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변종곤은 왜 그림을 그리나?
"예술가들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
*이 인터뷰 기사는 2011년 8월 23일자 뉴욕중앙일보에 실린 것을 보충한 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 대구의 가톨릭고교 미술교사였던 그는 단발머리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다가 장발 단속반에 수 차례 잡혀갔다. 1978년, 그는 철수한 미군 비행장을 극사실주의로 그려 한국 최초의 민전이었던 제 1회 동아일보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다. 미국에 의해 좌우된 대한민국의 비극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곧 화단의 스타로 떠올랐다.
제 5공화국 출범 후 그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동아일보는 ‘백지광고’ 사태를 맞는다. 어느 날 ‘빨리 움직이라’는 전화 한 통을 받은 그는 거의 야반도주하다시피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붓과 물감, 1인용 산요 전기밥통을 등산용 배낭을 맨 그는 가을 날 JFK공항에 도착했다. 그때가 1981년 9월이었다.
뉴욕으로 정치적인 망명, 생선가게에서 만난 화랑 주인, 상류사회 백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화가 변종곤(65)씨는 극빈자에서 최상류층까지 오가며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의 파고를 고고하게 유영해왔다.
그러나, 30년의 이민생활에서 그는 생선가게에서 3개월 일한 것 빼곤 전업작가의 길을 고수해온 행운의 화가다.할렘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물감이 없어 거리로 나간 변씨는 폐기물을 줍기 시작했다. 생활이 피면서 벼룩시장과 중고서점을 드나들었고, 곳곳에서 발견한 오브제들로 아상블라쥬와 사진적인 리얼리즘을 매치한 작품을 들고 88 서울올림픽 때 백남준씨와 함께 고국에 금의환향했다.
변종곤씨 아파트. 미술애호가들이 뉴욕 방문 때 필수 코스로 들러보는 곳이기도 하다.
브루클린 보름힐에 있는 그의 집과 스튜디오는 ‘변종곤의 우주’이자 ‘미니 박물관’으로 불리운다. 한국 미술계에선 뉴욕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할 명소가 됐다.
변종곤씨가 뉴욕 생활 30년을 결산하는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17일부터 11월 6일까지 브루클린의 전시공간 ‘인비지블 독(The Invisible Dog)’의 3000평방피트 갤러리에서 ‘아파트 #1L의 레이어(A Layer of The #1L)’를 주제로 15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 오프닝 바로 전날 변씨는 시민권을 취득했다. 전시장 2층, 그의 30년 작업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스튜디오에서 변씨를 만났다.(2011)
난 ‘반골’이 아니라 ‘애국자’
대구에서 형 하나 누나 셋인 집의 막내로 태어난 변씨는 부모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할머니는 ‘막둥이’를 업고 다니며 따뜻한 도시락을 해먹였다. 영화 간판쟁이를 가장 존경하며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에게 할머니는 사쿠라 크레용과 미군부대에서 나온 상품 카탈로그를 대주면서 어린 손자를 일찌기 오브제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 대구의 경북문화센터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의 지극정성 덕택이었다. 그 소년은 서른세살 뉴욕에 정착해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조각했다.
-이 전시가 왜 특별한가.
“뮤지엄처럼 정리된 공간에서 학예사들이 요구하는 뮤지엄의 품위에 맞는 전시보다 ‘인비지블 독’처럼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더스트리얼 공간에서 하는 것이 내겐 훨씬 잘 맞는다. 내가 가장 평소에 꿈꾸어오던, 자유롭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 내가 가장 아껴온 ‘굿모닝 아메리카’를 비롯, 바이올린첼로 작품 5∼6점 그리고 신작까지 내 뉴욕인생 30년이 모두 담긴 작품 100여점이 전시된다. 오프닝엔 프랑스문화원의 위임으로 감독 마리에 로지에르가 한달간 찍은 다큐멘터리도 상영된다.”
-반응이 어떤가.
