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마른 꽃 (전문)

마른꽃-박완서


처음에나는그의손밖에보지못했다.

반지낀손이었다.백금반지에박힌깊은청남색돌이’아콰마린’이라는걸단박알아보았다.비싼건아니지만흔한돌도아니었다그렇다고내가보석보는눈이밝은건전혀아니다.그럴리가없다.지금은그만두었지만한때무궁화다섯개짜리호텔지하상가에서보석상을하는친구가있었다.그친구의말재주에반해거기자주놀러다닌일은있지만그때얻어들은이야기도보석의질이나진짜가짜를감식하는실용성과는거리가먼쓰잘데없는것들이었다.미인이자기도모르게인물을하듯이보석도그아름다움에홀린인간의운명을간섭하게돼있다는뜻이었을까?주로보석에따라다니는슬프거나신비스러운전설,아니면명품을에워싼인간의제어할수없는욕망에대해친구는많이도알고있었고,어찌나화려한요설로그걸풀어내는지듣고있으면꼼짝없이넋이빠졌다.친구는돈을벌기위해서나보석이좋아서가아니라그런이야기에씌어그장사를하는것같았다.

‘아콰마린’에관해얻어들은이야기는그러나그런흥미진진한전설하곤좀달랐다.깊은바다빛깔이나는게양질의’아콰마린’이지만,그런건아주드물다면서드문까닭을이렇게말했다.극진히사랑하던애인을바다에서잃은청년이있었다나그가남은생애동안돈을버는대로오로지뛰어난’아콰마린’만사모은게늙어죽을때는드디어커다란마대자루하나가득하더라는것이었다.깊은바다에애인을빼앗긴청년이따라죽는대신바다빛깔결정체에다자신의혼을수없이던진이야기를친구는왠지심드렁하고간략하게말했다.그런무기교야말로극상의기교였을까.나역시무심히들었음에도불구하고그얘기를듣고나서다시본그돌의청남빛은면도날처럼예리하고차갑게가슴살을저미면서내안으로들어오는듯하여오싹소름이돋았다.

마지막기차를놓치고헐레벌떡당도한터미널은입추의여지가없었고역시막차까지매진이었다.막차까지는아직두시간도넘게남아있었고서울행은십분간격으로출발하는데도매진이라니.토요일오후였다.역에서놓친것도기차가아니라표살시간이었다.

친정조카결혼식에왔다가는길이었다.명색이집안의어른인데결혼식에청첩만해놓고돌아갈표하나마련해놓지않은조카네의야박한소갈머리가괘씸하고얄미웠다.서울서왕복표를끊지않은것이잘못이었지만실은당일로돌아오게될줄을미처몰었다.직장관계로그도시에자리잡고산지가오년째되는장조카는네가전화를넣을때마다한번다녀가시라는인사를잊은적이없었기때문에제동생결혼식을보러내려온고모를으레하루이틀묵어가게할줄알았다.친정은서울토박이였지만큰오라버니내외가앞서거니뒤서거니세상뜬후넷이나되는조카들은제각기직장따라전국에뿔뿔이흩어져살고있었다.유일하게서울에직장을얻은막내조카마저대구색시와연이닿아예식까지그고장에서치르게된게처가가그고장유지인때문만이라면조금은심사가꼬였으련만장조카네가거기살기에한결참아줄만했다.특별히고르는것도아닌데혼인이안되던막내를몇번씩선을뵈고드디어성사를시킨게큰형수였으니까신부가그고장사람인건당연했다.

예식장은온통그쪽사투리로시끌벅적했다.어른대접을할줄모르는조카며느리때문에가뜩이나울적한마음이더욱오그라드는것같았다.폐백받을때체면을차리려고한복까지뻗쳐입고갔는데폐백은생략해도좋다고사돈집에다일렀노라고했다.섭섭해할어른도안계신걸요.폐백을생략하도록한자신의처사를조카며느리는이렇게간략하게변명했다.어른이없다니,시고모는어른이아니란말인가.사람을면전에서그렇게무시할수있는조카며느리에질려나는나도모르게내편을찾느라고두리번거렸다.

세상에,폐백도안드릴거면면사포는뭣하러쓴답니까,그냥살고말지.

정말이런일은내생전에처음이네요.그래도법도있는집안에서이럴수가,

암이런법은없구말구요.누가보면콩가루집안인줄알겠어요.하지말란다구

안한그쪽집안이야말로알만하잖아요?이게어디집안흉이나보고말문젭니까.

아무도함부로할수없는우리의아름다운전통인걸요.

이렇게조카며느리의눈꼴사나운선심을주거니받거니입술끝으로짓씹고같이

흥분할만한나잇살이나먹은얼굴을찾았으나눈에띄지않았다.다들낯설었다.

시고모란뭔가.법도로따져도출가외인에불과하지않은가.어른에게합당한자리를마련해주지않고줄창겉돌게만드는것은조카며느리의계산된출가외인대접인지도모른다는생각이들었다.별안간자신이없어지니까시부모가안계신데도폐백을하는게옳은건지,안해도그만인건지도알수가없어졌다.내가자신있게아는건뭘까?내년이환갑이란나이가늙은이대접을제대로못받으니까스산하고흉흉하기까지했다.

얼음으로봉황까지조각한피로연석상에선발밑에서안개가피어오르는가운데신랑신부가케이크를자르고샴페인이터지고박수와환호성이진동했다.축제분위기가한껏고조된피로연장에서도들리느니온통그쪽사투리였다.조카네한테무시당했다는느낌은그쪽사투리가패거리를져서나를따돌리고있는것같은참담한고독감으로이어졌다.딸시집보낼때입었던분홍색한복은치마폭이도대체몇폭이나되는지감당할수없이퍼지지않으면끌리는것도주책스럽다못해을씨년스러워보일터였다.중요한손님도아니면서남들이한번볼거두번볼요란한옷을입고있다는게얼마나못할노릇인지,벌을서듯이시시각각의식하느라음식은맛도모르고건성으로먹고있었다.

"참,고모님은몇시표로끊으셨어요?"

내옆에서나는무시한채제자식걷어먹이기만바쁘던둘째조카며느리가초롱초롱한눈으로나를빤히바라보며물었다그러나나는그녀가나에게보인최초의관심을이해하지못했다.

"표?무슨표?"

"올라가실표말예요.어머,예매도안하고내려오셨나봐.오늘토요일인데."

나는대답대신아직도손님사이를누비며인사치레하기에바쁜장조카며느리를눈으로찾았다.그러나나보다훨씬잽싸게큰동서를찾아낸둘째는큰일난것처럼호들갑을떨며,올라갈걱정도안하고바보처럼느릿느릿답답한동작으로비프스테이크를썰고있는내걱정을했다.

