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시인의 여름밤의 써늘한 글 한 줄
<사계절의 멋(<마쿠라노소시枕草子>제1단)>–세이쇼나곤(淸少納言, 964~?)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은 보기 좋다. 반딧불이가 달랑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가을은 해질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서너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광경은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광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겨울은 새벽녘. 눈이 내리면 더없이 좋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도 멋있다. 아주 추운 날 급하게 피운 숯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 때 숯을 뜨겁게 피우지 않으면 화로 속이 금방 흰 재로 변해버려 좋지 않다. (정순분 역)
불역쾌재 삼십삼측 김성탄 <不亦快哉 三十三則>–金聖嘆(江蘇 吳縣, ?~1661) 其一:夏七月,赫日停天,亦無風,亦無云;前後庭赫然如洪爐,無一鳥敢來飛。汗出遍身,縱橫成渠。置飯于前,不可得吃。 呼簟欲臥地上,則地濕如膏,蒼蠅又來緣頸附鼻,驅之不去,正莫可如何。忽然大黑車軸,疾澍澎湃之聲,如數百萬金鼓,檐溜浩于瀑布,身汗頓收,地燥如掃,蒼蠅盡去,飯便得吃。不亦快哉! 1. 7월의 무더운 날, 해는 중천에 멈춰 타오르는데, 바람 한 점 없고 구름 한 점 안 보인다. 마당도 뒤뜰도 난로 속 같이 뜨거워, 새 한마리 얼씬하지 못한다. 온몸에서 난 땀이 고랑을 이루어 흐른다. 점심상 앞에 앉아 보지만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돗자리를 가져오게 해 바닥에 드러누워 보려 하나, 자리는 끈적끈적하고 파리들은 코로 목으로 날아와 붙어, 쫓아도 가지 않는다.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 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우르릉 쾅쾅 울리고 먹장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수백만 개 쇠북을 두드리듯 소나기가 퍼붓고 처마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문득 몸에서 땀이 걷히고 바닥의 후덥지근함도 씻은 듯하다. 파리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비로소 밥을 편히 먹을 만하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十年別友,抵暮忽至。開門一揖畢,不及問其船來陸來,並不及命其坐床坐榻,便自疾趨入內,卑辭叩內子: “君豈有斗酒如東坡婦乎?” 內子欣然拔金簪相付。計之可作三日供也,不亦快哉! 2. 10년 동안 못 만난 친구가 갑자기 해질녘에 찾아온다. 문을 열고 그와 서로 읍을 나누자마자, 배로 왔는지 육로로 왔는지도 묻지 않고, 평상에 앉겠는지 의자에 앉겠는지도 미처 묻지 않고, 내실로 달려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동파 마누라처럼 그대도 술을 좀 장만할 수 없겠소?” 그러자 아내가 선뜻 금비녀를 뽑아 내민다. 어림잡아 한 사흘 술값은 넉넉하겠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街行見兩措大執爭一理,皆目裂頸赤,如不戴天,而又高拱手,低曲腰,滿口仍用者也之乎等字。其語刺刺,勢將連年不休。忽有壯夫掉臂行來,振威從中一喝而解。不變快哉! 6. 거리를 가다 보니, 두 사람이 별것도 아닌 일로 서로 따지고 있다. 얼굴은 벌겋게 핏대가 오르고 눈은 찢어지게 치켜 뜬 것이,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다. 그러면서 서로 예의만은 갖춘다는 듯이, 팔을 쳐들거나 허리를 굽혀 절까지 하면서, ‘댁에서는’이라느니, ‘그렇지 않습니까’ 등등 점잖고 고상한 말들을 쓰는데, 보아하니 시비는 한 해가 다 가도 끝나지 않을 기세이다. 그때 갑자기 건장한 사나이가 팔을 휘두르며 다가와 위풍이 넘치는 한 소리를 버럭 질러 모든 걸 일거에 해결한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子弟背誦書爛熟,如甁中瀉水。不亦快哉! 7. 자식들이 글을 읽는데, 그 유려하기가 병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飯後無事,翻倒敝篋,則見新舊逋欠文契不下數十百通,其人或存或亡,總之無有還之理。背人取火拉雜燒淨,仰看高天,蕭然無云。不亦快哉! 9. 식사 후 무료하여 묵은 상자를 뒤집어 쏟았더니, 돈을 꾸어준 신구 차용증 뭉치가 못 돼도 수십 수백 통이다. 그 중에는 이미 죽은 이도 있고, 살아 있는 이들도 있다. 