“놀랍다. 어떤 미술 관계자가 오프닝에서 한 벽에 걸린 작품들(70∼80여점)을 통째로 살 수 있냐고 물었다. 너무 당황했다.”
-‘굿모닝 아메리카’는 샤넬 No.5를 들고 있는 한 인디언원주민과 이들의 기념촬영 작품이다.
특히 애착이 간다고 했는데, 이유는.
“코코 샤넬의 회장이 찾아와서 사겠다고도 했는데, 안팔았다. 10년도 전에 이혼 후 한달 동안 자동차로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등 사막만 돌아다녔다. 너무 아름다워서 죽고 싶었다. 거기서 인디언 원주민들을 만나서 며칠 합숙도 했다. 사막에 카지노를 만들어 종족간에 이간질했다. 인디언은 나의 모습과도 같았다. 돌아와서 그들에 대한 작품을 구상했다.
벼룩시장과 중고서점에서 자료를 사서 모은 후 샤넬 No.5를 들고 있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그렸다. 인디언만은 항상 내 옆에 있어준다. 분노한 얼굴이었지만, 내게 대한 순수한 마음을 봤다. 내가 미국에 와서 침략자들보다 원주민들에게 대접을 가장 잘 받았다. 인디언 기분으로 살아온 것 같다. 언어장벽으로 이 사회에서 내가 작게 느껴지지만, 인디언들은 정말 ‘큰’민족이다.”
-반미의식이 담긴 미군 비행장을 그려 제 1회 동아일보 미술대전 대상을 받았다.
“지미 카터가 철수한 미군 기지는 엉망이었고 우리 땅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예쁜’ 거지가 되고 말았다. 정부와 미국이 너무 무책임하게 혼혈아들을 벼려놓아서 분노했다. 그 모든 것이 담긴 것이 내 작품이었다. 난 극사실주의와 민중미술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그후 민중미술이 나왔다.”
-그런데, 미국으로 망명했다.
“70년대 후반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대건고교의 미술교사로 일했다. 난 당시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나는 머리를 기르고 다녔고, 개방적인 학교 측에선 나를 ‘자유’의 상징으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정부가 내 머리를 단속하더라. 장발 남자, 미니스커트 여자들을 잡아갔고, 경찰서에서 가위로 머리를 자르던 시대다. 경찰차를 기다릴 때 제자들이 와서 인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다. 동아미전 대상받으니 북한 방송에서도 날 ‘반미제국주의의 영웅’시했다. 난 ‘반골’이 아니라 ‘애국자’다. 예술가들이 살면서 부조리하고 불편한 것에 대해 표현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왜 미국이었나.
“어려서 할머니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재료를 구해주셨다. 미군 PX에서 나온 제품 카탈로그를 갖다주셔서 흥미진진하게 봤다. 당시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파리로 갔지만, 나는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앤드류 와이어스를 발견했다. 내가 젊었을 때 히피운동이 아름다웠고, 미국을 동경했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대건고교 주교의 부친이 박 정권 때 국회의장이었다. 그분이 사인해줘서 비자가 바로 나와 미국으로 온 것이다.”
-야반도주하던 기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바로 김포공항이었을 것이다. 공항에서 아내의 얼굴은 짓궂은 날씨처럼 울그락푸르락했고 두 딸을 위해서 그 때 나는 작가가 되어 다시 만나겠다고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뉴욕에 정착하기는 어땠나.
“사고무친인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변종화 국선심사위원장이 추천해준 화가 김원숙씨와 스티븐 린튼(유진벨재단) 부부가 나왔다. 그들이 사는 워싱턴브리지 인근에서 며칠 지냈다. 이후 한인타운인 플러싱의 독거노인 집에 룸메이트로 살았는데, 깜깜한 집에서 돈을 아끼려하셨는지 물과 불을 쓰는 것을 감시하더라. 그런 규제를 처음 받아봐서 그 노인이 너무 무서워졌다. 그래서 바로 나왔다. 영어도 못하고, 지하철 타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아침 일찍 플러싱에서 물어물어 김원숙씨 집에 돌아갔더니, 한밤 중이었다. 11시간 걸렸다. 벨을 누르니 김원숙씨, 파김치가 된 날 보고 놀라더라.”