"아직은늦지않았을거야.지금부터라도서두르면……"

장조카며느리가시계를보며말했다.그제서야그날로돌아가야한다는것을인정했다.대접성으로라도자고가랄줄알았던기대가무너진게그렇게서운할수가없었다.하마터면눈물이다핑돌것같아대강썰어놓은고기조각을꾸역꾸역처넣었다.

"천천히잡수셔요.아직은시간이좀있으니까요."

"그렇지도않아.여기서역까지가는시간이있잖아."

"저희가가는길에모셔다드릴게요.형님도와드리지못해죄송하지만저희가조금일찍떠나죠뭐."

"그래줄래?잘생각했어.남아있어도할일도없어.고모님모셔다드리는게크게도와주는거야.그럼부탁할게."

나를옆에놓고장조카며느리와울산사는둘째네가주고받은말이었다.울산서는아마제차로온모양이었다.좀낡은엑셀이었다.신랑신부만빼고조카들이안식구하고쌍쌍이차타는데까지배웅을해주었다.조카며느리는남매를데리고뒤에앉고나는운전석옆에앉아조카얼굴을곰곰이쳐다보았다.

"뭘그렇게보셔요?"

"네가느이아버지를제일많이닮은것같아서……"

"어려선외탁했단소리들은것같은데요."

"아냐,야아"

나는아무런확신도없이강하게부인을했다.

"형석이본지오래돼요.이번에고모님뫼시고내려올줄알았는……."

"마침해외출장중이잖니?개처도직장이있구."

"자긴언제해외출장갈거야?"

뒷자리에서방자하도륵영롱한목소리가끼여들었다.

"왜독수공방하고싶어?"

"나도이런행사에슬쩍슬쩍빠져보고싶어서."

"야아,친형제하고사촌하고같냐?말을해도……"

말은그렇게하면서도조카의입가에는귀여워서못견디겠다는미소가맴돌았다.

"다를건또뭐야?예단도못받았는데.형님이예단생략하라고했다나봐.

나시집올때는기를쓰고챙기드니만.자기나좀봐봐,어디미운털박혔나."

"됐네됐어,여보게.내눈에만미운털안박혔으면그만이지무슨상관이야."

역까지즈희들끼리이렇게찧고까부느라더는나한테끼어들새를주지않았다.

대구역에서주차장이만원이라고획획호루라기를불며진입을막는것을기화로그들은나를짐짝처럼내려놓기만하고가버렸다.부창부수해서얼씨구하는소리가들리는듯했다.나도마찬가지였다.표를살수있을까없을까하는걱정보다는우선그눈꼴사나운수작에서놓여난것만해도시원해서살것같았다.형국이형석이내외는내앞에서저러지는않는다고,내자식들두둔하고싶은기분도나쁘지않았다.새마을호는매진이고남아있는무궁화호도입석표뿐이었다.나는만약바닥에퍼더버리고앉으면능히대여섯명은흙고물하나안묻히고앉힐수있을것같은여섯폭비단치마를거머쥐고고속버스터미널쪽으로씩씩하게달음질쳤다.다행히고속터미널은기차역에서그닥멀지않았다.그러나버스표까지매진된걸보자더는씩씩할수가없었다.

빽빽이들어선사람들,매캐한공기,온통그쪽사투리끼리로만어우러진이해할수없는아우성,그런것들보다더참을수없는것은나의분홍한복이었다.그터무니없이현란한옷으로부터놓여나기위해서라도나는오늘안으로내집에가야만했다.내가얼마나낙담하고있는지내얼굴에씌어있었나보다.누가혼자냐고물었다.나는고개만끄덕거렸다.그러면매표구앞에헛되게서있을것이아니라승차장에서기다려보라고했다.혼잣몸이면예매를해놓고미처시간을못댄승객의자리를출발직전에얻어타기가수월하다는것이었다.사람이아주죽으라는법은없다더니이아비규환속에서도그런방법이있었구나.나는이낯선고장에서그런귀한정보를준이에게고맙다는인사도하는둥마는둥승차장으로뛰어나갔다.

그러나약은사람이나혼자일리가없었다.혹시생길지도모르는빈자리를얻어타려는사람이따로긴줄을이루고있었다.눈치보거나서로다투면서운좋게얻어타는게아니라순서껏타게되어있어서그나마다행이었다.초조한마음에십분간격이더디기는해도버스가떠날때마다대기줄에서도한두사람씩얻어타는사람이생겼다.그런데도오늘안으로이바닥을뜰수있으리라는가망은점점더희박해지고있었다.표도못끊고기다리는사람보다는예매를해놓고버스시간에못대온승객에게우선권을주었기때문이다.너무도가냘프고기약없는기다림에진득하니붙어있을만한참을성이나에겐없었다.그놈의비단치마저고리때문에더욱그러했다.예전비단은몸에따습게감겼는데요새비단은어떻게된게계절도없이얇기만한게미풍에도부풀어오르려고만들었다.더군다나승차장은한데였다.가을해가설핏해지면서기온이떨어지는걸살갗으로느낄수가있었다.

나는내뒤에줄선아가씨에게화장실이급한몸짓을하면서자리좀봐달리고부탁을했다.대합실안으로들어가봐야무슨수가생겨도생길것같았다.회사측도양심이있다면토요길오훈데상행버스를몇대늘릴수도있다고생각했다.나하고비슷한사람들끼리목소리를합쳐회사측에다그렇게하도록촉구할수도있을것같았다.별안간힘이솟아비단치맛자락을깃발처럼펄럭이며대합실안으로들어서자마자거짓말같은행운이나를기다리고있었다.반대편출입구쪽에서꿈에도그리던승차권두장을높이쳐들고뛰어드는노인을보자즉시노인이차표를무르러온다는걸알아차렸다.나는노인이매표구로가기전에잽싸게가로막으면서어디가는푠가알아보았다.서울가는표로삼십분후면탈수있는표였다.

"할아버지그표저한테파셔요.얼마면돼죠?"

"산데가서물러도제값은준다던데…"

지갑먼저열면서말하는내표정이얼마나영악해보였던지좀더얹어드려도된다는뜻으로말한거였는데노인은제값도못받을까봐경계하는투로표를움켜쥐었다.제값을드리기로하니까이번에는두장을다사야만팔겠다고했다.한장은팔고,나머지한장은매표구에서물러야하는게귀찮은눈치였다.다사는건어러울게없었다.불필요한한장은내가물러도되니까.그러나미처그런의사표시를할새도없이저하고한장씩나누시죠,하면서나타난손이있었다.아콰마린반지를낀바로그손이었다.그의얼굴까지는미처보지못했다.그럴겨를이없었지만궁금할것도없었다.한장의고속버스표를확실하게손에넣은감격이행운을보장받은복권을거머쥔것만치나뿌듯하고가슴울렁거렸다.

