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비단한묶음과갖가지모양의금빛과푸른빛의채단을집종에게함께부쳐서경으로보내네.모름지기산을뒤에두르고시내를앞에둔집을그려주시게.온갖꽃과대나무천그루를심어두고,가운데로는남쪽으로마루를터주게.그앞뜰을넓게하여패랭이꽃과금선화를심어놓고,괴석과해묵은화분을늘어놓아주시게.동편의안방에는휘장을걷고도서천권을진열하여야하네.구리병에는공작새의꼬리깃털을꽂아놓고,비자나무탁자위에는박산향로를얹어놓아주게.서쪽방에는창을내어애첩이나물국을끓여손수동동주를걸러신선로에따르는모습을그려주게.나는방가운데에서보료에기대어누어책을읽고있고,자네와다른한벗은양옆에서즐겁게웃는데,두건과비단신을갖춰신고도복을입고있되허리띠는두르지않은모습으로그려야하네.발밖에서는한오라기향연이일어나야겠지.그리고학두마리는바위의이끼를쪼고있고,산동은빗자루를들고떨어진꽃잎을쓸고있어야겠네.이러면인생의일이다갖추어진것일세그림이다되면이수준공이돌아오는편에부처주시게.간절히바라고또바라네 -2.맛난만남이런집을그려주게|허균과화가이정 [정민]著.미쳐야미친다不狂不及 허균이1607년정월에평양에가있던화가이정에게보낸편지글이다. …중략…
세상사는일이하도팍팍하다보니,허균그는이런뜬금없는생각이라도하면서한시절의스산함을걷어내려했던모양이다.이정이그림을그려주면그것을방벽에걸어놓고,생각만해도기분이환해지고웃음이머금어지는그런놀이를하고싶었던것이다. 하지만허균은이그림을받지못했다.평양에가있던이정이이편지가도착하고나서며칠안되어갑자기세상을떴기때문이다.사망원인은술병이라고했다.죽을때그의나이는겨우서른이었다.정작허균이그의사망소식을들은것은석달뒤인5월이었다.이때누군가에게보낸편지가남아있다. 서쪽에서온사람이이정이죽었다고말하는데,이말이참말입니까?통곡하고피눈물을흘립니다.하늘이여아!애통하도다.내누구와더불어물외에서노닌단말인가?세상사람들은그그림을중히여기지만나는그사람을중히여겼다오.그대또한이를아시잖소?풍류가문득다하고말았으니,어찌슬퍼하지않을수있겠소? 나이는허균이그보다아홉살위였고,그는화공의낮은신분이었다.나이를잊고신분을떠나사귐을나누었던그가,네가못오면내옆에서웃고떠드는그림이라도그려서보내라고했던그가,잘먹고잘살라며정승의귀한비단을다버려놓고달아났던그가이렇게덧없이훌쩍가버리자그는참안타까웠던모양이다.세상사람들은그그림을중하게여겼지만,나는그사람을중히여겼다는말,그가죽자풍류가문득다스러지고말았다는말이긴여운을남긴다.
석달뒤에허균은다시한통의편지를누군가에게보냈다. 간밤꿈에이정을만나보았소.그가하는말이죽음이몹시즐겁다고하더군.이것이야말로삶을달관한말이었네그려.깨어나생각해보니,이몸뚱아리또한나의소유가아닐진대,뜬인생에온갖일을어찌족히마음에두겠는가.끝내마땅히인끈을던져버려바다위흰갈매기를벗삼을뿐이니,애오라지흰강물을가리켜본다네. 이정이세상을뜬지반년이지나도록허균은자못충격에서헤어나지못했다.이번엔꿈에그가나타나내게말했다."막상죽고나니너무홀가분하고즐겁습니다.개운해요.걱정도없고,눈치보며그림그리지않아도되고,같잖은꼴보지않아도되고.""여보게,자네!날들으라고하는말인게군.그사이나도참일이많았었네.자네세상을뜨고얼마안되어삼척부사로부임했다가,두달만에향을피워놓고예불을올렸다는비방을받아쫒겨나고말았네.이제겨우다시복직되어서울로돌아왔네만은,생각해보면내사는것도내뜻대로되는게하나도없네그려.벼슬이고뭐고다집어치우고동해바닷가옛집으로돌아가바다위흰갈매기를벗삼아시름없이늙다가훌쩍자네있는세상으로건너가고싶은마음뿐일세." 이정은죽기얼마전에평양에서허균에게편지를보냈던듯하다.허균은이때이정에게앞서읽은,그림을청한편지와함께〈지사산으로돌아가는이나옹을보내며〉란글을지어주었다.여기에는또이런내용이적혀있다. 이정은젊어금강산에들어가신여스님을스승삼아장차머리를깎고중이되려하였으나,난리로인하여뜻을이루지못했다.어른이되어서는서쪽변방을떠돈것이여러해가되었는데,금년봄에장차금강산으로돌아가그스승을다시찾겠다고한다.비록승려가되지는않더라도불경을다읽어저유마힐거사나방거사처럼마음을닦아성품을보존코자한다는것이다.와서내게가겠다고고하기에내가말했다."자네가이를하려는것은또한어리석은배움으로이익을쫒는것보다현명한것일세그려."