-할렘에서도 살았다.
“당시 할렘이 범죄도 많고, 무시무시할 때였는데 곧 김원숙씨네가 할렘에 싸게 집을 샀다. 건축일을 도와주면서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할렐루야!’였다. 이렇게 뉴욕생활이 시작됐다. 난 군복에 선글래스를 쓰고 굳은 얼굴로 다녔는데, 내가 험상궂게 보여서 무서웠는지 흑인들이 건드리지도 않더라.”
마르셀 뒤샹과 붙어볼까
한대수씨와 변종곤씨.
중앙대학교 미대 재학시절 변씨는 자신의 그림에 손을 댄 교수에 저항해 강의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으며 군대에서도 미대 출신이라고 도표만 그리게 하자 이에 저항해 죽도록 맞아 앰뷸런스에 실려갔다.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다.
-뉴욕에서 포크싱어 한대수씨와도 교제했다.
“유명한 행위예술가 정찬승씨가 ‘너와 비슷한 놈 있으니 만나보라’해서 ‘물 좀 주소’의 한대수를 맞났는데, 너무 잘맞아 첫날 밤 대수네 집에서 잤다. 둘도 장발에 ‘자유인’이라는 점도 잘 맞았다. 미국에서 공부했던 대수를 통해 미국문화를 이해했고, 식당에서 일했던 대수가 요리를 잘해서 난 건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느날 대수가 ‘네가 뭐가 잘 나서 일 안하냐! 나도 사진관에서 일하는데, 한 푼도 없는 놈이 그림만 그리다 죽을래! 왜 똥고집이냐’고 질타했다. 난 영어도 못하고, 영주권도 없어서 막노동 하며 몸 망가지고, 붓을 놓으면 난 영영 그림 못그린다고 대응했다. 난 인격적으로 모독당한 것 같아서 한동안 대수를 만나지 않았다.”
-그림은 잘 그려지든가.
“물감 살 돈이 없어서 거리로 나가 버려진 물건을 주우러 다녔다. 당시 한국은 연탄조차 버리지 않을 정도로 버리지 않았다. 어릴 적 할머니가 가져다준 카탈로그 생각이 났다. 거리에 쓰레기통에 버려진 물건들을 집으로 갖고와 TV, 라디오고, 냉장고 문짝 등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물건이 사람을 닮았더라. 너무나 외롭던 시절이었다. 오브제를 보니 붙여보게 됐고, 그래서 아상블라쥬가 나온 것이다.”
-마르셸 뒤샹을 추종한 것인가.
“한국에서 미대와 대학원까지 다녔는데, 뒤샹까지 나오진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고등학교 때 알게된 평생 메인주에 살다가 최근 사망한 앤드류 와이어스였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내 인생의 문을 활짝 열었고, 나의 멘토였다. 철수한 미군 비행장은 와이어스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 뉴욕에 와서 초기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마르셸 뒤샹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외로워서 시작한 아상블라쥬 작업이었는데, 뒤샹은 내 작업의 열쇠(Key)를 주었다. 나는 난 내 나름의 조형이 있었다. 내겐 이야기가 많았는데, 뒤샹은 심플했다. 뒤샹과 다다 등은 산업사회와 전쟁 등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표현했다. 동양철학이 느껴져서 내가 동양인인 것이 자랑스럽고, 한번 붙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앤드류 와이스, ‘크리스티나의 세계'(1948), MoMA 소장
-뉴욕에서도 미술공부를 했나.
“가져온 돈을 비자를 받으려고 학비에 투자했다. 카네기홀 근처 아트스튜던트리그에 3년 다녔다. 교통비를 아끼려고 할렘에서 57가까지 매일 걸어서 다녔다. 리 스미스라는 교수가 늘 ‘네가 나의 선생이야’하더니 은퇴하면서 날 교수로 추천하겠다고 했다.”