나는그기분을좀더느긋하게즐기기위해자판기에서커피를한잔뽑았다.남은

삼십분은그러기에모자라지도넘치지도않는동안이었다.대합실에서도앉을자리를얻는다는것은어림도없었나.그러나구석진벽에기대어따뜻한커피를마시는기분은그만이었다.대합실벽에무심히기댄포즈를취하기엔영안어울리는옷차림을하고있다는것도그닥신경이써지지않았다.커피맛이유별나게혀에감겼다.나는커피가아니라슬그머니내안에미끄러져들어와있는’아콰마린’의추억을음미하고있었는지도몰랐다.

오분전쯤에버스에올라탔다.창가에앉았다.그는출발직전에올라탔다.나는그를쳐다보지않았다.그가카키색트렌치코트를벗어서시렁에얹으려는찰나살짝뒤집힌옷자락에서런던포그상표가드러났다.세련된느낌이나쁘지않았다.혼자기차나고속버스를탔을때가장곤혹스러운것은옆에서쉴새없이우유나빵,귤따위를먹으면서부득부득먹으라고권하는건데적어도그럴염려는없을것같았다.그러나그때까지도내의식속에서’아콰마린’반지와런던포그는따로따로놀고있었다.

차창밖에선어둠이안개빛깔에서엷은먹물빛깔로바뀌고있었다.버스는대구의

안개를뒤로하고마침내고속도로로진입했다.그가신문을펼치다가내어깨를살짝스쳤다.미안합니다.정중하고도싹싹한말씨였다.나는그를바로보지않고괜찮다는표시로고개만까딱했다.바로보지는않았지만신문을펴든손의반지는선명하게눈에들어왔다.뼈대가실하고도든든한남자다운손에잘어울리는단순하고중후한세팅이마음에들었다.남의옷차림이나장신구에대한관심과야릇한설렘은스스로도좀뜻밖이어서그쯤해두고싶었다.의자를뒤로젖히고눈을감았다.달착지근한옅은잠이오락가락했다.하루에먼거리를왕복하느라상당히지쳐있었음에도불구하고그는누구일까,하는호기심이내의식의한가닥을계속잠들지못하게하고있었다.

짐짓깊은잠에서깨어난것처럼벌떡상반신을일으키면서창밖을내다보려고했지만김이서린유리창은간유리처럼불투명했다.커튼자락으로그걸닦아내려하자그가옆에서휴지를한뭉텅이건네주었다.고맙다는인사대신또고개만까딱하고는휴지를받아유리를닦아냈다.허허벌판을달리고있었다.연도에서는서울까지의거리가오백미터단위로나타났다사라지곤했지만그보다는몇시간이남았나가더알고싶었다.토요일오후였다.거리를시간으로환산하는일은무의미할터였다.곧금강휴게솔겁니다.그가말을걸었다.아,네.나는짤막하게알아들었다는표시만했다.

금강휴게소에선이십분간정차한다고했다.그가내린후나는약간더지체하다가내렸다.화장실은더럽지는않았지만질척했다.용무를보는동안도밖에서는물뿌리는소리가났다.청소한답시고타일바닥을한강수로만들어놓고있었다.한복치맛자락건사하기가너무버거워짜증이났다.밖으로나와내가내린버스를찾으려는데저만치가로등밑에서차를마시던그가나를보고미소지었다.마음에스며들듯한웃음이어서얼핏시선을비켰다.그렇게서있는그는전체적으로꽤괜찮은영화의라스트씬처럼인상적이었다.청색남방셔츠위에다포도주색브이넥스웨터를걸치고녹두색모직머플러를가슴언저리에서아무렇게나묶은옷차림은신세대가수라고해도손색이없을만큼야한데도그의은빛머리하고잘어울렸다.나는얼른속곳가랑이가무릎까지드러나게거미쥐고있던치마를내리고뾰로통한얼굴로버스쪽으로종종걸음을쳤다.맨땅에서도물건너는시늉을하고있었다는게창피하고화도났다.

버스안에서도밖의그를계속해서지켜보았다.멋쟁이일뿐아니라체중관리도잘한것같았다.배도안나오고다리도길고걸음걸이는여유있고도늠름했다.나는선반위에얌전히개켜진채로있는그의트렌치코트를쳐다보았다.같은상표는아니지만나도꽤괜찮은바바리코트를가지고있었다.그놈의폐백만아니었으면나도그걸입고왔을지도모른다.그랬으면지금보다적어도십년은젊어보였을것이다.

나도모르게그와함께바바리자락에찬바람을묻히고그럴듯한바에들어가양주를한잔씩하는상상을하고있었다.내가이렇게이상해지는것은암만해도아콰마린과상관이있을터였다.아니면꼭그랬으면싶은바를알고있기때문인지도몰랐다.호텔지하상가에있는친구네보석상에별볼일없이자주드나들때는물론지금보다훨씬젊었을때였다.그러나아주젊지는않았었다.아이들하고지지고볶으랴,남편됫바라지하랴,좋은줄도모르고허위단심넘어온젊은날을돌이켜보며어느만큼은대견해하고어느만큼은허무해하던때였으니마흔은훨씬넘어서였을것이다.허무해지기시작하면꽤괜찮게자란아이들도,실력을인정받는간부사원이된남편도시들해졌고,시들해지기시작하면손끝발끝이저리도록기운이빠졌다.느닷없이돈푼깨나있는친구가보석상을차리고,겨우사는내가아무것도안사면서보석상을뻔질나게드나든것도그런허전한심사와무관하지않았다.우리는그때늙는일밖에안남은나이를죽음보다더두려워하고있었다.

그때그호텔지하상가에는보석상이있는거리에서식당가쪽으로꺾이는모퉁이에카사노바라는바가있었다.우리는가끔거기서와인이나칵테일을한잔씩마시는일을즐겼는데술맛을알아서가아니라그집분위기가어딘지근사해보여서였다.처음엔여자들끼리술집에가기를수줍어하는마음도있고,남편한테떳떳지못할것도같아남편을불러내합석을하기도했다.남편끼리도동창이었다.오늘저녁에나쓸쓸한데술한잔사줄래요?하는응석은친구남편에게도내남편에게도통하지않았다.차라리야단을맞았더라면다소곳이집으로갔을지도모른다.다들선약이있으니우리끼리한잔하라고관대하게굴었다.남자들의중년은우리보다훨씬덜쓸쓸해보여서우리의쓸쓸함이곱빼기로불어나는것같았다.남편까지우리를챙기지않게됐다는게가뜩이나자신없는나이를더욱보잘것없이만들었다.그런기분으로분위기가고급스러운바에서,부자친구덕으로양주맛과분위기를즐긴다는것은빌린보석으로꾸미고호사스런파티에가는것처럼서글프지만거역할수없는위안이었다.