……….중략…………. 허균은이정에게서그가꿈꾸었던집그림을결국받지못했다. 대신〈누추한나의집〉이란글을남겨,그꿈을달랬다. 방은너비가10홀쯤되는데,남쪽으로문두개를열어놓았다.한낮해가와서내리쪼이면환하고또따뜻하다.집은비록덜렁벽만세워두었지만책은경사자집을두루갖추어두었다.그나머지짧은잠방이입은사내하나가다만탁문군을짝하고서,차를반사발쯤따르고,향하나를피워놓았다.천지고금을굽어보고우러르며물러나사노라니사람들은누추한집이라고,누추해살수가없다고말들하지만,내보매는신선사는땅이따로없다.마음이편안하고몸도편안하니누가이곳을누추하다말하리.내가정작누추하게여기는것은몸과이름이함께썩는것이다.집이사쑥대로얽어두었다지만,도연명도겨우담만둘러치고살았다.군자가여기에산다면무슨누추함이있겠는가? 넓지는않지만,방문을열면한낮해가제마음대로들어와놀다가는방.환한햇살이물밀듯들어와서삶의그늘을지워주는방.별다른장식은없어도내읽고싶은책은갖춰두고,사랑하는아내와차를마시며독서에열중할수있는방.향을피워정신을맑게하고,세상에서저만치떨어져있지만,천지고금을굽어보고우러르며아득한옛선인들과만나고,천고를벗으로삼아마음껏노닐수있는방. 사람들아,나의거처가누추하다고말하지말라.정말누추한것은더러운명예를쫓아다니는일,이한몸이죽고나자이름도함께썩어없어지고마는것이다.하여세상에살다간아무런자취도남지않는일,평생을아둥바둥하다가결국아무것도이룬것없이손가락질만받다가죽는것이다.쑥대지붕아래에도우주를덮을큰자유가있다.도연명도무릎을겨우들일만한좁은집에서비바람도가리지못할구차한살림을살았다.그러나보라.그의이름은백대의세월에도지워지지않고뭇사람의추앙을한몸에받고있다.대저나도그런삶을살고싶은것이다. 조선후기이용휴의〈구곡유거기〉란글에도자신이꿈에그렸던동산의모습이나온다. 나는일찍이한가지생각을한일이있다.굳이깊은산인적이끊긴골짜기일필요는없겠고,도성가운데한곳궁벽하고조용한곳을골라몇칸집을엮어야지.방안에는거문고와책,술동이와바둑판을갖춰두고,석벽을울타리로삼겠다.땅을조금개간해서좋은나무를심어예쁜새들을깃들게해야지.나머지땅에는남새밭을일궈서이것으로술안주를만들겠다.또콩시렁과포도나무시렁을만들어그늘을지워야지.처마앞에는꽃과수석을열지어놓겠다.꽃은얻기어려운것을찾는대신사계절새로운꽃이이어필수있는것을구해놓아야지.바위는가져오기어려운것보단작으면서도비쩍말라서괴기한것을가져오겠다.마음맞는벗한사람을이웃에두고,그거처하는집의규모나위치는대략서로비슷하게해서,대나무를엮어문을달아서로통하게해놓고왕래해야지.난간에서서부르면소리가마치기도전에신발이이미섬돌에다다를것이다.비록비바람이심하다해도상관이없으리니이같이즐기며늙어갔으면좋겠다. 생각속에서야무슨일인들못하겠는가.소박하다면소박하기그지없고,야무지다면야무지기짝이없는꿈이다.그러나이용휴그도이런소망을종내이루지는못했을것이다.이정이그렇게허망하게세상을뜬뒤,허균은더러운세상을뿌리째뒤엎어보겠다고반역을꿈꾸다쉰살의나이로형장의이슬로사라졌다.이정에게편지를보낸지11년뒤의일이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않으면미치지못한다.세상에미치지않고이룰수있는큰일이란없다.