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에 발매된WM-EX88은 휴대 시 본체 오작동을 방지하기 위한 HOLD 스위치를 새롭게 “홀드 셔터(HOLD SHUTTER)”의 구조로 바꾸어 설계한 것입니다. 마치 몇 년 전 유행했던 슬라이드 타입의 휴대폰 처럼 말이지요.
실제로 기존의 찾기 쉽지 않은홀드 스위치보다도 직관적으로 홀드셔터를 닫는 것이 훨씬 쉽고 디자인 면에서도 액센트를 줌으로써 다른 모델에 비해 차별화를 할 수 있어 홀드셔터는 상당기간 워크맨의 기본기능화 되었습니다.
또한 음 누출을 방지하기 위한3번째 해결책으로 음 누출이 일어날 것 같은 음량을 자동적으로 억제하여 쾌적음량 스위치(AVLS)가 탑재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침내 워크맨 시리즈에도 AMS(녹음Blank를 이용한 선곡 시스템)가 장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터질듯한 이 가슴을! – 일본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3000안타의 장훈 스토리 1979년 11월 22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던 "터질듯한 이 가슴을"
지난 20일 잠실구장에서는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 선수들이 모여 한일 레전드 매치를 벌였습니다. 이 때 일본 레전드 팀 단장으로 오셨던 분이 재일 교포인 장훈 선수였습니다. 일본에서 장훈 선수는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라는 일본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안타 제조기(安打製造機)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7월 20일 한국 레전트 팀김성근 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훈 일본 레전트 팀 단장(조선일보 기사 발췌) 장훈 선수는 1940년 6월 19일 일본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오즈 정(大洲町)에서 아버지 장상정(張相禎)과 어머니 박순분(朴順分)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군이지만, 아버지가 먼저 도일(度日)해 왔었고, 그 후에 어머니가 가족들을 이끌고 대한해협을 건넜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시 단바라 신마치(현: 미나미 구 단바라)에서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11세의 큰 누나를 잃었습니다.
일본 레전드 팀을 이끌고 온 장훈 단장(조선일보 기사 발췌) 5세 때 후진하는 트럭을 피하다 화덕에 오른손이 들어가 화상을 입고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네 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이 붙었습니다. 또한 다른 손가락의 신경에도 손상이 가 오른손의 다른 부분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본래 오른손잡이였지만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왼손을 사용하였습니다. 장훈 선수는 이 같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귀화하지 않은 채 재일 한국인에 대한 수많은 차별을 견뎌 내면서 일본 프로 야구사에 길이 빛날 통산 3085안타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는 2006년부터 TBS TV, TBS 라디오의 야구 해설자로 맡고 있으며 한국 야구 위원회 고문으로서 한국 프로 야구 탄생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는 소학교 5학년 무렵에 야구를 처음으로 접했고, 그는 수영에 자신이 있었지만 진학한 기타하라 중학교에는 수영부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야구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투수와 타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히로시마상업고등학교 또는 코우료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폭력성이 있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해, 야구를 중단하고 마쓰모토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는 야구 테스트와 전입 시험에 합격해 오사카 부의 나니와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당시 나니와상고는 교내 폭력 사고로 2년간 경기 출장 금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1960년대 초 도에이 시절의 장훈 선수
장훈 선수는 나니와상고에서 에이스이자 4번 타자였지만, 무리한 변화구 연습으로 어깨가 망가져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야구를 포기하려 했을 때 타자로 전향해 보라는 권유에 타자로 재기했다고 합니다. 1957년 가을, 출전 금지가 해제되었고 긴키 대회 예선 13경기에서 홈런 11개, 5할 6푼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전혀 무관한 야구부 내의 폭력 사고로 휴부(休部) 명령을 받게 되고, 당시 ‘한번 휴부를 받은 선수는 복귀 후 3개월간 경기 출전이 불가능하다‘라는 야구 규약 때문에 고시엔에 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장훈 선수는 대신 ‘재일한국인 고교야구선수단‘에 선수로 참가했고, 한국 선발팀과 경기를 별여 13승 1무를 기록했고 장훈은 홈런상과 대회 MVP를 수상하였습니다.