그때우리가위스키나와인맛보다더좋아한것은그집분위기였고,그집분위기에서빼놓을수없는것은그집단골인늙은한쌍이었다.점잖고우아하고여유있어보이는노신사와노부인은늘바텐더를마주보는스탠드에앉았다.등받이없이다리만긴의자가그들에겐고가의액세서리처럼잘어울린다.연인들을위한어둑시근하고은밀한자리도많은데그들이단골로앉는스탠드는밝고도드라져서도리어은밀하게보였다.그들이먼저차지하면늘거기앉던사람도그근처를피했다.그들이풍기는은밀함에는보장해주고싶은평화스러움이있었다.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는그들을노부부라고여기지않고늙은연인들이라고여기고싶어했다.그건순전히우리의바람일뿐그들사이의진짜관계에대해서는끝내모르고말았다.우리는어두운구석에서그들의일거수일투족을지켜보기를즐겼다.미남바텐더가그들에게치즈나피클같은간단한안주를서브하거나크리스털잔속의호박빛위스키에다얼음을넣어주는걸우리는영화의한장면처럼황홀하게바라보기도했다.그들이무슨말을하는지표정이어떤지는잘알수없었지만늙어서도그정도로멋있다는건우리에겐선망이고위안이었다.그노인들은아주천천히거의핥듯이술을마셨지만자주서로의술잔을부딪쳤다.그들이술잔을가볍게부딪치는걸보고있으면저나이나돼야비로소인간과인간사이의진정한화해가가능하지않을까하는,안하던생각이들기도했다.

그때나는생활은어느정도안정됐다고는하나부부간의,친척간의,모자간의관계가삐그덕거리고있다는것을마치일찍찾아온류머티즘처럼생급스럽고불행하게느낄때였다.지내놓고보니아무런근거도없는거였지만그때는꽤심각했더랬다.친구도왜사는지모르겠다는소리를자주했다.나는깊은한숨으로공감을나타냈다.그노인들을우리가극도로미화해바라보는것도우리의이런허망감,미구에닥칠노후의공포를달래기위한한방법이었을것이다.

친구네보석상이망함으로써그시절은졸지에막을내렸다.막은원래서서히아쉽게내리게돼있지만,부자가망하는것은믿지않을만큼순식간이었다.친구의남편이부도를내고해외로도피하고,혼자남은친구는빚잔치로보석상을빼앗기고알거지시늉을내다가어느날나한테까지온다간다말없이남편따라이민을떠나버렸다.나는허둥지둥내생활로돌아와서,내가정신을딴데다팔고있는동안도내가정이건재하고있다는걸감지덕지고마워하며예전과다름없는살림꾼이되었다.

그호텔에드나들지않게된지가몇년쯤됐을까?아득한옛날같기도하고바로엊그저께같기도했다.카사노바는아직도거기남아있을까.카사노바도늙은연인들도세월과함께사라졌다해도환상은남아있는것,나는그와함께어느고급스럽고도이국적인술집에서아름다운크리스털잔을부딪치기를꿈꾸고있었다.엣날의추억때문에마치오랫동안그러기를꿈꿔왔으나다만파트너가없어서못해본것처럼느끼고있었다.그가나에게종이컵을건네주었다.율무차였다.비로소그를가까이서쳐다보면서고맙다는인사를했다.수려한골상에군살이붙지않아강직해보였고,눈빛은따뜻했다.가슴이소리내어울렁거렸다.이나이에이런느낌을가질수있다는걸누가믿을까.

금강휴게소를지나면서부터버스가조금씩더밀리기시작했다.기사는승객의양해를구하는절차같은건생략하고제멋대로고속도로를벗어났기때문에서울이몇킬로남았다는표지판도사라졌다국도인지,기사만아는어떤지름길인지버스는줄창어둠속을달리다가도작은읍이나면소재지인듯상점의불빛이있는곳을지나가기도했다.그럴때마다나는거기가어디라는단서를얻으려고창밖을살펴보려들었고그는나에게유리창을닦을휴지를건네주었다.시골의상점거리도서울미장원,명동양복점,독일빵집,의정부섞어찌개,영재독서실따위간판을달고있으니현재의위치를미루어짐작하기는불가능했다.벌판이나외진산길만가다가어쩌다나타난그런상점거리도반갑기보다는비현실적이었다.앞으로가고있는게아니라마냥헤매고있는것처럼느낀지오랜만에벌써서울인가싶게번화한도시로접어들었다.차들의번호판으로대전이라는걸알아보았고,열시가까운시간이었다

"대전이네요.그래도이버스가서울로가긴가고있나봐요."

이번엔내가먼저수작을걸었다.

"그럼딴데로가고있는줄아셨나요?"

"고속도로를벗어나니까괜히불안했어요.밤새도록가도아무데도당도하지못하는게아닌가싶지뭐예요."

"아무데도당도하지못하는버스라…재미있어요.제상상력보다시적이고."

"선생님은무슨생각을하셨는데요?"

"저는이버스에아주중요한사명을띤인물이나거액을가진이가타고있어서

죄없는사람까지어디론지납치를당하고있을지도모른다는생각을해봤답니다."

"만약저기사가우리가하는얘길들으면별고약한승객도다있다하겠죠.

자기딴엔조금이라도일찍가보려고낯선길을헤매는데."

"깨어있다는게고약한거아니겠어요.보셔요,다들얼마나곤히들자고있나.

저사람들처럼기사가어련히목적지까지데려다주랴믿고잠들었으면그런실없는

생각을했을리가없죠."

그의말을듣고보니정말다들곤히잠들어있고깨어있는승객은우리두사람밖에없었다.나는왠지그게짜릿할만큼즐거웠다.

"댁이서울이십니까?대구십니까?"

그가물었다.

"친정조카가대구에서결혼식을올려서다녀가는길이랍니다."

"그래서그렇게곱게차려입으셨군요."

"네,폐백도받고이것저것어른된도리를하려면암만해도한복이편할것같아서요."

폐백도못받았단소리는일부러안했다.그래도버스여행하기에는주책스러워보일게분명한한복에대해변명을할수가있어서속이다시원했다.

대전을지나고부터버스는본격적으로밀려자정이훨씬넘어서야서울에도착했다.승객들은그동안계속잘도잤고,우리두사람은계속깨어서,계속젊은애들처럼굴었다.육이오때몇살이었고,얼마나고생했고,어디로피난갔었나따위진부한얘기는하나도안하고,흘러간영화,좋아하는배우나음악,맛좋고분위기좋은음식점,세상돌아가는얘기따위를두서없이주고받으면서나는내가얼마나수다스럽고,명랑하고,박식하고,재기가넘치는사람인가를처음알았고만족감을느꼈다.그렇다고모든문제에의견이일치했던건아니다.우리는유신시대나군사정권시대를살아내기가얼마나치욕스러웠는가에대해서는정열적으로동의했지만,그가식구처럼아낀다는진돗개얘기를하자나는마치개소리만들어도알레르기를일으키는사람처럼요란스럽게질색을했다.그모든짓거리들이그렇게재미있을수가없었다.여북해야자정이넘었는데도벌써서울인가싶었을까.

