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동에서 쓴 최승자의 시‎

지난해 8월 경남 함양군에서 열린 지리산문학제에서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할 때 모습.

1979년 등단한 최승자 시인이 처음 받은 문학상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꿈인지 생시인지/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

(… )// (내 이름은 짧은 흐느낌에 지나지 않았다/오 명목이여 명목이여/물 위에 씌어진 흐린 꿈이여)//

( 물 위에 씌어진 3 )

지난해 10여년간의 공백을 깨고 ‘쓸쓸해서 머나먼’이란 작품으로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한 최승자 시인이

1년 만에 시집 ‘물 위에 씌어진’(천년의시학)을 냈다. 시의 봇물이 터졌다.

시인은 이번 시집의 시 전부를 정신과 병동에서 썼다고 ‘시인의 말’에서 밝혔다. 정신질환으로 10여년 동안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한 시인은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밥도 잊고, 때도 잊고, 혼잣말도 하는 혼돈 속에 있었다. 그런 속에서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시였다.

병동에서 피어났지만 시는 1980년대 독기어린 시어보다 한결 부드럽고 명료해졌다. 그리고 희망을 얘기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을 말한다/뒤에서 우리의 존재를 든든히 받쳐주는 그림자인 것 마냥/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환각제인 것 마냥/…/잊어라 잊어라/죽음의 문명을//어느 날 구름 한 점씩/새로이 피어나는 날들을 위하여.’

(시 ‘20세기의 무덤 앞에’에서)

시인은 지난해 상을 받은 뒤 지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제 투병 사실이 알려져 많은 관심도 받았지요. 그런데 나는 아것도 가진 게 없는 시인이라 보답할 것이 시밖에 없네요.”

이번 시집에는 흔들리는 자아와 세계, 그 아득함 속에서도 의식의 끈을 놓치 않으려는 부릅뜸이 있다. ‘오른발을 東에 두고 왼발은 西에 두고’ 굽어보지만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무의식끼리의 싸움과 메마른 생각으로 허허롭게 배회한다. 그가 발견한 건 어느 쪽도 아닌 ‘무(無)’와 ‘허(虛)’의 세계.

“21세기에도 허공은 있다/바라볼 하늘이 있다//지극한 無로서의 虛를 위하여” ( 하늘 도서관)

“소보록 소보록 쌓여가는 눈이 고맙다/단순한 이 한 풍경이 이렇게 즐거울까/ 즐거우니 너네들이 부처다/

즐거우니 너네들이 그리스도다” ( 눈내리는 날 )


시인은 노자, 장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세상은 시인 에게 장자식으론 없음으로써 있는 그림 떡일 뿐이고,

플라톤적으로는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 바라보는 꽃도 어제 생겨난 듯하지만 천만년 전의 꽃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시인은 가슴을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듯하다. 세상은 먼 풍경일 뿐이다.

‘물 위에 씌어진 시’들은 그 자체로 존재의 무의미성을 내포하지만 역으로 적극적 시행위로도 읽힌다. 물이 지닌 죽음과 무에 함몰되지 않은 시행위 속에 시인의 실존이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m.com


물 위에 씌어진(시작시인선 131)

저자 최승자 | 출판사 천년의시작
ㆍ정가 : 8,000원

동아 일보 <–

매일 경제 <–

국민 일보 <–

9 Comments

  1. summer moon

    16/07/2011 at 03:46

    작년에 신문 인터뷰에서 시인의 여윈 모습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웠었는지!!!!ㅠㅠ
    ‘쓸쓸해서 머나먼’을 참 오래도록 읽었어요,
    얇은 시집 한 권 읽기가 그리도 쉽지 않았던 건 자꾸만 시인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던거 같아요.

    ‘시간의 치유’에 밑줄을 긋던 것도 기억나고…

    ‘물위에 쓰여진’….꼭 읽어보고 싶네요   

  2. 참나무.

    16/07/2011 at 04:47

    …그래도 이 사진이 좀 괜찮아서
    골라골라 올렸습니다

    시집 사서 보낼게요 꼬옥…
    저도 아직이라 정신차린 후…^^

       

  3. 겨울비

    16/07/2011 at 12:21

    사진으로 뵈니 마르셨지만 힘은 있어 보이세요.
    골라골라 올리신 사진이어서인지…

    시낭송회에 혹 모실 수 있게 되면 썸머문님도 함께 하실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4. 참나무.

    16/07/2011 at 12:48

    그나저나 이 시집 좀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요
    그래봤자 경제적으론 택도 없겠지만
    정신적인 위로를 좀 받으셨으면…해서요…;;   

  5. summer moon

    17/07/2011 at 01:04

    겨울비님
    저도 언제 꼭 시낭송회에 가고 싶어요,
    만나뵙고 인사도 드리고 싶구요.^^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아주 많이 !!!!!!

    참나무님,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정말 소중한 만남….
    시집을 받은거나 다름없어요
    너무 행복하구요.   

  6. 교포아줌마

    17/07/2011 at 14:18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며
    첫마디로 흥얼거린 노래였는데요.

    태양의 여신 Deva
    들꽃을 기르는 …

    시인이 귀뜸해주니
    천만년전의 꽃들을 보게 되었네요.

    최승자 시인

    관심을 가지게 되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7. 참나무.

    17/07/2011 at 22:05

    주소 알려주시면 교아님도 시집 보내드릴게요
    당분간 제 선물은 모두 최승자 시집 되겠습니다…^^

    Let it be 랑 함께 제일 좋아하는 노래지요

    신문가져오라는 명이 떨어져서 전 또 병원으로 출근해야합니다
    다녀가시는 분 들 신나는 월요일 되시길…^^
       

  8. 레오

    18/07/2011 at 01:57

    병원으로 출근하신다니..
    더운 날씨에 서로 힘드시겠지만
    얼른 쾌차하시길 기도합니다~~   

  9. Pingback: sbs 주말극 ‘그래,그런거야’를 보고 -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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