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국회도서관 대학’
가방끈이 그리 길지 않다. 대학만 나오면 그래도 그 게 어딘가 하던 시절에 거기까지는 어쨌든 다니기는 했지만, 그 후로 그 이상의 학교 문턱은 가보지도 못했다. 직장 생활하면서도 그 정도면 나에게는 마츰 맞는 것이고 오히려 공부라는 측면에서는 과분하다는 느낌도 가져 보았다. 물론 가방끈과 관련해 좀 아쉬웠던 적은 있다. 나이가 좀 든 후 하던 일을 바탕으로 어디 학교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학원을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좌절된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러려니 여겼고 졸업장 하나 어찌어찌 해서 받으려는 등의 무리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세월 이런 세월 다 지난 이즈음 ‘학교’를 나가고 있다.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다. 아침 밥 일찍 먹고 가방 챙겨 거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간다. 이 학교의 그레이드를 어떤 수준으로 해야 할까. 대학원을 못 다닌 만큼 대학원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그 건 좀 허세인 것 같아 그저 나의 딱 가방끈 수준인 대학으로 여긴다.
그 대학이 어딘가. 바로 여의도에 있는 국회도서관이다. 도서관을 대학이라고 하니 마치 이곳에 가르치는 교수들도 있는 것 처럼 들리겠지만 당연히 교수는 없다. 혼자서 읽고 공부하고 글쓰기를 한다. 처음부터 그럴 요량으로 다닌 것은 아니다. 하루 이틀 다니면서 스스로 뭔가 자신에 대한 나름의 어떤 강제감을 갖자고 해서 붙여본 것이다. 하기야 뭐 대학이 별 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 그곳이 대학 아니겠는가.
그러고보니 사회에 나와 이 대학 말고 또 한 때 섭렵한 대학이 있다. 광화문 ‘교보문고 대학’이다. 여기는 2000년대 초반 광화문을 제 집 드나들듯 하다 나 스스로 ‘등록’한 곳이다. 지금은 어떻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곳에는 책을 볼 수 있도록 하는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 껏 읽는다. 짬짬이 짜투리 시간을 내어 읽다가 재미에 빠져 나중에는 하루 종일을 죽치기도 하면서 한 일년을 보냈다. 솔제니친이나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에 빠져든 게 그 곳이다. 교보문고를 떠 올리니 문득 배고프면 끼니를 해결하던 곳 이름이 생각난다. ‘멜로디스’였을 것인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국회도서관 대학은 교보문고 대학보다 당연히 크다. 책이 많기 때문인데, 그 많은 책이 바로 교수이고 선생이다. 이곳에서 하는 공부는 자유스럽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을 수도 있고, 무작위적으로 집혀지는 책도 관심이 들면 본다.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다 지겨우면 잠도 잘 수 있다. 하시로 배를 채울 곳도 있고, 잘 가꿔진, 자연스런 풍광의 정원도 있다. 교직원 역할을 하는 상냥한 직원들도 있다. 여러 측면에서 우리나라 유수의 대학에 견줘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곳을 학교로 여기고 나오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다. 걔중에는 좀 오래 다니다 보면 안면이 익어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 중의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한 분은 나보다 선배다. 그 분의 자리는 일층 메인 홀에 고정돼 있는데, 항상 그 자리다. 나보다 항상 먼저 등교하고 나보다 늦게 하교 한다. 가끔 정원을 산책하는 것 외에는 붙박이 처럼 앉아서 책을 본다. 언젠가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보는가 싶어 지나치면서 살짝 엿보았더니 야마오카 소오하치의 ‘대망’이었다.
한 여학생 할머니는 이층의 붙박이다. 복도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항상 책이나 신문 등을 겨드랑이에 낀 모습이다. 이 분은 시사에 관심이 많은지 디지털 미디어 전광판에서 신문 검색하는 모습이 잘 눈에 띈다. 젊은 아가씨 학생도 있다. 무슨 글을 쓰는지 항상 글을 쓴다. 내 곁의 어떤 분은 책은 잘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뭘 쓰는 것도 아니다. 이 분은 노트북으로 게임을 즐긴다. 이처럼 각양갹색 학생들의 모습이다.
내 자리는 대개는 이층이다. 사회. 자연.인문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 방의 한 자리인데, 나의 고정석이 아니다. 자리가 좋아 조금 늦게 오면 먼저 온 사람의 차지가 되어있다. 최소한 아침 9시 이전에 도착해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경쟁이 높다. 그 경쟁에 스트레스가 좀 생겨 얼마 전에는 3층으로 옮겼더니 이곳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한번 잡은 외진 자리가 좋아 그 다음 날 갔더니 이미 남의 차지다. 그렇다고 다른 자리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좋다. 그리고 붐비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 가더라도 자리 못 잡을 일은 없다.
근자에 나는 이 대학에서 조선 역사를 다시 대하고 있다. 정도전을 읽었고, 지금은 정조시대를 그리고 있는 ‘자저실기’를 보고 있다. 재미가 솔솔하다. 저녁 무렵이면 ‘티벳 사자의 서’도 함께 읽고 있다. 좀 무겁다.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이 좀 많아진다. 하지만 내일 아침은 말짱해질 것이다. 다니는 대학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