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女人들’ – 프랑스여인들의 홀로코스트 피의 기록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 독일의 대량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가해자는 나치 독일이고, 피해자는 유대인, 그 중에서도 특히 남성이 그 대상이다. 물론 당연히 여성도 있다. 디큐멘터리나 문학작품 속에도 홀로코스트의 여성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게 더러 있다. 월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의 주인공인 소피도 그 가운데 한 피해자다. 그러나 어쨌든 홀로코스트는 일반적으로 그 피해자가 유대인이라는 등식으로 알려져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단어에도 그런 뜻이 명백하게 들어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의한 대량학살의 피해자가 어찌 유대인 뿐이겠는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던 유럽 각국의 인민들도 무수히 당했다. 특히 프랑스의 피해가 심했다. 프랑스는 특히 나치에 항거한 레지스탕스의 투쟁에 따른 피해가 엄청났다. 전쟁 중 반나치 투쟁으로 체포돼 나치의 수용소에 강제 감금됐다가 종전과 함께 송환한 레지스탕스의 수가 4만 여명에 달했으니, 돌아오지 못하고 수용소에서 죽은 레지스탕스의 수는 그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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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라인 무어헤드(Caroline Moorehead)가 쓴 ‘아우슈비츠의 여인들(원제; A Train in Winter)’은 이들 프랑스 레지스탕스들 가운데 어느 특정기간 나치 독일에 체포돼 같은 일시, 같은 열차를 타고 수용소에 감금돼 천신만고를 겪었던 프랑스 여성 레지스탕스 230명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다. 이 책은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유린과 대량학살이 유태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짓이 아니라 평범한 프랑스 여성들을 대상으로도 잔인하게 자행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 프랑스 여성 230명은 레지스탕스였지만, 모두가 평범한 아내였고 어머니였고 또 딸들이었다. 물론 정치적 성향은 있었다. 230명 중 113명이 공산당원이었다. 공산당원이었다고 해서 이념적으로 무슨 유별난 투쟁을 프랑스에서 벌인 것은 아니다. 당시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고조되었던 반파시즘의 정서를 공유하는 생활적 차원에서의 활동을 벌인 것인데,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가 점령되면서 적극적인 반나치 투쟁을 벌이다 체포된 여인들이다. 책에 나오는 이들의 레지스탕스 활동도 그렇다. 물론 작가인 무어헤드의 절제된 표현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들 프랑스 여인들의 투쟁에는 딱히 그 어떤 비분강개 등의 감정이 없는 듯이 읽혀진다. 그저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 평화를 추구하는 일상화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일견 평범함마저 느껴진다.

이들은 ‘31000’ 열차를 타고 같은 날 프랑스를 떠나 비르케나우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지옥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 생활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조르조 아감베의 다음의 이 한 말로 대체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시체들이 생산된다. 수감자들을 단순히 시체로 환원시키는 과정, 이 ‘시체의 제조’야 말로 나치 수용소의 핵심이었다.”

230명 가운데 대부분은 죽는다. 49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이 그 생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수용소의 프랑스 여자들은 현명했다. 처한 절망적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반드시 살아 남아 반인류적인 지옥같은 만행을 고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저마다 있었던 것 같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물론 ‘행운’도 따랐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남달랐을 측면도 있다. 프랑스 여자들은 수용소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칙을 정한다. 청결유지와 경계하기, 유머감각, 끈끈한 우애가 그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말도 안 되지만) 낙천적 기질과 다른 사람 잘 돌보는 기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행운아였다는 것과 특히 그들 사이의 ‘우애’가 자신들을 보호해 주었고, 극심했던 야만성을 견디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49명의 생존자는 과연 ‘생존자’였을까.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살아 돌아왔지만,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의미와 생각을 박탈당한 채 인간이하의 무존재로 떨어졌지만, 돌아와서도 그들은 여전히 그런 존재였다. 생존자들은 수용소에서 살아돌아 와 프랑스에서 다시 적응해야 했던 기간이 그들에게 오히려 더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는 얘기다. 그들은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들려주고 싶었고 참상을 온 세상에 고발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은 그들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질시의 눈초리로 그들을 대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실일리 없다”는 말들을 들어야 했다. 생존자의 한 명인 엘렌은 그런 질시의 말을 듣고 사흘 내내 울었다고 증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묘사할 수 있는 언어가 있는지 의심했고, 언어의 부재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는 이들의 부재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귀향은 비참하고 수치스러우며 비루한 일 투성이”였다고 한 생존자는 말하고 있다. 그녀는 “살아남아 돌아오기는 했지만 자신으로 살아남았다기 보다 비존재로서 세계속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는 그 악몽 같았던 수용소가 오히려 ‘편했던 곳’이라는 착각마저 갖게했을 것 이다. 수용소와 그곳에서의 생활은 이미 그들에게 ‘운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돌아왔어도 수용소가 마치 자신들과 함께 돌아온 것처럼 느꼈다. 그들의 곁에는 항상 수용소의 풍경이 있었고, 그것은 마치 피부처럼 들러붙어 기분 나쁜 악취를 풍겼다. 그들에게 수용소는 결코 끝나지 않고 끝날 수 없는 과거였던 것이다. 그녀들이 그나마 어떤 기쁨을 느낄 때마다 이미 죽어버린 동료들이 유령과 수용소의 끈적이는 진흙이 스멀스멀 다가와 그 기쁨을 굴꺽 삼키고 더렵혔다. 끊임없이 악몽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여성들은 하나둘 씩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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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49명의 생존자들 가운데 2008년까지 일곱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무어헤드는 이들을 일일이 만나 증언을 들었고 취재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다른 생존자들의 가족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프랑스 여성들의 피의 기록인 셈이다. 홀로코스트의 피해는 이처럼 모질고 끈질긴 운명 같은 것이다. ‘소피의 선택’에서 소피도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를 광기속에서 받아 준 정신병자 네이단과 함께 자살을 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프랑스의 이들 생존 여성들 운명도 이 소설의 맥락처럼 비극적이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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