시내버스가드문드문다니고있었고,지하철은이미끊긴시간이었다.고속버스에서내린승객은거의택시승차장에줄을섰다.밤공기가냉랭했다.그가코트를벗어내어깨에걸쳐주었다.나는마다하지않고순순히그안에서몸을작게웅숭그렸다.

나이같은건잊은지오랬다.

댁이어디시죠?그가물었다.고덕쪽이라고대답했다.이럴수가,우리는같은동네에살고있었다.아무렇지도않은동네였다.그러나그가살고있는데어떻게아무렇지도않을수가있을까?가슴이소녀처럼발랑발랑뛰었다.아직도동네외곽에많이남아있는아름다운숲과꽤괜찮은산책로가반사적으로떠올랐다.우리는자연스럽게같은택시를탔다.같은동네라지만그가살고있는아파트와내가살고있는주택가하고는상당한거리가있었다.그는나를먼저내려주면서명함을한장건네주었다.

고교생이있는이층방에불이켜져있는게반가웠다.그러나나는그학생의얼굴도잘모른다.싹싹해보여서세금이나공과금등은행에갈일을스스럼없이부탁해온이층집여자가우리전기값을자기네와비교하면서고3이있어서…라고중얼거리는소리를몇번인가들은적이있을뿐이다.

우리집은처음부터세를놓아먹도록지은삼층집이었다.집주인인나는삼층에살았고,다른층이두가구씩살도록설계된것과는달리삼층만은한가구만쓰게돼있어서서른평이넘는넓이였다.혼자살기엔휘한집이었지만,온종일비어있던집에한밤중에문을따고들어오는일이조금도을씨년스럽지않고감미롭게느껴졌다.비록혼자살고있지만거실엔열네식구나되는대가족의사진이걸려있었다.

큰아들이미국지사로나가기전에기념으로찍은사진이대문짝반절크기였다.우리부부와각각네식구씩인두아들과딸네가함께찍은사진이었다.열네식구중남편이먼저이세상사람이아니게됐지만비슷한시기에손자가하나더생겨내개계산하고있는식구는여전히열넷이었다.새로생긴손자는미국서낳아서나는아직본적이없다.큰아들은전화값안아까워하고일주일에한번씩은꼭전화를하고어떤때는어린것이옹알이하는소리를들려주려고꽤오래통화를끌기도한다.

멀지않은곳에살고있는딸과분당에살고있는아들도매일한번도안거르고꼬박꼬박문안전화를한다.내집은그렇게전화선을로내핏줄들과긴밀히그리고규칙적으로연결돼있어내가살아내는데힘이돼주고있다.현관불은현관문을열면켜지게돼있다.다시저절로꺼지기전에얼른마룻불을켜고버릇처럼가족사진한테눈인사를건넨다.벗어놓았던옷처럼익숙하고도눅눅한내집공기를들이마시면서그의명함을들여다보았다.아무런직함없이이름석자하고집과사무실전화번호만들어있는간결한명함이었다.내가그에대해뭘안다고나는그답다고여겨져더욱호감이간다.뭐하는사무실인지는그닥궁금하지않다.

며칠사이에가을이깊어지면서삼층에서바라보이는숲의단풍도바야흐로절정이다.설악산쪽은이미한물갔다고한다.그가잘생긴진돗개를데리고산책하는시간은하루중어느때쯤일까.아파트에서몰래기르기엔너무덩치가커서단독에사는둘째아들네하고번갈아데리고있다고하면서,좋은법이고나쁜법이고그나이까지법을어기는짓은못해봤는데그녀석때문에위법행위하느라이웃아주머니한테기를못펴고산다고했다.그는살만하고선량한사람일것이다.그만하면알아야할것은다알고있는셈이다.그가준명함은전화기옆에얌전히놓여있다.그에게우리집전화번호를가르쳐준적이없건만전화벨이울릴때그를생각하며받을적이종종있다.전화는의당번호를알고있는쪽에서걸어야하건만나는그가우리집을알고있다는건,왠지그를또만났으면하는바람에전혀도움이되지않는다.그가우리집을불쑥찾아온다는것은신사다움과너무도안어울리기때문이다.천생내쪽에서뭔가하지않으면안된다.그럴기회는의외로빨리찾아왔다.

사돈상을당했다.혼자남아고향을지키고살던둘째며느리의친정어머니가돌아가셔서식구들이아이들까지다내려가면서나한테손자들이기르던조막만한개를맡기고떠났다.푸들이라던가,어찌나조막만한지꼭손안에드는봉제완구같았다.꼼지락거릴째마자제힘으로움직이는게아니라털속에숨은태엽이풀리고있는것처럼느껴지곤했다.동물같지도않은느낌때문에싫어하고말고도없이떠맡게되었고,맡기는쪽에서도무얼먹지어디서싸는지어떻게돌봐야하는지한마디도일러주지않고덮어놓고데밀기만하고떠났다.졸지에당한일이라황망하여그리되었을것이다.행여나해서화장실문을열어놓았더니그안에서용무를보는게신기하고깜찍했다.그러나누기만하고통먹지를않았다.우유도죽도카스텔라도냄새도안맡고도망부터쳤다.그대로내버려두었다가는굶겨죽였단소리들을것같았다.혼자자이방법저방법다써보다가안돼서,이층고3엄마한테의논을했더니아마여지껏길들여진사료가따로있을거라고했다.내일시내나갈일이있으니그런것만전문적으로취급하는집에들러서의논해보고한두가지사와보겠느라고한날저녁이었다.나는허설쑤로한데모은음식찌꺼기에다가국국물을부은것을고녀석입에다갖다대보았다.또고개를외로꼴줄알았는데앙칼지게달려들더니붉은혀를맹렬하게날름대며국물부터핥기시작했다.그래,만물의영장도배고픈설움엔무릎을끓게돼있는데,네까짓게찬밥더운밥가려봤댔자야요것아,알았지?하면서회심의미소를띠려는데별안간째지는소리로캥캥대며죽을둥살둥몸부림을치는게아닌가.어째서그런일이일어났는지차근차근생각해볼겨를도없이,당장숨넘어가는꼴을볼것만같아더럭겁부터났다.아들내외볼낯도없지만,그강아지한테영락없이엄마처럼굴던손녀의모습이아른거리니까더미칠거같았다.그때도움을청하고싶은사람으로제일먼저떠오른게그였다.나는떨리는손으로그의전화번호를돌렸고그의목소리가들리자울음이복받쳐말을제대로할수가없었다.그래도알아듣고차까지가지고즉각달려와주었기때문에가까운수의사한테까지는가는동안이얼마걸리지않았다.