도에이 플라이어스 시절의 장훈 선수 (1959 ~ 1972)
장훈 선수는 고등학교 시절 동갑내기인 오 사다하루와 함께 ‘동 오 사다하루 서 장훈‘(東の王、西の張本)이라고 불리며, 초고교급 선수의 면모를 과시하였습니다. 장훈 선수는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고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형의 충고로 입단하지 않았습니다. 고교 3학년 때에는 요미우리를 비롯한 여러 팀의 입단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휴부를 받은 사실을 빌미로 요미우리 구단 고위층이 감독의 스카우트 요청을 거부하면서 요미우리 입단은 무산되었습니다. 주니치 드래곤스 등이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직접 히로시마의 판자집에 찾아와 호소한 도에이 플라이어스 구단주의 정성에 감복하여 1958년 11월 16일 도쿄 도에이 본사에서 계약금 200만 엔, 월급 4만 5천 엔에 정식 입단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인 왕정치선수와 함께
당시 일본 프로 야구는 구단별로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할 수 있었고, 2명만 출전시킬 수 있었다. 장훈 선수는 대한민국 국적이었으므로,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의 적용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초고교급 선수라 해도 고교를 갓 졸업한 장훈 선수가 미국인 용병과 출장 경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장훈 선수 본인 뿐 아니라 구단에도 큰 손실이었다.
일본햄 파이터즈 시절의 장훈 선수 (1974 ~ 1975) 도에이의 구단주는 장훈 선수에게 양자가 되면서 귀화할 것을 권했지만, 장훈의 어머니는 그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게 하였습니다. 도에이 구단주는 장훈 선수를 놓칠 수 없었기에 도에이가 속한 퍼시픽 리그의 규약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선수는 국적을 불문하고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 삽입을 제안하여 관철하였습니다. 이로써 장훈 선수 덕분에 이후 재일 한국인 야구 선수들이 귀화하지 않고도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요미우리 지이언츠 시절의 장훈 선수 (1976 ~ 1979) 장훈 선수는 1959년 4월 10일 개막전에서 6번 좌익수로 기용되었는데, 첫 타석에서 ‘터프가이‘와 ‘가솔린 탱크‘로 불리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투수인 요네다 데쓰야에게 3구 삼진을 당했고, 2회초 외야 수비에서 평범한 뜬 공을 머리 위로 흘려 보내고는 즉시 교체되었습니다. 그는 다음날 4월 11일 고마자와 구장에서 열린 한큐전에서 3회말 두 번째 타석에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좌중간 2루타로 개인 통산 1호 안타를 기록했고, 다음 타석에서 이시이 투수를 상대로 우측 홈런을 쳐내 개인 통산 1호 홈런을 기록하였습니다. 장훈 선수는 6월 중순에 프로 입단 47 경기 만에 3번으로 올라섰고, 같은 달 23일에는 4번에 발탁되었는데, 이는 고졸 신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첫 해 팀 최다 홈런 (13), 팀 최다 타점 (57), 타율 0.275를 기록했고, 기자단 투표서 141표 중 111표를 얻어 신인왕에 선정되었습니다. 자이언츠 시절 우승 후 왕정치(가운데) 선수에게 축하의 맥주 세레모니 데뷔 2년 차인 1960년 시즌, 그는 개막전부터 11경기 연속 안타를 쳐냈고, 4월 17일에는 개인 첫 1경기 2홈런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해 그는 올스타 선수로 선정되어 올스타전에 출전에 MVP를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이 해 시즌 0.302의 타율로 타격 4위를 기록했고, 시즌이 끝난 뒤에는 일본 올스타팀에 차출되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경기를 하였습니다. 데뷔 3년 차인 1961년 시즌, 그는 5월 7일 긴테쓰 전에서 개인 첫 사이클링 히트 (2점 홈런, 3루타, 안타, 2루타)를 기록했고, 난카이의 스기우라를 상대로 첫 만루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이 해 타율 0.336으로 처음으로 수위 타자에 올라섰습니다. 사고로 손가락이 붙는 불운을 이겨낸 광각타법의 장훈 선수
데뷔 4년차인 1962년 시즌에는 처음으로 30개 이상의 홈런을 쳐냈으며, 결승 2점 홈런으로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했고, 또한 이 해 시즌 MVP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는 이 해 시즌 0.333의 타율, 31 홈런, 99 타점을 기록했다. 이 해 도에이 플라이어스는 명감독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지도하에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이자 ‘자토페크 투수‘로 알려진 무라야마 미노루가 소속된 한신을 꺾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일본 시리즈에서 장훈은 26타수 12안타로 0.461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시리즈 시상식에서 타격 2위로 기능상을 받았습니다.
