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과 김정운, & 서울숲 3번 출구

 

분당선 서울 숲 3번 출구 근처에서서울 숲 가는 길

– 2014 6.26일 오전 10시 21분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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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가수 김창완의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2014. 6. 28 (토)

빨간 칸 ‘200자 원고지’ 없으니… 글 쓰는 두근거림도 없구나

 김창완 사라지는것들을 위하여 삽화


가로로 스무 칸 세로로 열 칸. 이십 곱하기 십 해서 생겨나는 게 이백자 원고지다. 세로로 놓고 쓰기도 했지만 가로로 놓고 쓰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원고지 가로로는 밭이랑처럼 칸과 칸 사이에 여백의 줄이 있었다.그 줄은 행과 행 사이의 간격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만약에 그 ‘간격’의 거리감이 없었다면 원고지에 적힌 글이 그토록 우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텅 빈 원고지를 바라보고 있다. 아직은 아무 생각이 없지만 펜엔 이미 잉크를 묻혔다. 잉크에선 신선한 피 냄새가 난다. 원고지 첫째 줄 스무 칸은 비워놓고 둘째 줄 중간쯤에 제목을 적기 직전이다. ‘사라지는…’ 작은따옴표 하나 적자고 원고지 한 칸을 쓰기는 좀 아깝지만 과감하게 한 칸을 배정하고 ‘사’ ‘라’ ‘지’ ‘는’을 한 칸에 한 자씩 쓴다. 점은 한 칸에 두 개씩 찍는다. 그렇게 제목을 쓰고 나면 행을 바꾸고 오른쪽에서 두 칸이 남게 이름을 적어넣는다.그러고는 다시 한 줄 스무 칸을 비워놓고 그 밑의 줄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글이 잘 달릴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일까? 글 시작의 첫째 칸은 육상선수들이 시합 때 스타트 라인에서 한쪽 발로 딛고 있는 스타팅 블록처럼 비워져 있다. 펜이 그 첫 칸을 지나갔다면 글이 씌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글은 그렇게 잉크 새듯이 나오진 않는다. 원고지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늘 뛰어내리지도 못할 벼랑 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싶지만 벼랑 끝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따로 있어 쉽게 뒷걸음질쳐지지도 않는다.

수많은 세월의 탄식이 갈매기 울음소리로 파도소리로 바람 소리로 들려온다. 마른 펜에 다시 잉크를 묻혀 그 소리를 받아적는다. 이백자 원고지의 붉은 줄 칸 안에 검정 먹글씨가 새겨진다. 펜이 원고지 위를 달리는 소리가 바람에 떨리는 아기 대나무 잎에서 나는 그 속삭임 같다. 생각과 생각 사이 떨림과 떨림 사이에서 글이 나온다. 페이브먼트를 또각또각 걷는 하이힐 신은 여인의 발자국 같은 글씨가 있는가 하면 거나하게 취해 어느 한 쪽 발도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취객의 발걸음 같은 글씨도 있다. 어떤 걸음이든 다 인생의 걸음이어서 원고지를 휘젓고 가는 그 발자국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글은 풀어진 그림이다. 철자 한 획 한 획 그어질 때마다 형태가 생기고 색이 더해진다. 그것은 풍경화가 되었다 인물화가 되었다 어느 순간엔 바람도 그려지고 붉은 피 철철 흐르는 심장이 되었다 차가운 눈물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백자 원고지는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거기에 ‘토지’가 펼쳐지고 ‘태백산맥’이 이어지고 ‘인간시장’이 들어섰으며 ‘영자’가 찾아오기도 하고 ‘철수와 미미’의 사랑이 수채화처럼 그려지기도 했다. 가만히 보면 이백자 원고지 빈칸마다 맥박이 뛰었으며 그 빈칸마다 생의 순간이 담겼다.