학문도예술도사랑도나를온전히잊는몰두속에서만빛나는성취를이룰수있다.한시대를열광케한지적,예술적성취속에는스스로도제어하지못하는광기와열정이깔려있다. 이책은조선시대지식인의내면을사로잡았던이러한열정과광기를탐색한글이다.허균,권필,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정약용,김득신,노긍,김영등내가이책에서관심을둔인물들은우연찮게도대부분그시대의메이저리거들이아니라주변또는경계를아슬하게비껴갔던안티혹은마이너들이었다. 누구에게나자신의시대는자못격정적이다.이격정앞에온몸을내던져맞부딪쳐나가는사람이있고,못본척고개를돌려버리는사람이있다.뼈아픈시련을자기발전의밑바대로삼아용수철처럼튀어오른사람과,한때의득의가주는포만감에젖어역사에흔적조차남기지못한채스러져버린사람도있다.이책에나오는이들은모두전자의삶을살았던사람들이다. 지난10년가까이나는이들과만나울고또웃었다.현실의중압이버거워달아나고싶다가도이들앞에서면정신이번쩍들었다.나태와안일에젖었을때뒤통수를후려치는죽비소리를들었다.현실앞에부서지면서도결코외면하거나회피하지않았던슬프고칼날같고고마운기록들이여기에있다.나는이책에서다만기록의행간에숨어잘보이지않던이들의이야기를먼지털어전달하는사람의소임만을다하고자했다. 나는이책을통해잊혀진작은영웅들을복원해내고싶다.그들은죄인으로,역적으로,서얼로,혹은천대받고멸시받는기생과화가로한세상을고달프게건너갔다.이들은사람들의기억에서잊혀진채,형장의이슬로사라지거나심지어굶어죽기까지했다.그들의삶은대부분잊혀졌지만,어느순간나를후끈달아오르게하고,정신이번쩍들게했던그들의뜨겁고따뜻한마음만은오래기억하고싶다. 절망속에서성실과노력으로자신의세계를우뚝세워올린노력가들,삶의곧예술이되고,예술이그자체로삶이었던예술가들,스스로를극한으로몰아세워한시대의앙가슴과만나려했던마니아들의삶속에나를비춰보는일은,본받을만한사표(師表)도,뚜렷한지향도없어스산하기짝이없는이시대를건너가는데작은위로와힘이될수있을것이다.아니어쩌면그들의그때와우리의지금은똑같은되풀이일지도모르겠다는생각도있다. 미쳐야미친다!이것은지난수년간내가내자신에게끊임없이되뇌어온화두이기도하다.날마다홍수처럼쏟아지는정보속에서,무엇보다중요한것은옳고그름을판단할주체를세우는일이다.주체를세우는일은식견을갖추고통찰력을지녀야만가능하다.남들하는대로하고가자는대로이리저리몰려다니기만한대서야도대체무슨일을할수있겠는가? 무엇보다푸른역사의해묵은글빚을갚게되어기쁘다.침묵으로기다려준박혜숙선생께미안하고고맙다.저자를업그레이드시켜주는편집자김주영씨와함께작업한것을감사하게생각한다.고암정병례선생께서그의칼로돌에새겨이책의얼굴을빛내주셨다.세상살아가며갚고새겨야할것이자꾸많아진다. 2004년3월 봄이오는행당동산에서 정민
국립중앙박물관소장
12엽으로이루어진이화첩에는그의천재적자질이잘나타나있다.이명작은번지듯스며있는담묵의바탕에거칠고대담한묵칠을가하여화면에강한활력을불어넣었으며특히일정하고과격한진한붓질은당시로서는파격적이라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