요미우리의 두 거인 -왕정치(Osadaharu)와장훈(일본명 Harimoto)의 앞글자를딴 OH포 탄생
장훈 선수는 1963년 시즌 타율 0.280을 기록했고, 1964년 시즌에는 다시 3할 대의 타율로 복귀했으나 다리 통증으로 인해서 연속 경기 출장은 393 경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는 1965년 시즌 다시 3할 이하로 추락했으나, 1966년 시즌 0.330의 타율로 타격 2위를 차지했고, 이후 1967년부터 1970년까지 4회 연속 수위 타자 기록을 세웠습니다. 특히 1970년 시즌에는 0.3834의 타율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1971년 시즌, 장훈 선수는 0.313의 타율로 전 해 시즌보다 타율이 비교적 많이 하락했습니다. 하지만 1972년 시즌 0.358의 타율로 수위 타자에 복귀했고, 1973년 시즌에는 개막전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쳐냈고, 이 해 시즌에는 수석 코치와 타격 코치를 겸했는데, 코치 겸 선수로 뛰며 0.324의 타율을 기록했다. 1974년 시즌, 그는 다시 0.340의 타율로 수위 타자에 올랐고, 13타석 연속 출루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1975년 시즌, 그는 0.276의 타율을 기록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3000안타를 기록한 장훈 선수 (1980년 5월 28일) 1975년 12월 11일 센트럴 리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장훈을 받아들이고 그 팀에 있던 다카하시 가즈미, 도미다 마사루를 닛폰햄 파이터스에 보내는 방식으로 2:1 교환 트레이드를 하였다. 오 사다하루–나가시마의 ‘ON포‘(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에 이은 오 사다하루–하리모토 이사오의 ‘OH포‘가 탄생했다. 그 해 시즌 장훈 선수는 1모차이로 (0.3547) 타격 2위를 기록했고, 30경기 연속 안타로 당시 센트럴 리그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1977년 시즌, 장훈 선수는 2년 연속 타격 2위 (0.348, 1위와 1푼 차이)를 기록했습니다. 1976-77년 시즌 자이언츠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나, 1976년, 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해 2년 연속 시리즈 준우승을 기록했습니다. 3000안타의 대위업을 달성한 후 어머니 박순분 여사와 함께한 장훈 선수 1978년 시즌, 장훈 선수는 0.309의 타율을 기록하였고. 1979년 시즌, 중심성 각막염으로 인해 77경기에만 출전하였습니다. 시즌이 끝나고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 롯데 오리온스에서의 첫 시즌, 장훈 선수는61의 타율로 부진했습니다. 그러나 5월 28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6회말 1사 2루의 4번째 타석에서 야마구치 다카시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을 기록해,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3000안타의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장훈 선수는 1981년 시즌 끝으로 은퇴하였습니다. 일본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헌액된 장훈 선수 통산 성적은 2752경기, 504홈런, 3085안타, 타율 0.319, 1676타점, 319도루를 기록했습니다. 장훈 선수의 3085안타는 2009년 4월 17일 시애틀 마리너즈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즈키 이치로가 3086안타를 칠 때까지 무려 19년간 깨지지 않았던 대기록이었으며, 수위 타자 7회(4회 연속 수상)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또, 500홈런-300도루 클럽 가입도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는 현재 유일합니다. (메이저 리그에서 3000안타-5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뉴욕 자이언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뉴욕 메츠에서 활약한 윌리 메이스가 유일합니다). 1990년 99번째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일본 야구 위원회는 올스타전 기간 중 헌액식을 성대하게 치러 주었습니다.
2008년 1월 22일 한국에서 무궁화장을 수여받은 기념 파티에서 왕정치(왼쪽)소프트뱅크 감독과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종신명예감독(가운데)과 함께
* 장훈 선수 어록 “당신들은 모른다. 손가락이 붙어버려 4개가 됐지만 모자란 손가락은 조국이 대신 해 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요미우리 자이언트 시절 경기장 히어로 인터뷰에서 마이크를 잡고, “장훈입니다.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 하나 하나는 일본인들에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으며, 자랑스런 우리 조선 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