뒤적거려 보건대, 대부분 돌아올 가망이 없는 돈들이다. 부싯돌을 가져오게 하여 묵은 차용증 다발을 모두 태워 없앤다. 우러러 보니 하늘은 높은데 구름 한 점 없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朝眠初覺,似聞家人嘆息之聲,言某人夜來已死,急呼而訊之,正是一城中第一絶有心計人。不亦快哉! 11. 아침에 눈을 뜨자, 한숨소리와 함께 누군가 죽었다고들 수군거리는 것 같다. 급히 사람을 불러 누가 죽었느냐고 묻자, 성 안에서 제일 인색하던 그 구두쇠라는 것이 아닌가.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夏月早起,看人于松棚下,鋸大竹作筒用。不亦快哉! 12. 여름날 아침에 일찍 깨어 내다보니, 누군가 소나무 그늘 밑에서 큰 대나무를 톱으로 켜 물통을 만들고 있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冬夜飮酒,轉復寒甚,推窗試看,雪大如手,已積三四寸矣。不亦快哉! 16. 겨울밤에 술을 마신다. 문득 방 안이 더 추워진 듯하여 창을 밀고 내다보니, 손바닥 만한 함박눈이 쏟아지는데, 이미 서너 마디(10여 센티)는 쌓여 있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夏日于朱紅盤中,自拔快刀,切綠沉西瓜。不亦快哉! 17. 여름 날, 새빨간 큰 소반에 새파란 수박을 올려 놓고 잘 드는 칼로 썩 자른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久欲爲比丘,若不得公然吃肉。若許爲比丘,又得公然吃肉。則夏月以熱湯快刀,淨割頭髮。不亦快哉! 18. 오래 전부터 중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면 고기를 내놓고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중이 되고도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어, 여름날 뜨거운 물과 잘 드는 삭도를 준비해 머리털을 깨끗이 밀어 치운다면!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存得三四癩瘡于私處,時呼熱湯關門澡之。不亦快哉! 19. 샅 주변 서너 군데 부스럼이 생겼다. 이따금 문을 꼭 닫아 걸고 뜨거운 물에 찜질한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寒士來借銀,謂不可啓齒,于是唯唯,亦說他事。 我窺見其苦意,拉向無人處,問所需多少,急趨入內,如數給與,然而問其必當速歸料理是事 耶?或尙得少留共飮酒耶?不亦快哉! 21. 가난한 선비가 돈을 꾸러 온다. 얘기를 터놓지 못하고, 우물쭈물 자꾸 딴 말만 한다. 그 괴로운 심정을 내가 눈치 채고 조용한 곳으로 따로 데리고 가, 얼마가 필요하냐 물어본 뒤, 급히 내실로 달려가 돈을 가져와 건네 준 다음, 다시 묻는다. “자네 지금 당장 가서 처리할 바쁜 일이 있는가? 혹시 좀더 머물면서 한 잔 같이 하고 갈 수는 없겠나?"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推紙窗放蜂出去,不亦快哉! 28. 창문을 열어 젖히고, 방 안의 벌을 몰아낸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看人風箏斷,不亦快哉! 30. 누군가의 날리던 연실이 끊어지는 것을 본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看野燒,不亦快哉! 31. 들불이 타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其一:還債畢,不亦快哉! 32. 빚진 돈을 모두 갚았다. 이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
<취해 운종교를 거닐며(醉踏雲從橋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7월 열 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원약허(元若虛),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떠난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아 있었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였다.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원덕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진(秦)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는 아니 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 사점(三更 四點 : 새벽 1시)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의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앉아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상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신 행차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이덕무가 취중에 그놈의 자(字)를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덕무가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유련(柳璉)이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유득공(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다. 