-패셔니스타처럼 입고 다닌다.
“학교에 ‘유명한 젊은 작가’가 왔다는 소문이 났고, 신발도 반짝반짝 닦고 다녔다. 인근 줄리아드에 유학을 보낸 한인 여성들이 취미로 그림 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러나, 건강을 못 속이지 않나. 어느 날 커피를 마시다가 빈혈로 그만 쓰러졌다. 나중에 정신을 찾고, 집에 돌아오니 옷 안에서 300불이 나오더라. ‘선생님, 힘 내십시요’라는 쪽지가 있었다. 누가, 아니면 여러명이 돈을 모아 줬는지 알 수 없었다.
난 내가 너무 초라해서 견딜 수 없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돈을 돌려주려니, 모두들 거부하더라. 난 거의 울다시피하며 책상 위에 돈을 놓고 나온 후 학교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일자리를 찾기로 했다.”
운명의 수레바퀴
-어떤 일이었나.
“서른세살에 영어를 못하니, 생선가게에 일자리가 났다. 개미는 안보여서 밟아 죽인다하지만, 산 생선 목자르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일이 끝난 후 양 손엔 칼자국이 난무했고, 늘 붕대를 감고 다녔다. 백인 주인은 긴 머리에 생선을 엉망으로 자르고 비늘도 못치니 한심해했다. 그래도 쫓아내지는 못하더라.
이윽고 자살까지 생각하게 됐고,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내가 그린 목욕탕 그림을 앞에 걸어두고 늘 봤다. 어느 날 가게 주인이 생선 배달을 시켰는데, 배달 후 고객이 쿼터(25센트)를 팁으로 주더라. 그 순간 ‘난 반드시 성공할꺼야’하는 투지가 생겼다. 그러나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난 것이다.”
-누구였나.
“어느 날 고객이 ‘저 그림 누가 그렸냐’고 물었다. 나라고 하니, 그가 당장 옷을 벗고 나오라고 하더라. 브롱스 리버데일갤러리의 헬무트 지즈위츠인데, ‘널 살수 있게 해줄께’라고 해서 그만두었다. 주인은 문제 일꾼이 나가니깐 좋아하면서도, 화가라니깐 놀라고도,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다음 날부터 그의 화랑과 프레임숍에 드나들며 앞길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림을 가져와 보라’해서 언더우드 타자기 확대해 그린 그림을 가져갔다.”
-반응은.
“놀라더라. ‘한국이란 나라를 잘 모르지만, 미국에도 이런 아이디어로 이렇게 잘 그리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며칠 후 헬무트가 내게 두꺼운 봉투를 주었다. 현금 3만불이 들어있었다. 그림 판 돈이라고 했다. 헬무트가 ‘이 돈으로 미국 생활을 새로 시작하라’면서. 25년 전 그 돈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바로 리버데일의 지하 스튜디오로 이사했더니, 한대수와 당시 고급 백화점 버그도프굿맨의 인테리어디자이너였던 부인이 와서 ‘너무 기뻐하며 네게 잘 보여야 우리도 집 살 수 있겠네’하며 인테리어를 해주었다. 그 후로 물감도 사고, 뮤지엄을 돌고 작가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리버데일 신문에 ‘미국을 새로운 눈으로 본다’는 제목으로 전면에 인터뷰가 나왔고, 한국에선 ‘사라졌던 변종곤, 미국에서 성공하다’며 소개됐다.”
변종곤식 변증법
변씨는 뉴욕에선 물론 해외 여행 중에서도 골동품가게, 벼룩시장, 중고서점을 꼭 들른다. 수명이 다한 폐기물 부서진 물건 조각 등 무엇이든 그의 눈에 포착되어 그의 스튜디오로 ‘초대’되면 폐기물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곤 한다.