달려와준그를보자나는다시울음이복받쳤다.왜그렇게눈물이잘나는지나도이해할수가없었다.그는한손으로운전대를잡고한손으로는내어께를토닥거리며위로를했다.수의사의처치를받는동안강아지는더욱애처로운소리를냈고나는숫제그의품에안겨서귀를막고흐느꼈다.내가생각해도요사스럽기짝이없는짓거리였지만나는그감미로운울음을멈출수가없었다.수의사는강아지목구멍에서집어낸생선가시를보여주면서개아픈데같이우는아이는많이봤어도같이우는할머니는처음봤다고했다.

강아지는무사했고며칠안돼제집으로돌아갔고나는물론하나도안섭섭했다.나는강아지를사랑한적이없으니까.그러나그강아지가집에있는동안강아지안부를주고받는것으로시작된그와나의전화질은강아지를보낸후에는차한잔하자는만남으로발전했다.그를만나기위해아침산책을나가기도했고,첫눈이오는날은마침내카사노바하고비슷하게분위기가고급스러운바에서괜히잔을부딪치며위스키를마시기도했다.그때는내가샀고,다음엔그가답례로토속적인목로술집에서막걸리를샀다.서양식술집못지않게근사한집이었다.내가한식을사면그는양식을샀고,내가싼걸산다음그는비싼걸샀지만서로부담을안느끼기위한어떤규칙이있는건아니었다.정해진건아무것도없었다.그때그때마음내키는대로행동했다.

그의잘생긴진돗개하고도낯을익혔고,그의차에다진돗개를태우고드라이브를가기도했다.서울근교에그렇게좋은곳이많다는걸처음안것처럼느꼈다.강아지를핑계로눈물을흘릴수도있을만큼간사스러워진후였다.곳곳이새로워함부로탄성을지르지를않나,열여섯살먹은계집애처럼깡총거리지를않나,요즈음신세대탤런트의연기를톡톡튄다고들하는데내안에서도뭔가가핑퐁알처럼경박하고예민한탄력을지니게되었다는걸느꼈다.뿐만아니라연기를하고있다는혐의가아주없는것도아니었다.내가자신속에서느끼는경박한즐거움은유희의기쁨깐은것이었으니까,

어차피현실감이있는건아니었다.뭐든지꿈꾸는대로이루어지는건꿈속과다를바없었다.

여북해야이런일까지있었겠는가.하루는목욕을하는데전화벨소리가났다.전화기는마루에하나안방에하나두대였지만아직무선전화기는가지고있지않았다.이럴때벌거벗은채당당히걸어나가전화를받아도된다는것도혼자살아서좋은일중의하나였다.욕실은안방에붙어있고안방전화는경대옆문갑위에놓여있다.몸에서물이떨어져발밑에타월을깔고뻣뻣이서서전화를받다말고나는하마터면아니저할망구가누구야!하고비명을지를뻔했다.문갑옆경대는시집올때해가지고온구식경대여서거울이크지않았다.거기에하반신만이적나라하게비쳤다.나는세번임신했고삼남매를두었지만실은네아이를낳아셋을기른거였다.세번째임신이쌍둥이였다.그중아우를낳아돌안에잃었다.쌍둥이까지밴적이있는배꼽아래는참담했다.볼록나온아랫배가치골을향해급경사를이루면서비틀어짜말린명주빨래같은주름살이늘쩍지근하게처져있었다.어제오늘사이에그렇게된게아니련만그추악함이충격적이었던것은욕실안의김서린거울에다상반신만비춰보면내몸도꽤괜찮았기때문이다.또한욕조에잠겨나서나와서나내몸중에서보고싶은곳만보고즐기려는마음도없지않았을것이다.그때나는급히바닥에깔고있던타월로추한부분을가리면서죽는날까지그곳만은,거울너에게도보이나봐라,하고다짐했다.

크리스마스에나는머플러를선물로준비했는데그는나에게스카프를선물했다.둘다야한것이었다.실용보다는주고받을때어떡하면상대방을놀래키고즐겁게해주나를더염두에두고골랐다는걸로도우리는어쩔수없는닮은꼴이었다.그러나닮지않은점이더많을지도모르겠다.그는여자에게선물을해본지오랜만이라고했다.묻지도않았는데삼년만이라고했고,삼년전에상처한것을자나가는말처럼비쳤다.서로그만큼친해지는동안우리가과부홀아비끼리라는걸내비칠기회는많았다.

그러나정식으로그시기까지말하긴처음이었다.나는관심없다는투로화제를바꾸었다.머플러와스카프를교환하는것처럼그런신상명세까지교환해야된다고생각하지않았다.

해가바뀌니환갑해였다.낳은해의육갑이한바퀴를돌아온다는게무슨의미가있을까.‘육갑을한다’는게결코칭찬이아닐텐데너도나도내앞에서육갑을하려들었다.설날아침큰아들도전화로세배를대신한다며그얘기부터했다.나러더회갑잔치대신미국구경을오라는거였다.나만좋다면잔치는칠순으로미루고그렇게하기로저희들삼남매끼리는벌써합의를본모양이었다.

"글쎄다.너희들신경쓸거없어,야아.나잔치안해줘도조금도섭섭해하지않을거니까,대신뭐해줘야된다고생각하덜말어.어느새회갑은,심란허게…”

나는시들하고떨떠름하게대답했다.사양이아니라마음으로부터그러했다.

“그러니까심란해하시지말고대신여행을하시자는거아녜요.휴가넉넉히잡아놓을테니까그까짓거유럽구경까지하시자구요.저희도여기있을날이일년밖에안남았어요.이런좋은기회놓치면평생후회하셔요.”

아들은숫제협박조였다.협박할만했다.그애는미국지사로나가던해부터구경

오라고졸랐으니까.그러나나는회갑잔치만큼이나안하고싶은것중의하나가자식이외국나가있다고늙은이들이처가에서한떼,친가에서한떼,세상만난듯이비행기를타는거였다.나는가타부타언질을안주고전화를끊었다.국제전화일때는으레

내가먼저조바심을하며끊게돼있었다.

회갑이란본인에게만고약한게아니라자식들에게더고약하게돼있나보다.순순히여행을가고싶어하지않자그럼잔치를하고싶은가알고싶어했고그도저도아니라는걸알자속마음을알고싶어안달을했다.나도모르는속마음을저희들이무슨수로알겠다는건지,속으로우습기도하고조금은기분이좋기도했다.남하는대로열심히효도를해보려는자식들이대견하지않은부모가어디있겠는가.나를떠보는안테나노릇은딸의차지였다.맏이여서에미하고나이차이도자식중에서가장덜나고또동성이기때문에편한것도있었다.타고나기도속깊어내가어려서부터친구처럼대했고제동생들도누나를어려워하면서도뭐든지의논해버릇해서그런지친정에서일어나는일을제가모르고있는걸못참아했다.