지금 벌써 6년이 지나서 유득공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유련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탈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한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城)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가는귀 먹은 원님 앞에 성난 백성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 엄한 서당에서 시험일 닥친 학동들이 글 외는 소리 같았으며, 닭 울음소리는 홀로 나선 한 선비가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孟秋十三日夜。朴聖彥與李聖緯,弟聖欽,元若虛,呂生,鄭生,童子見龍。歷携李懋官至。時徐參判元德先至在座。聖彥盤足橫肱坐。數視夜。口言辭去。然故久坐。左右視莫肯先起者。元德亦殊無去意。則聖彥遂引諸君俱去。久之童子還言。客已當去。諸君散步街上。待子爲酒。元德笑曰。非秦者逐。遂起相携。步出街上。聖彥罵曰。月明。長者臨門。不置酒爲懽。獨留貴人語奈何。令長者久露立。余謝不敏。聖彥囊出五十錢沽酒。少醉。因出雲從衢。步月鍾閣下。時夜鼓已下三更四點。月益明。人影長皆十丈。自顧凜然可怖。街上群狗亂嘷。有獒東來。白色而瘦。衆環而撫之。喜搖其尾。俛首久立。甞聞獒出蒙古。大如馬。桀悍難制。入中國者。特其小者。易馴。出東方者。尤其小者。而比國犬絶大。見恠不吠。然一怒則狺狺示威。俗號胡白。其絶小者。俗號友友。種出雲南。皆嗜胾。雖甚飢。不食不潔。嗾能曉人意。項繫赫蹄書。雖遠必傳。或不逢主人。必啣主家物而還。以爲信云。歲常隨使者至國。然率多餓死。常獨行不得意。懋官醉而字之曰。豪伯。須臾失其所在。懋官悵然東向立。字呼豪伯。如知舊者三。衆皆大笑。鬨街群狗。亂走益吠。遂歷叩玄玄。益飮大醉。踏雲從橋。倚闌干語曩時。上元夜蓮玉舞此橋上。飮茗白石家。惠風戱曳鵝頸數匝。分付如僕隷狀。以爲笑樂。今已六年。惠風南遊錦江。蓮玉西出關西。俱能無恙否。又至水標橋。列坐橋上。月方西隨正紅。星光益搖搖圓大。當面欲滴露重。衣笠盡濕。白雲東起橫曳。冉冉北去。城東蒼翠益重。蛙聲如明府昏聵。亂民聚訟。蟬聲如黌堂嚴課。及日講誦。鷄聲如一士矯矯。以諍論爲己任。
<백탑 맑은 인연 문집 서문 (白塔淸緣集序)> –박제가(朴齊家, 1759~ 1805)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이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 터다. 지난 무자년과 기축년 사이, 내가 18-19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서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의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박지원 선생은 내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의복을 갖추고 나와 맞아 주셨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손을 맞잡아 주셨고, 지은 글을 모두 꺼내어 읽어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서 다관(茶罐)에 밥을 해 맑은 사발에 퍼서 옥 소반에 받쳐 내오셨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나를 격려해 주셨다. 뜻밖의 대접에 놀라고 기뻤던 나는 이를 천고의 아름다운 일로 여겨 문장을 지어서 응답했다. 선생의 인품과 학식에 빠져든 상황과 나를 알아주심에 대한 감동이 이러했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세우곤 했다. 내가 아내를 맞이하던 날 저녁에도 처가의 건장한 말을 가져다 안장을 벗기고 올라타고서 시동 한 명만 따르게 하고 홀로 바깥으로 나왔다. 당시 달빛이 길에 가득했는데, 이현궁 앞을 지나서 말을 채찍질해 서쪽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철교의 주막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 여러 벗들의 집에 들렀다가 탑을 빙 돌아 나왔다. 그대 호사가들은 이 일을 두고, 왕양명이 철주관도인을 찾아가 돌아오는 것조차 잊었던 일에 빗대 말하곤 했다.