원고지가 어떻게 종이일 뿐이며 그 위의 글씨가 어찌 기록일 뿐이랴. 이백자 원고지는 아직 안 적어 내려간 삶이고 아직 말하지 못한 소망이고 아직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이백자 원고지가 사라진다. 이제는 삶과 사랑을 인터넷이나 휴대폰에 쓴다. 이백자 원고지에 양파즙으로 써내려간 비밀 연애편지에 불을 비춰 볼 여유도 없다. 이 시대의 우리에겐 두근거리는 기다림도 사치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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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사진[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흉내 낸다고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2014.06.27 (금)

인간은 模倣할 수 있어 창조·소통·기쁨 가능
지위 높을수록 베낄 사람 없어 삶이 지루해…
남 존중하며 겸손하게 흉내 내야 소외감 떨쳐

‘너 그러다가 조영남처럼 된다!’ 자랄 때, 우리 엄마는 내게 늘 이렇게 경고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도 곧잘 따라 부르고, 백일장에 나가 가끔 상도 타오는 내가 정작 공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몹시 불안하셨던 거다. 가수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히트곡 하나 없고, 그림을 그린다고는 하지만 요상한 화투나 그리고, 잘 팔리지도 않는 희한한 주제의 책도 쉬지 않고 내는 조영남은 ‘한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당시의 일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내가 나이 쉰 살이 넘어 교수를 ‘때려치우고’ 일본에서 그림 공부 한다고 하니, 다들 ‘조영남 흉내’ 내는 거냐고 한다. 독일 유학 가서 10여 년 그렇게 고생하고, 한국에서 10여 년 멀쩡하게 교수 하던 사람이 나이 들 만큼 들어 하필이면 ‘조영남 흉내’냐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 지금 나는 조영남 흉내 내고 있는 거 맞다. 커다란 창문으로 한강을 내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가 너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늙어갈수록 뒷모습이 폼 나야 한다. 뒷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는 ‘은퇴 교수’보다는 쭈그리고 앉아 그림 그리며 늙어가는 조영남의 뒷모습이 훨씬 더 멋있다(조영남은 그의 평평한 얼굴 때문에 앞쪽보다는 뒤쪽이 조금 더 낫다. 그가 매번 그렇게 큰 안경을 고집하는 이유는 안경이 코에 걸리지 않아서다. 그나마 큰 안경은 뺨에 걸려서 얼굴에 붙어 있을 수 있다). 고작 65세에 은퇴해서 수십년 동안 지루하게 늙어가는 것보다는 일흔이 넘어서도 화투 그림 그리며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하는 조영남을 흉내 내는 쪽이 ‘남는 인생’이라는 생각이다.

일단, 남 흉내 내는 것을 그렇게 폄하하면 안 된다. 인간 문명은 흉내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종류의 흉내를 철학적으로는 ‘미메시스(Mimesis)’라고 한다. 미메시스 이론을 좇아가다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까지 기어올라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과 문학의 본질은 미메시스, 즉 모방(模倣)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모방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미메시스론(論)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자신의 경험처럼 느낄 수 있는 심리적 모방 행위가 없다면 비극을 통한 ‘카타르시스’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흐풍의 의자 작품 사진

고흐풍의 의자. /김정운 그림

오늘날 우리가 남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의 기초로 여기는 ‘공감 능력’이란 바로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에서 유래한다. 1873년 독일의 심리학자 로베르트 피셔(Robert Vischer)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미학적 체험을 ‘감정이입(Einf�hlung)’이란 개념을 사용해 설명했다. ‘감정이입’이란 그 전에는 없었던 개념이다.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느낀다(in-feeling, 또는 feeling-into)’는 뜻의 이 독일어는 영어권에서는 ‘공감(Empathy)’으로 번역되었고, 오늘날에는 일상어처럼 사용된다. 그러니까 인류가 타인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심리적 과정을 학문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불과 150년 전이라는 이야기다.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에 인류가 관심을 가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미개했다. 아무튼, 미메시스로부터 공감에 이르기까지의 개념적 진화를 통해 인간은 서로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에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 그렇다. 타인의 감정은 그 사람의 정서 표현을 그대로 흉내 낼 때 제대로 이해된다. 공감 능력이란 바로 이 정서의 모방 능력을 뜻한다.