그런버릇이이번일에도쓸데없는오지랖을넓게한듯했다.어럼풋이알고있던

에미의남자친구에대해조금씩미심쩍어하기시작했다.하늘에서떨어진종자가아닌이상친인척빼고도학연지연등의그물망을피할수없는게우리사회니까,딸이알아보려고나선이상이미내가다알고있는것은물론나에게가려져있던부분까지드러나는건피할수없었다.작년에정년퇴임한지방대학교수라는것,한국사를가르치던퇴직교수끼리공동으로조그만연구소를운영하고있다는것,상처한지삼년됐다는것등은나도대강알고있었지만부부금실이유별났다던가,아들네말고도집한채와시골에땅도가지고있다는것,모시고있는맏며느리가부잣집딸이고미인이고머리도좋다는것은처음알았다.맏며느리에대한정보가풍부한것은딸하고동갑이기때문이었을것이다.같은학교인적은한번도없다고해도넓고도좁은서울바닥에서만국민하교부터대학까지나왔으면어차피어떤연줄을통해서든걸려들게돼있었다.그쯤알아보고난딸의정색을하고도대체그늙은이하고어쩔셈이냐고물었다.이건마치바람난딸을잡도리하려는에미의태도였다.

“그늙은이라니.”

“그럼우리엄마를꼬셨는데고운말이나와?”

딸의눈에눈물까지그렁한걸보자당장그의역성부터들려고한내태도가

슬그머니뉘우쳐졌다.실상그하고나사이는자식들한테발각이됐다고해서

달라질어떤건더기가있는사이가아니지않은가.

“꼬시긴누가누굴꼬셔?누구들을라.숭하다.”

“형국이형석이는아직몰라요?”

“알면또어떠냐.”

“엄만,알아서좋을건또뭐요.더늙으면구박받고무시당할빌미나될텐데.”

“네가입다물고있으면걔들이어떻게아나?”

“알았어요.전입봉하고있을테니까엄마나조심하세요.

자식들체면이라는것도있지않수.”

딸애는또같잖게끔바람난딸에게아버지한테이르지않을테니정신차리라고쉬쉬당조짐하는에미시늉을내는것이었다.그러나딸의간섭은그것으로끝난게아니었다.우리사이가더조심을하고말고할것도없었고종전과달라지려는노력도하지않았기때문이기도했지만그보다는아마그의집안에서딸한테로직접정보가흘러나왔기때문일것이다.그의며느리는딸하고단짝이던고등학교친구하고대학동창이되었다.게다가그쪽며느리와내딸은같은단지에살고있었다.한번연줄을트자마치겹사돈처럼알려고만들면모를게없을정도로서로비밀의무방비상태가되고말았다.중간역할을하고있는,양쪽을다안다는딸의친구에의해정보가다소굴절되거나과장됐을가능성이있다고해도속속드러난그쪽의조건은잔뜩적의를곤두세우고있는딸의구미에도나쁘지않았던것같다.실실웃으며엄마실력다시봐줘야겠다는무엄한농담을하기에까지이르렀다.그리고어느날아주정색을하고물었다.

“엄마,조박사님사랑해?”

그때나는커피를마시고있었는데하마터면델뻔했다.폭소가치받쳐사레가들리면서들고있던잔까지엎질러버렸기때문이다.‘그늙은’가‘조박사님’으로변한것도우스웠고그가그렇게부르는걸별로좋아하지않는다는걸알고있기때문이기도했다.

언제가우연히만난중년의제자하고정답게인사를나누고나서였다.옛날제자들은선생님,하면서아는척을해서좋은데요새제자들은교수님아니면박사님이라고불러서도무지정이안든다고했다.그는그렇게좀괴팍한데가있었다.

“뭐가그렇게우스워요?”

“그늙은이가박사님이됐는데그럼안우습냐?”

“엄마가좋아하는걸보니까,사랑하는거맞죠?”

그러면서입을조금비죽댔는데혐오스러워하는기색은아니었다.그러나딸이쓸쓸해하고있다는걸느끼는것만으로도조만간나의태도를분면히해야할것같았다.

이런상태를더는즐기지않을각오를한다는것은딸이지금쓸쓸해하는것몇배더

쓸쓸한일이되겠지만마냥피할수는일이었다.

그늙은이가조박사님으로변하고난지얼마후였다.딸이마침내그의며느리하고인사를하고지내게되었노라고했다.중간에선친구가자리를마련했는데만나고보니슈퍼같은데서종종마주친일이있는얼굴이더라는것이었다.중간에서개입하던제삼자가없어지고나서딸이더욱그집에대해호의적으로돼간다는것을느낄수가있었다.하루가다르게그쪽입장이돼가는딸을보고있으면하염없이서글퍼지기도했다.

“엄마,혹시형국이형석이눈치가보여마음을못정하시는거면염려말아요.

내가엄마위신조금도안떨어지게걔들을이해시킬게.”

저희끼리무슨꿍꿍이속이있었기에이렇게겁없이구체적으로나오는걸까.

보나마나그쪽며느리가급하게구는것같아그가안쓰러웠다.

"요는네에밀시집을보내겠다는게냐,시방."

"사랑하시잖아요?살기가어렵거나모시겠다는자식이없어서가아니라사랑해서

하는재혼,얼마나근사해누가뭐래도난엄마를변호하고자랑스러워할거야."

나는이렇게열심히사랑타령을하는딸을물끄러미바라만보았다.속으로는

제까짓게사랑에대해뭘안다구,사랑이별거라던?인생그자체일뿐인것을,

이렇게가볍게만들려고할수록짓눌리는듯한기분이들긴했다.

그의며느리는어느틈에그하고나하고사이에도자연스럽게화제에오르게되었다.어머,그파카못보던거네요,너무야하나.그러면그는며느리가사주었노라고,요새걔가나를젊게꾸며주려고부쩍애를쓰는데왜그러는지모르겠노라고수줍은듯이머리를긁적거리기도했다아직본적이없는그의며느리가중요인물로떠오를수록짓눌리는듯한느낌은더해갔다.그후며느리가나를집에초대하고싶어하는데언제쯤이좋을지나한테정하라고했다는소리를그가했을때는며느리소리좀작작하라고화를내고싶은걸참느라고혼났다.그는대답을회피하는나에게당장무슨소리를듣고싶어하지는않았지만,싱그러운로션냄새를풍기고있음에도불구하고추비해보였다.딸을통해서도그집며느리는같은전갈을해왔다.딸은내의중은떠보지도않고나한테무슨옷을입혀야그멋쟁이며느리한테꿀띠지않을까,

그걱정부터했다.

"그며느리요새세상에드문효분가보다."

"그럼,엄마.얼마나잘하는지몰라그래도홀시아버지모시기가보통힘들겠수.

힘들때마다자원봉사하는셈친대요."

가슴이뭉클했다.그러나순간적인분노와인민으로중요한문제를결정할수는

없는일이었다.나는딸에게분명하게막했다.