그 이후 6-7년이 지나 백탑의 벗들이 제각각 흩어졌고, 가난과 병이 날로 심해져 간혹 만나면 서로 아무 탈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곤 했다. 그러나 풍류는 지난날보다 못하고, 얼굴빛은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벗과의 교유에도 피할 수 없는 흥망성쇠가 있어서 한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중원의 사람들은 벗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어양 왕사진은 “빙수와 우장이 달 밝은 밤에 모자를 벗고 맨 발로 나를 찾아와서는”이라는 시를 지었고, 소장형은 문집에서 왕사진과 이웃해 살면서 나눈 아름다운 일을 회상하고 기록했다. 벗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적은 것이다. 나는 그 글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비록 다른 곳에서 태어나도 마음은 같을 수 있음을 느낀다. 백탑의 벗들과 더불어 감탄하며 즐거워한 일이 너무나 오래되었다. 벗 이희경이 박지원 선생과 이덕무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나의 글을 베껴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내가 그곳에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이라는 뜻을 담아『백탑청연집』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서문을 지었다. 이 글을 통해 나와 벗들이 당시 얼마나 융성하게 교유했는가를 보여주고 또한 내 평생의 한두 가지 일을 밝혀둔다. 環城而墖爲中焉。遠望嶙峋。若雪竹之逬筍者。圓覺寺之遺址也。往歲戊子己丑之間。余年十八九。聞朴美仲先生文章超詣有當世之聲。遂往尋之于墖之北。先生聞余至。披衣出迎。握手如舊。遂盡出其所爲文而讀之。於是親淅米炊飯于茶罐。盛以甆。庋之玉案。稱觴以壽余。余驚喜過望。以爲千古之晟事。爲文以酬之。其傾倒之狀。知己之感。盖如此。當是時也。炯菴之扉對其北。洛書之廊峙其卥。數十武而爲徐氏書樓。又折而北東。爲二柳之居也。余乃一往忘返。留連旬月。詩文尺牘。動輒成帙。酒食徵逐。夜以繼日。嘗娶婦之夕。取舅家騘馬。解鞍而騎之。獨從一奴出。時月色滿道。從梨峴宮歬鞭馬西馳。至鐵橋酒家飮。皷三下。遂盡歷諸朋家。繞墖而出。當時好事者比之陽明先生訪鐵柱觀道人事。至今六七年之間。落落離居。貧病日侵。有時相逢。雖各幸其無恙。而風流减於疇昔。容光非復曩時。則始知朋遊固有晟衰。而彼此各自一時也。中原人以友朋爲性命。故王漁洋先生有修耦長月夜科跣見過之作。邵子湘集中追記當時隣居之勝事。以寓離合之思。每覽此卷。有異世同心之感。相與歎息者久之。友人李君十三合書燕巖,烔菴諸公及余詩文尺牘若干卷。余爲題之曰白墖淸緣集而序之如此。以見吾輩之遊。盛於當日。而且以自擧平生之一二云云。
<죽란 시모임 문집 서문(竹欄詩社帖序)>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5천 년 가운데서 반드시 그와 더불어 같은 세상에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가로 세로 3만 리 지역 가운데서 반드시 그와 더불어 같은 나라에 사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나이가 장유(長幼)의 동떨어진 차이가 있고 거주가 먼 고장에 있으면, 서로 대할 적에 어려워 즐거움이 적고 세상을 마치도록 서로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무릇 이 몇 가지 경우 이외에 또 궁달(窮達 곤궁함과 현달함)이 같지 않고 취향이 같지 않으면, 비록 나이가 같고 이웃에 살더라도 그와 더불어 종유(從遊)하거나 즐겁게 놀지 않는다. 이것이 인생의 교유가 넓지 않은 까닭인데, 우리나라는 그 중 심한 곳이다. 내가 일찍이 채이숙(蔡邇叔 이숙(邇叔)은 채홍원(蔡弘遠)의 자)과 함께 의논하여 시사(詩社)를 만들고 같이 즐겼다. 이숙이 말하기를, “나와 그대는 나이가 동갑이다. 우리보다 나이가 9년 많은 사람과, 우리보다 9년 적은 사람을 나와 그대는 모두 그들과 벗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9년 많은 사람과 우리보다 9년 적은 사람이 서로 만나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피한다. 그래서 그 모임은 벌써 어지러워진다.” 한다. 그리하여 우리보다 4년 많은 사람으로부터 우리보다 4년 적은 사람까지만 모임을 가졌더니, 모두 15인이었다. 즉 이주신(李舟臣)이름은 유수(儒修)임. 홍약여(洪約汝)이름은 시제(時濟)임. 이성욱(李聖勖)이름은 석하(錫夏)임. 이자화(李子和)이름은 치훈(致薰)임. 이양신(李良臣)이름은 주석(周奭)임. 한해보(韓徯父)이름은 치응(致應)임. 유진옥(柳振玉)이름은 원명(遠鳴)임. 