오래 함께 산 부부의 모습이 비슷해 보이는 것은 생긴 것이 닮아서가 아니다. 서로의 정서 표현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흉내 내는 사람이 사랑받는다. 인간은 자신의 정서를 흉내 내는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

그뿐만 아니다. 흉내 낼 수 있어야 창조적이 된다.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에 따르면 모방이 창조적 능력으로 진화하는 것은 ‘지연모방(遲延模倣·Aufgeschobene Nachahmung)’이 가능하면서부터다. 두 살 무렵이 되면 아동은 며칠 전 본 것을 기억해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 행위를 머릿속에 상징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연모방과 같은 ‘상징으로 매개된 행위’야말로 창조성의 원천이다. 빗자루가 비행기가 되기도 하고, 베개가 달리는 말이 되는 것과 같은 창조적 ‘상징놀이’는 바로 이 지연모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지연모방’은 피아제의 개념 중 가장 기막힌 통찰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바로 이 흉내 내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왜 어린아이가 인형이나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하는 것일까? 장난감이 대상 세계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나 스포츠와 같은 어른들의 놀이도 내용이나 규칙이 더 복잡해졌을 뿐, 그 본질은 모방에 있다.

흉내 내면 즐거워진다. 나이 들면서 삶이 재미없어지는 이유는 도무지 흉내 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삶이 지루해지는 이유도 도대체 더는 모방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일수록 고독한 거다. 그러나 가장 처절한 상황은 누굴 흉내 낼 생각도 없고, 그 누구도 나를 흉내 내주지 않을 때다. 아, 세상이 이보다 더 쓸쓸할 수는 없는 거다.

젊은 날의 성공이 자랑스러울수록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남 흉내를 열심히 내야 한다. 그래야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과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삶이 지속적으로 창조적이 된다. 삶은 나이 들수록 재미있어야 한다. 그렇게 쓸쓸하고,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늙어갈 거면 오래 살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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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omments

  1. 잎사귀

    28/06/2014 at 06:12

    김창완이 글도 잘쓰는군요.@@
    오늘 신문이 안 와서 못보았는데.
       

  2. 참나무.

    28/06/2014 at 15:00

    밤 깊으면 너무 조용해
    책 덮으면 너무 쓸쓸해
    불을 끄면 너무 외로워
    누가 내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사랑없이
    어이 살수 있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랑없인 난 못 살아요

    한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틈에 너무 막막해
    오가는 말 너무 덧없어
    누가 내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사랑없이
    어이 살수 있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랑없인 난 못 살아요
       

  3. 참나무.

    28/06/2014 at 21:44

    잎사귀님 죄송~~
    오타투성이 답글이라 지우고 음악도 바꿨어요 어제 늦은 시간에…
    이 노래 중독성 있어 어제부터 내내 듣고있고요…

    오늘 아침에도 울집 거실엔 콜롬비아 : 우루과이 전이 펼처지고 있네요

    -오늘은요? /로드리게스… 그림같은 슛 두 개나 날맀따!!

    흥분된 어조로 편안하게 즐기는 것같습니다
    -로드리게스 몇 살인데요?/ 24살/ 아고~~~

    이런 대화 나눴지만 속으로는
    가수 로드니게스(영화: 서칭 포 수가맨) 나 생각하미 내 방에 들어왔네요…

    다녀다시는 분들도 주일 즐겁게 잘 보내시길~~
       

  4. summer moon

    29/06/2014 at 02:21

    무엇보다도 먼저,
    사진들 정말 아름답습니다 !!!!!!!!!!!

    저는 아직도 원고지를 몇장 간직하고 있어요
    오래 전에 한국에 갔다가 일부러 사가지고 왔었거든요
    언제 사용하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이러다가 원고지를 작품처럼 틀에 끼워서 벽에 걸어 놓고 보게 되는건 아닌지?! ^^

    흉내를 내다가 자기 목소리, 자기 스타일을 찾게 되면 정말 이상적일거에요
    죽을 때 까지 흉내만 내다 그만두는건 너무 싫고…   

  5. 푸나무

    29/06/2014 at 23:47

    글은 풀어진 그림이다.
    멋진 문장이에요.
    차암, 저 냥반 갈수록 멋져지는것 같아요.    

  6. 도토리

    30/06/2014 at 04:11

    작년 여름에 제주도 갔을 때 넘 더워서 그냥 집에 콕 박혀 있었어요.
    도서관에서 책 빌려다 보면서…
    그 때. 김정운씨 책 읽어 봤는데
    흥미롭고 박식하고 솔직해서 호감이 가는 분이었어요,
    리스본.. 처럼, 백세노인..에서 처럼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느닷없이 일을 저지르는 사람.. 용기에 늘 감탄하고 부러워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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