"얘야,평숙아,잘들어라.이에미는아버지곁에묻히고싶다"

딸아이도그말에는머쓱해서더는아무말도안했다.비록선산은아니었지만공원묘지의남편묘는나하고합장하도록곁에가묘까지만들어져있었고,묘비명에도내이름이남편과나란히새겨져있었다.나는이미묘와묘비를가지고있었다다만태어난연월일밑에들어갈죽은날짜만이아직새겨지지않았을뿐이었다.나는성묘하기를좋아했다그하고사귀는동안도남편한테미안한마음같은건조금도없었다.나의일상적인행동중거기가고싶다는것처럼완전에가까운자유의사는없었다.거기서느끼는깊은평화에다대면일상에서일어나는아무리큰기쁨이자슬픔도그위를스치는잔물결에지나지않았다.결코죽은평화가아니었다.거기가면풀도예쁘고풀사이에서식하는개미,메뚜기,굼벵이도예뻤다.그의육신이저것들을키우고있구나,나또한어느날부터인가그와함께저것들을키우게되겠지,생각하면영혼에대한확신이없어도죽음이겁나지않았고,미물까지도유정했다.진이빠지게풀들과곤충들을키우고난찌꺼기는화장하여훨훨산하를주유하도록해주기를자식들에게부탁할작정이다.그보장된평화와자유로부터일탈할어떤유혹도있을수가없었다.

그날은그쯤하고물러난딸이다시또무슨얘기를그쪽에서들었는지이런소리를한다.

"엄마,엄마가재혼해도돌아가시면아버지하고합장해드릴게염려마세요.생각해보니까그쪽도마누라곁으로갈거아뉴"

내가원하는평화는그렇게구차스러운것하고는다르다는것을어떻게설명할수있을것인가.설명할필요조차느끼지않았다.

"그만해두거라망측하다.그게딸년이에미한테할소리냐?"

"뭐가망측해요.재클린이케네디옆에묻히는것도못봤수.친척들이나동생들이뭐래도내가우기면그정도는문제없을거야.아버질외롭게놔둘권리는아무한테도없을걸,"

"글쎄듣기싫대두.너정말왜이러니?"

"엄마야말로왜그러세요.엄마가정열적이라는것은세상이다아는사실인데.

왕년의정열가지면그까짓거뛰어넘는건문제없잖우."

듣자듣자하니정말딸년한테별소릴다듣는구나싶었다.그러나이해못할소리는아니었다.딸의노골적인말투를통해나도그간의내마음의행적을돌이켜보는걸

피할수가없게되고말았다.딸애는맏이답게내젊은날에대해들은게많았다그애는또식구만많고변변한집한칸없을때태어나서여고시절까지도납입금한번독촉안받고내본적이없을만큼쪼들리는집안형편을보아왔다.내가고생을못면하는것을불쌍히여기면서도한편자업자득이라고책임소재를분명히밝히기를잊지않는외할머니의푸념을가장많이들은것도그애였다.지금은양가의형편이엇비슷해졌지만그때까지만해도친정쪽은젊잖은중류집안인데비해,시집은남편빼고는제대로교육받은사람들이없어서그랬는지가난하기만한게아니라사람들이거칠고상스러웠다.한창민감한딸이그걸이상하게여기지않았을리가없고,외할머니의푸념은딸의의문에적절한회답도되었으리라.

남편하고열렬히연애할적에어머니도사윗감하나는마음에들어했다.여북해야개천에서용났다고까지추켜세웠을까.그러나내가그용한테로시집가는것만은단호히반대했다.개천에서난용한테시집가는건용한테가는게아니라개천에빠지는거라고했다.어머니가아무리울고불고말려도나한테는개천이보이지않고용만보였다.어머니의예언은적중했고나의개천과의악전고투는막네시누이를시집보낼때까지계속됐다.남들에게는개천으로보이는것이나한테는사는보람이요,씩씩할수있는원천이었다그시절내눈을가리고오로지한남자만보이게한그맹목의힘을딸은지금정열이라부르고있는것같았다.정열이라해도좋고정욕이라해도좋았다.

지금조박사를좋아하는마음에는그게없었다.연애감정은주었을때와조금도다르지않은데정욕이비어있었다.정서로충족되는연애는겉멋에불과했다.나는그와그럴듯한겉멋을부려본데지나지않았나보다.정욕이눈을가리지않으니까너무도빠안히모든것이보였다.아무리멋쟁이라고해도어쩔수없이닥칠늙음의속성들이그렇게투명하게보일수가없었다.내복을갈아입을때마다드러날기름기없이처진속살과거기서우수수떨굴비듬,태산준령을넘는것처럼버겁고자지러지는코곪,아무데나함부로터는담뱃재,카악기를쓰듯이목을빼고끌어올린진한가래,일부러엉덩이를들고뀌는줄방귀,제아무리거드름을피워봤댔자위액냄새만나는트림,제입밖에모르는게걸스러운식욕,의처증과건망증이범벅이된끝없는잔소리,백살도넘어살것같은인색함,그런것들이너무도빤히보였다.그런것들을아무렇지도않게견딘다는것은사랑만있다고되는것은아니다적어도같이아이를만들고,낳고,기르는그짐승스러운시간을같이한사이가아니면안되리라겉멋에비해정욕이얼마나아름다운것인지이제야알것같았다.재고할여지는조금도없었다.불가능을꿈꿀나이는더군다나아니었다.딸이안해도될군소리를덧붙였다.

"엄마가이청혼받아들이지않으면조박사님불쌍해서어떡허지.며느리가글쎄더는수발들수없대이왕이면시아버지가좋아하는사람하고시켜드리고싶지만안되면아무나하고시킬모양이야.밥걱정노후걱정안하려고시집오려는사람은얼마든지있대그렇지만너무젊은여자는며느리가싫은가봐.당장지내기거북한것말고도나중에책임질기간이길까봐그렇겠지뭐.기껏어디서배고픈할머니나한분모셔올모양이야.엄만사랑하던사람이그렇게불쌍해져도좋아?"

친구한테농담하듯이버릇없는말투였다.나는발끈했다.

"배고픈게왜나빠?무시하지마,너.자원봉사보다훨씬거룩한거다,그거"

겉멋보다는더욱거룩한거였다.나는한번도본적없는그의며느리를딸의얼굴과겹쳐보면서속시원히내뱉었다.더는며느리나딸이우리사이에끼여들게하고싶지않았다.그를마지막으로만난날,곧미국같수속중인데될수있으면오래머물거란얘기를하고나서그의반지낀손위에다내손을정성스럽게포개면서한번과부된것도억울한데두번씩과부될지도모르는일은저지르고싶지않다고말했다.완곡하게말한다는게심하게들리지나않았을까,눈치를살폈지만아무것도읽어낼수없었다.

[문학사상1995년1월호]

박완서소설’너무도쓸쓸한당신’중/창비(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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