심화오(沈華五)이름은 규로(奎魯)임. 윤무구(尹无咎)이름은 지눌(持訥)임. 신경보(申景甫)이름은 성모(星模)임. 한원례(韓元禮)이름은 백원(百源)임. 이휘조(李輝祖)이름은 중련(重蓮)임. 와 나의 형제, 그리고 이숙(邇叔)이다. 이 15인은 서로 비슷한 나이로, 서로 바라보이는 가까운 지방에 살면서 태평한 시대에 출세하여 모두 사적(仕籍)에 이름이 오르고, 그 지취(志趣)의 귀착되는 것도 서로 같으니, 모임을 만들어 즐기면서 태평 세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모임이 이루어지자, 서로 더불어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歲暮)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번 모이되, 모임 때마다 술ㆍ안주ㆍ붓ㆍ벼루 등을 설비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 데에 이바지한다. 모임은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마련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되,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한다.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품계가 승진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이에 이름과 약조(約條)를 쓰고 제목을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라고 썼으니, 그 모임이 흔히 우리 집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번옹(樊翁 채제공(蔡濟恭)을 말함)이 이 일을 듣고 크게 감탄하기를, “훌륭하다, 이 모임이여!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이런 모임이 있을 수 있었으랴. 이는 모두 우리 성상께서 20년 동안 선비를 기르고 성취시키신 효과이다. 늘 모일 적마다 성상의 은택을 읊어서 보답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한갓 곤드레만드레하여 떠드는 것만 일삼지 말라.” 한다. 이숙(邇叔)이 나에게 서문 쓰기를 청하므로, 번옹(樊翁)의 훈계를 아울러 기록하여 서문으로 삼는다. 上下五千年。必與之生竝一世者。不適然也。從橫三萬里。必與之生竝一邦者。不適然也。然其齒有長幼之縣。而其居在遼遠之鄕。則對之莊然少歡而有沒世不相識者矣。凡是數者之外。又其窮達有不齊。而趣向有不同。則雖年同庚而處比鄰。莫肯與之游從讌敖。此人生交結之所以不廣。而我邦其甚者也。余嘗與蔡邇叔議結詩社。與共歎1)樂。邇叔之言曰吾與子同庚也。多我九年者與少我九年者。吾與子皆得而友之。然多我九年者與少我九年者相値。則爲之磬折爲之辟席。而其會已紛紛矣。於是自多我四年者起。至少我四年者而止。共得十五人。李舟臣 名儒修 ,洪約汝 名時濟 ,李聖勖 名錫夏 ,李子和 名致薰 ,李良臣 名周奭 ,韓徯父 名致應 ,柳振玉 名遠鳴 ,沈華五 名奎魯 ,尹无咎 名持訥 ,申景甫 名星模 ,韓元禮 名百源 ,李輝祖 名重蓮 。 與余兄弟與邇叔是已。玆十五人者。以相若之年。處相望之地。策名淸時。齊登仕籍。而其志趣所歸。與之相類。則結社爲歡。賁飾太平。不亦可乎。會旣成。與之約曰杏始華一會。桃始華一會。盛夏蓏果旣熟一會。新涼西池賞蓮一會。菊有華一會。冬大雪一會。歲暮盆梅放花一會。每陳酒殽筆硯。以供觴詠。少者先爲之辦具。至于長者。周而復之。有擧男者辦。有出宰者辦。有進秩者辦。有子弟登科者辦。於是書名與約而題之曰竹欄詩社帖。以其會多在余家也。樊翁聞此事而喟然曰。盛矣哉斯會也。吾少時何得有此。此皆我聖上二十年來休養生息陶鑄作成之效也。每一會。其歌詠聖澤。思所以報答之。無徒酕醄呼呶爲也。邇叔屬余爲序。竝記樊翁之誡以爲敍。
<맥주 첫 잔>–필립 들레름 (PhiliPPe Delerm, 프랑스 노르망디, 1950~ ) 중요한 것은 딱 한 잔이다. 그 다음에 마시는 맥주는 마시는 시간만 점점 더 길어지고, 평범해진다. 그 다음 잔들은 미지근하고, 들척지근하고, 지리멸렬하게 흥청댈 뿐이다. 마지막 잔은 어쩌면 끝낸다는 환멸의 감정 덕택에 어떤 힘 같은 것을 되찾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맨 처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첫 잔이라니! 목구멍이라고? 첫 잔은 목구멍을 넘어가기 전에 시작된다. 입술에서부터 벌써 이 거품 이는 황금빛 기쁨은 시작되는 것이다. 거품 때문에 맥주는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리고는 쓴맛을 걸러낸 행복이 천천히 입천장에 닿는다. 첫 잔은 아주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벌컥벌컥 금방 마셔 버린다. 