전혀 다른 카르마를 지닌 A와 B는 변씨의 스튜디오에서 C로 태어난다. 모나리자는 성녀에서 창녀로 둔갑하고, ‘최후의 만찬’은 평범한 식당의 ‘오늘의 스페셜’ 메뉴 간판으로 바뀐다. 마릴린 먼로는 미니 선풍기 앞에서 치맛바람을 날리고 있다. 이런 아상블라쥬는 바로 ‘변종곤식 변증법’이다.
-아상블라쥬 속에도 극 사실주의가 있나.
“나의 무기는 사실주의다. 역사적으로 사실주의는 지속되어왔기에 난 어디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꼭 지킨다. 사각 캔버스가 감옥같아서, 바이올린과 첼로로 돌렸다. 이혼 후 혼자 살면서 바이올린을 보니 여성같은 느낌이 있고, 편안했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그런데, 의외로 바이올린에 장식성이 있어서 고가품이라 유명인사, 재벌층에 잘 팔렸다. 딸 시집갈 때 선물로 준다고 들었다. 한 10년간 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서 돈은 됐지만, 중단했다.”
-별명이 왜 ‘도루코’인가.
“교사 시절 학생들이 지어줬다. 애들이 누드를 옆 눈길로 보길래 누드화를 보여주며 개방적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학생은 심하게 혼줄을 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우리 나라에 희망이 없다. ‘도루코 지나간다’하면 아이들이 조용했다.”
–30주년 개인전을 기점으로 작품에 변화가 있었나.
"그동안 모아 두었던 오브제들을 다시 펼쳐서 그것들로 보다 새로운 조형과 컨셉으로 폭넓은 작업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작품 성향과 생활에 변화는.
"2007년 부터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면서 나의 세대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문화의 충격과 충돌 속에서 지금 이 시대의 현대미술의 행로와 다양한 방법과 시도에 대해 많은 제시들이 있었으며, 그것이 나의 시야의 폭을 확장시켜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나의 주장만 가지고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넘어와 타인의 세계에 대해 보다 관대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와이프가 믿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짐을 감사한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자기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건강을 지켜야 한다. 난 잡기를 못한다. 낚시, 바둑, 화투, 당구, 골프 등 손에 대본 적이 없다.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체질에 맞지 않아 못 마신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다. 다른 장기는 쉽게 갈고, 없이 살 수 있어도 눈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최근에 눈을 다쳤었는데, 눈이 없으면 작업을 연장할 수 없고, 눈을 통해 많은 것을 크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음 계획은.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의 연속으로 꾸준히 해나갈 것이고, 동양의 전통적인 조형에 관심을 가지며 더욱 심도있게 다루어 볼 예정이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갤러리 측에서의 러브콜이 있어서 가을에 만남 후 전시여부를 결정할 것 같다."
☞ChongGonByun
대구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와 계명대학교 대학원
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978년 철수한 미국 비행장
을 그린 회화로 제1회 동아미술상 대상을 수상했다.
1981년 도미한 후 벼룩시장과 골동품점 등지에서
구입한 오브제와 극사실주의적 그림으로 매치시킨
아상블라지로 주목을 받아왔다.
2005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25년
뉴욕생활 하이라이트를 모은 개인전
‘내추럴 신디사이저’를 열었다.
– 박숙희 문화전문기자 Aug 17, 2013
출처 <==
교포아줌마
23/01/2015 at 15:20
이런 작가가 있었네요.
인터뷰가 작품세계나 철학 보다 살아온 인생 역정과 경제적인 면에 중점을 두었군요.
비슷한 배경과 약력의 화가로 최동열이 있어요.
작품은 아주 다르지만요.
잘 읽었습니다.
참나무.
23/01/2015 at 21:56
교아님 좀 긴 답글 올렸어요
최동열 작가도 공부해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시다니…정말 고맙습니다…^^*
참나무.
26/02/2015 at 12:42
교아님 정리할 게 있어서 이칸에 왔다가…
최동열 화백 이제사 찾아봤네요
다시 감사드려요~~
http://rokmarineboy.tistory.com/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