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탄은(灘隱) 이정(李霆) 과 삼청첩(三淸帖)


<삼청첩> 앞 표지 ⓒ간송문화전

탄은(灘隱) 이정(李霆)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태어난 왕실출신 문인화가입니다. 30대부터 묵죽화로 명성을 떨쳤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을 맞아 팔에 큰 부상입었습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시련을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고 필생의 역작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청첩(三淸帖)》입니다.

《삼청첩》은 41세가 되던 1594년 12월 12일에 별서가 있던 충남 공주의 월선정(月先亭)에서 대나무 그림 12면, 대나무과 난이 어우러진 그림 1면, 매화 그림 4면, 난 그림 3면을 그린 뒤, 21수의 자작시를 덧붙여 꾸며낸 일종의 시화첩(詩畵帖)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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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죽(筍竹: 죽순과 대나무)이정(李霆, 1554-1626) 흑견금니 25.5×39.3cm 《삼청첩(三淸帖)》

<순죽>은 《삼청첩》에 들어 있는 작품 중 대나무의 생장 과정을 집약하여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의 요체는 정밀한 사생성입니다. 잎맥의 느낌까지 섬세하게 살려낸 죽순, 땅에 떨어진 죽순 껍질,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싱싱한 댓잎들, 땅속줄기의 마디까지, 형태와 세부묘사가 매우 정교하고 생생합니다. 대나무를 곁에 두고 늘 관찰하고 직접 그려보지 않았다면, 이런 사생력을 얻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정이 자신의 별서인 공주 월선정 주위에 천 그루의 대나무를 둘러놓은 이유를 알 듯합니다.

대나무 그림은 예로부터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그려야 좋은 그림이 된다고 합니다. 중국 원나라 이후부터 금과옥조처럼 내려온 말이니, 이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나무를 쳐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며, 그림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회화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서예성과 회화성의 조화야말로 대나무 그림의 성패를 가늠하는 주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정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 순죽은 그 산물이며,가장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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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죽(枯竹: 마른 대나무) 이정(李霆, 1554-1626) 흑견금니 25.5×39.3cm 《삼청첩(三淸帖)》

《삼청첩》의 그림들 중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마른 댓가지가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향하며 화면을 양분하는 대각선 구도에 아래에서 윗쪽으로 늘씬하게 뽑아낸 대 줄기가 상승감을 고조시킵니다. 앙상한 큰 줄기는 물론 작은 줄기들의 묘사도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또한 수묵이 아닌 금니로 그려 효과는 반감되었지만, 마른 붓질로 드러낸 비백(飛白)은 고죽이 주는 소산한 느낌을 배가시킵니다. 다가올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 잎을 떨궈낸 마른 대나무를 지칭하는 고죽의 형상과 느낌이 실감나게 전해집니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관서(款書)가 있어 이정이 41세가 되던 해인 1594년 12월에 충청도 공주에서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5방의 인장이 찍혀있는데, 그 내용은 ‘탄은(灘隱)’? ‘석양정정(石陽正霆)’ ?‘중섭(仲燮)’으로 모두 이정의 호(號)? 봉호(封號)? 자(字)를 새긴 것입니다. 나머지 2방의 인문은 ‘의속(醫俗)’과 ‘수분운격(水分雲隔)’입니다. ‘의속’은 속된 것을 고친다는 의미로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7-1101)이 ?녹균헌(綠筠軒)?이란 글에서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 사람이 여위면 오히려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그 병은 고칠 수 없다.(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라는 내용을 축약했습니다. 물이 나누고 구름이 막는다는 의미인 ‘수분운격’은 두보의 시 ?취증설도봉(醉贈薛道封)?중 한 구절입니다. 자연을 벗 삼아 은일하며 지내는 자신의 생활모습을 집약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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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죽(風竹: 바람에 맞선 대) 이정(李霆, 1554-1626) 견본수묵 127.5×71.5cm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이정의 묵죽 중에서도 백미로 꼽힐만한 작품입니다. 비록 기년(記年)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정 묵죽화의 특장이 원숙하게 베풀어져 있어 만년기에 쳐낸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 제일의 묵죽화가가 그려낸 최고의 수작이니, 우리나라 최고의 묵죽화라 하여도 지나친 찬사가 아닐 것입니다.