첫 잔은 본능적인 갈증을 채우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맥주 첫 잔이 주는 기쁨은 하나의 문장처럼 모두 기록된다. 이상적인 미끼 역할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지도, 지나치게 적지도 않은 적당한 양이다. 맥주를 들이키면, 숨소리가 나고, 혀가 달싹댄다. 그리고 침묵은 이 즉각적인 행복이라는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다. 무한을 향해서 열리는, 믿을 수 없는 기쁨의 느낌……. 동시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벌써 맛보아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술잔을 내려놓는다. 네모 난 압지로 만들어진 컵 받침 위에 올려 놓은 뒤, 저만치 밀어 놓기까지 한다. 우리는 맥주 색깔을 음미한다. 가짜 꿀, 차가운 태양. 우리는 모든 지혜와 기다림을 동원해서 지금 막 이루었다가도 또 지금 막 사라져 버린 기적을 손에 넣고 싶어한다. 우리는 유리잔 바깥에 씌어 있는 맥주 이름을 만족스럽게 읽어 본다. 컵과 내용물이 서로 질문을 던져 대고, 텅빈 심연 속에서 서로 무언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우리는 순금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비밀을 주문으로 만들어 영원히 소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양이 와서 빛의 방울을 흩뿌려 놓은 하얀색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실패한 연금술사는 황금의 외양만을 건져낼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맥주를 마실수록 기쁨은 더욱더 줄어든다. 그것은 쓰라린 행복이다. 우리는 첫 잔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김정란 역)
<소풍> –김사인(1955~ ) 내가 좋아하는 일들은 제법 여러 가지입니다. 청소를 한다거나, 화분을 들어 옮긴다거나, 개를 씻긴다거나 하는 노역(勞役)성의 일들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마지못해 흉내만 내다가 십중팔구 아내에게 한소리를 얻어 듣습니다. 반면, 따뜻한 방에 기대 앉아 스와니강이나 켄터키 옛집을 하모니카로 분달지, 묵은 책 정리하다 집어들게 된 박수동의 <고인돌>이나 홍승우의 <비빔툰>을 끼고 앉아, 하던 일 미뤄둔 채 낄낄거리며 캐러맬 까먹기, 밀린 원고 끝낸다고 비장하게 밤샘 태세에 돌입했다가 두어 시쯤 라면 하나를 맛있게 끓여먹기, 끓여 먹고 나른해져서, 잠깐만 쉰다는 게 그만 아내가 아침에 깨울 때까지 자버리기, 등등이 내가 좋아하는, 그래서 시키지 않아도 잘하는 일들입니다. 한심하기가 영락없는 베짱이입니다.
그 밖에도 목욕 안하고 오래 버티기, 머리 오래 안 감고도 안 가렵기, 술친구 연락 오면 최단시간에 달려 나가기(이때에는 좋아서 내 콧구멍이 ‘벌름벌름한다’고 가족들은 표현합니다), 등 여러 가지가 더 있겠습니다만, 요맘때쯤이면 하고 싶어 마음이 근질거리는 일이 꼭 하나 있습니다.
우수 경칩 무렵 너무 춥지 않은 날을 골라, 오후 두세 시쯤 남대문 시장으로 혼자 소풍가는 일이 그것입니다. 귀후비개, 이쑤시개, 이태리타올 등의 잡화로부터 온갖 종류의 공책, 온갖 형광펜, 붓펜, 안 깎고 안 눌러도 심이 계속 나오는 자동연필, 온갖 다이어리, 포스트잇, 독서대, 온갖 색종이, 만화경, 핼로키티 가방, 황사방지 마스크, 호루라기(여기까지는 문구 시장이고요), 돌아 나오면 ‘세상의 모든’ 안경들, 허리띠들, 머리끈들, 각종의 운동화, 실내화, 랜드로바, 산처럼 쌓인 각종의 옷들, 온갖 모양 온갖 색깔의 가방들을 거쳐 다시 지하로 내려가면 미로 같은 도깨비 시장이 눈을 휘황하게 하지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기발한 생활용품들, 기발한 식품들, 다시 올라와 만나는 신기한 등산장비들, 신기한 액세서리들… 이쯤 적는 것도 황홀하고 숨이 가쁩니다. 이렇게 시장 고샅 고샅을 맛보며, 원 세상에 이런 기기묘묘한 물건들을 누가 다 만들었을까, 멍청한 생각도 하면서, 파는 사람의 입담에 넋을 놓고 저도 모르게 침을 흘리다가, 물건 안 살거면 자꾸 만지지 말고 저리 비키라는 구박도 좀 받아가며, 다시 정신 차려 한양구경 온 시골 훈장처럼 지갑은 잘 있는가 수시로 찾아 꼭 쥐어보며, 오가는 외국인들과 어깨도 한번씩 부딪쳐 보며, 살 것도 아니면서 좀약(나프탈린) 한 봉다리가 얼만지, 고무줄 한 다스는 얼만지 만만해 보이는 좌판 아저씨한테나 괜히 한번 물어도 보면서, 두어 시간을 도는 겁니다. 돌다보면 그 활기에 찬 복작거림과 사람 냄새, 물건 냄새들로 해서 국민학교 운동회 구경 나온 두메 처녀 같이, 덩달아 마음이 흐뭇하고 북적해집니다.
