고 몸이 만신창이가 된 후 판정패 당하느니 차라리 3 라운드에서 수건을 던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KBS 특집 "대한민국 스포츠 50년사"에서 캡쳐
기적은 3라운드에서 벌어 졌습니다. 심기일전 투혼을 다진 홍수환 선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카라스케야에게 날린 원투 스트레이트 펀치가 그대로 적중하였고 휘청거리는 그에게 라이트 어퍼컷으로 턱을 가격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되었고 충격으로 카라스키야가 로프를 등진 채 중심을 잃자 홍수환 선수는 왼손 바디블로를 날려 카라스키야를 완전히 넉다운 시켜 버렸습니다. 권투 역사상 전무후무한 4전 5기의 신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1977년 12월 5일 TBC기 방영한 홍수환 선수 개선특집 방송 편성표
1998년 12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 카라스키야와 재회한 홍수환 선수
경기 직후 홍수환 선수는 박병학 캐스터와의 인터뷰에서 또 한번 잊지 못할 말을 남깁니다. “자식이 건방져서 꼭 이기려고 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두 체급 석권 챔피언이 된 홍수환 선수는 1980년 은퇴할 때까지 50전 41승(14KO) 4무 5패의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록보다 그 당시 경기를 보았던 저를 포함한 온 국민의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것은 1974년 7월 3일 지구 반대편 남아공 더반의 홍수환 선수와 그의 어머니가 나누었던 전화 통화입니다. –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국민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