거친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대나무 네 그루가 휘몰아치는 강풍을 맞고 있습니다. 뒤쪽 세 그루 대는 이내 찢게 나갈 듯 요동치지만, 전면의 한 복판에 자리한 한 그루의 대나무는 댓잎만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는 탄력있게 휘어지며 바람에 당당히 맞서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그림자처럼 옅은 먹으로 처리한 후면의 대나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센 바람의 강도를 느끼게 하는 한편, 주인공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조연들입니다. 바위나 흙의 간결한 묘사도 다소 투박하고 서툴게 보일지 모르지만, 대나무에 시선을 모아 집중도를 흩트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화폭 전체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정중동(靜中動)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엄정하고 강렬하여 숨이 멎을 듯합니다.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집니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 본래의 의미와 미감을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정이 이 같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요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천부의 자질과 부단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왕손이자 조선의 선비로서 흐트러짐 없이 격변의 시대를 당당하게 걸어갔던 올곧은 삶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정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 나갈 뻔한 시련을 겪었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풍죽>에서 흐르는 고고함과 강인함은 그저 붓끝의 기교로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탄은(灘隱) 이정(李霆) 과 삼청첩(三淸帖)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태어난 왕실출신 문인이다. 그는 30대부터 묵죽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나갈 뻔한 고초를 겪게 된다. 자칫 그림을 다시는 그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러나 탄은은 강인한 의지로 이를 이겨내고, 후대에 길이 남을 필생의 역작을 기획한다. 자신의 건재함을 만방에 알리고, 국난을 맞아 군자의 기상이 담은 그림을 그려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그는 칼에 맞선 붓의 힘을 믿었고, 문예로 전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전란 중임에도 최고가의 재료인 먹물을 들인 비단에 금으로 대나무와 매화, 난을 그렸다. 그리고 우국충절을 담은 자작시를 함께 엮어 시화첩(詩畵帖)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바로 ≪삼청첩≫이다.

탄은의 뜻에 공감한 많은 지우(知友)들이 동참한다.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과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6)에게 서문(序文)과 글씨를 맡았고,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시를 지어 찬탄했다. 모두 당대 문예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인물들이다. 《삼청첩》은 당시 문인묵객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유근(柳根,1549-1627), 이안눌(李安訥,1571-1637), 유몽인(柳夢寅, 1559-1623) 등과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앞 다투어 글을 보태니, ≪삼청첩≫의 성가는 더욱 높아져 갔다. 그야말로 ‘일대교유지사(一代交遊之士)’가 동참하여 만들어낸 ‘일세지보(一世之寶)’였던 것이다.

이처럼 ≪삼청첩≫은 탄은 개인의 작품을 넘어 당대 최고의 성가를 지닌 시서화의 대가들이 예술적 성취가 한 자리에 모인 종합예술품이며, 조선중기 문예의 지향과 역량이 집약된 기념비적 작품이다. ≪삼청첩≫을 조선중기 문예의 정화로 부르는 까닭이다.

≪삼청첩≫은 이후 선조의 부마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에게 건네졌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때에 소실될 위기를 겪는다. 현재까지도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호란이 끝나고 홍주원은 선조의 또 다른 부마였던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1582-1657)의 도움으로 훼손된 일부 제발문(題跋文)들을 복원하였고, 이후 홍주원의 후손들에 의해 7대를 이어가며 가보로 전해진다.

그러나 ≪삼청첩≫은 조선말기 외세침탈의 와중에서 일진함(日進艦) 함장으로 조선에 온 쯔보이코우소(坪井航三, 1843-1898)에게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다행히도 일제시기 심혈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수호했던 간송이 이를 되찾아 왔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수장되어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삼청첩≫은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자긍과 자부의 상징물로 오래도록 전해져 왔다.

<설죽도〉이정, 견본수묵, 30.3 X 35.5cm, 간송미술관 소장

탄은 이정은 조선 묵죽화풍을 정립한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다. ≪삼청첩≫ 은 현전하는 탄은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조선묵죽화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 묵죽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삼청첩≫의 가치와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삼청첩≫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침탈로 이어지는 조선 역사의 굴곡과 극복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삼청첩≫은 미술품이 미적가치와 더불어 사료적 가치를 얼마나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삼청첩≫을 통해 우리 문화재의 본질을 재인식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삼청첩 최초 공개 :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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