이 때쯤이면 날은 저물고 다리도 좀 아프고 겨울 끝인지라 코끝도 알싸해집니다. 드디어 뒷골목 갈치조림집으로 찾아들 시간인 거지요. 따끈한 물을 한 잔 청해 마신 뒤, 갈치조림 백반을 시키고, 음식 나올 동안 장보따리를 슬그머니 열어봅니다. 검정양말 열 켤레 한 묶음 5천원, 욕실이나 타일의 때를 감쪽같이 지운다는 청소 블록 한 세트 5천원, 작은 자갈 모양의 신기한 초콜렛 한 봉지 4천원 등등이 볼수록 대견합니다. 푸짐하고 얼큰한 갈치조림(그 국물과 무우 맛이라니요)으로 밥을 한 양푼 비우고(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겠지요만)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제 호사로운 소풍은 끝납니다.
이 남대문시장 코스에 앞서 남산 산책길 산보가 보태지면 더할 나위 없는 호화정찬의 나들이가 됩니다. 다만 귀가와 동시에, 집도 좁은데 이런 쓸데 없는 것들을 왜 돈을 주고 주워다 나르느냐고 호되게 한 바가지씩 뒤집어 쓰는 것은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인데, 이 대목은 각자 역량껏 감당할 길밖에 없습니다. (2008)
참나무.
25/06/2013 at 06:16
병원갔다가 사카 들렀더니
시인께서 내일 청담 모임 준비를 이렇게 열심히 뽑아 보내주셨다네요
아직 다 읽진 않아도 내일 청담 ‘시인과의 만남’ 오시는 분들은
선택되신 분이지 싶습니다
프린트가능하신 참가자들은 예습 겸 준비하시라고 급히 올립니다
지해범
25/06/2013 at 06:33
두고두고 읽을 자료 같습니다.
참나무.
25/06/2013 at 06:52
본문 스크랩으로 풀었어요
지기자 님 내일 오시면 더 좋겠습니다아~~
佳人
25/06/2013 at 08:59
보내주신 자료를 받고 정말 감동했어요.
타이틀을 < 더운 여름밤의 써늘한 글 한 줄> 이라고 정하시고
시 몇 편을 선정해서 보내주신다길래 간단할줄 알았는데
이렇게 꼼꼼하게 시대별로 정리하신 자료라니…
많은 분들이 오셔서 귀한 추억을 담아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김진아
25/06/2013 at 10:32
참나무님…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
참나무.
25/06/2013 at 11:52
이제사 차분하게 읽어봤습니다- 아기가 좀 전에야 잠이들어서…
시인께선 내일 또 얼마마한 감동을 주실지요
<맥주 첫 잔>–필립 들레름/
저 글은 맥주 반 잔 정도(제 주량이라…^^) 마시며 꼭 읽어보고싶게하는 글이군요…
뽑아주신 글들 모두 명작이지만
전 시인의 ‘소풍’도 와닿습니다.
음악을 살짝 끼워봤는데- 짧아서…
지우는 게 나을 듯도싶고…
참나무.
25/06/2013 at 11:59
A4용지로 13장 분량이랍니다- 모두 복사하면
지기자님 말씀처럼 두고두고 새겨 읽어볼만한 자료들이지요
진아씨도 이번 만큼은 오셨으면 좋으련만
하고싶은 일을 어찌 다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참석못할 충분한 이유들 있겠지요… 누구에게나…
산성
25/06/2013 at 12:58
아고 이리 재미나는 글을 이 밤에 읽는 재미
앞에 것은 놔두고
맥주 한 잔과 시인의 ‘소풍’ 따라 다니다 보니
남대문 시장 한바퀴에다가 여름밤이 은근
낭만스러워지기까지 합니다.
내일,그 그윽하게 깊은 목소리에
한번 취해 볼 일입니다.
이리 재빨리…재주도 많으십니다.
참나무.
25/06/2013 at 13:16
모두 7편인데 내일 참석하는 분들이 한 편씩 낭독 후
시인께서 뒷이야기를 하실 예정이시라고…
아까 잠깐 짬이나서 사카에 들어가자 마자
이 귀하고 감동적인 자료들 준비하시느라 어제사 메일로 보내주시드라고
미리 예습들 하셨으면~~굽한 마음에 앉은 자리에서 드르륵 …
글재주 없는 사람이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욥
ㅡ솜씨없는 며느리 부엌에서 설겆이나하딕기 …^^
그나저나 남대문 시장 느릿느릿…저도 꼭 따라해보고싶더라니까요…^^
(음악 지울까요 살째기~~)
푸나무
25/06/2013 at 14:31
침초자 리뷰도 제게 있는데
뇨보라 불리웟던 궁녀가 슨 아주 우아한 글이지요. 재미있기두 하구요.
금성탄은…
하하 참나무님이 벌서 찾으셧구요.
박지원의 글도 읽은 기억이 나고…
하하 내일 이야기가 아주 재미나겠습니다.
꼭참석하야…한두마디 보태고 싶은데…흠…
세상사….. ㅠㅠ
겨울비
25/06/2013 at 22:46
역시 김사인 시인 하면서
스크랩부터 하고
아침을 거르더라도 읽고 나가야지 싶어
안경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일터에 있고 집에 하나를 두었는데
도무지 못 찾아 나중에 읽기로…
그나마 나왔던 목소리가 이제 완전히 잠겨
아아… 해보는데 목만 따갑습니다.
기말시험 전이라 쉴 수도 없고…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리 마음 모으며
일터로 갑니다.
‘백탑 맑은 인연 문집 서문’
백탑 청연을 상기시켜 주심 감사드리며…
참나무.
26/06/2013 at 00:54
그랬다니까요
아제 가인 님이 시인이 보내 준 파일 열자마자
‘마쿠라노소시’ 가 맨 먼저 보여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안대희 교수 추천할 때 바로 산 책이어서…^^
참나무.
26/06/2013 at 00:55
안타까워라…우선 건강부터 살피시고…
오늘 많은 분들 기대해도 될 것같은 예감이 들더랍니다
이 파일 열자마자…!
summer moon
26/06/2013 at 01:17
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김사인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다음에 서울에 가면
꼭 남대문 시장으로 소풍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어요, 꼭 그럴거에요.ㅎ
저도 김사인 시인을 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ㅠㅠ
도토리
26/06/2013 at 04:47
저는 14장입니다..ㅎㅎ
모두 다 상큼한 기쁨을 동반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저녁 때 뵙겠습니다.^^*
참나무.
27/06/2013 at 09:16
그런 시간 오면 얼마나 좋을까
기꺼이 안내할 수 있는데…
남대문, 동대문 시장 속속들이 아는 장돌뱅이거든요..^^
참나무.
27/06/2013 at 09:18
저는 프린터기 고장나서 어제 사카에서 ‘수업’ 시작 직전 교재 받아왔지요
여러모로 가인 님이 수고가 많았더라구요…
조르바
04/02/2015 at 00:39
오랫만에 가인님 닉 발견하고 쫓아 갔다가 참나무님이 글이 맨 위에 있는 거에요.
읽어보니 참 좋은 거에요…
스크랩했어요… 감사충만 마음충만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유익하고 재미난 즐 포스팅의 한 해 되세요… ^^
참나무.
04/02/2015 at 11:52
조르바님 바쁘신 분이… 언제 짬이 나셨나요- 제법 긴 글인데…
청담…옛날 갓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가 되 버렸는데..ㅎㅎ
새해 인사 고맙고요- 허기사 아직 음력은 구정 전이니
아무쪼록 요가 열심히 하고 건강하길 바랍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