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病相憐

한 친구가 있다. 고향에서 같이 자랐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고등학교를 외지로 나가는 바람에 그 때 이후로 보는 기회가 적었던 친구다. 이즈음에 어쩌다 자주 본다. 오랜 공직생활을 접고 이제는 남해와 서울을 오가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친구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표현에 특별히 강조점을 주고자 한다. 친구는 원래 그런 류가 아니었다. 어릴 적 학교 다닐 때부터 엄한 집안의 장남답게 과묵하고 공부 잘 하고 매사에 빈틈이 거의 없는 ‘범생’이었다. 게다가 고위공직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의 이미지는 그런 것으로 굳혀져 있었다.
친구는 지난 해 상처를 했다. 그 과정은 잘 안다. 친구는 병든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해에 따로 전원풍의 거처를 마련한 것도 아내 때문이다. 투병이 5년을 넘겨가던 지난 해 초인가 친구들과 한번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은 얼굴이 아니었다. 초췌하기도 했지만 폭삭 늙어 있었다. 그런 아내를, 친구는 지난 해 여름인가 떠나 보냈다. 그 슬픔과 아쉬움이 어땠을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겠다.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그 친구에 대한 말은 가급적 삼갔다. 그리고 조심스러웠다. 하루라도 빨리 그런 상태를 털털 털고 일어나 우리들의 세계로 다시 오기를 바랬다.
그랬던 친구가 지금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속 사정을 모르는 주제에 이런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만나고, 얘기를 나눠보기에는 그렇다.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도 친구의 그런 모습에 무척들 안도하고 있다. 친구는 전보다, 아니 원래의 그보다 밝아졌다. 얼굴도 좋아졌다. 과장을 좀 보탠다면 안팍이 명랑하고 건강해졌다고나 해야할까. 북한산을 가는 산행모임에도 자주 나온다. 어눌하면서도 과언이었던 말도 전에 비해 활기스럽고 많아졌다. 분명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이다. 그걸 우리들이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친구가 전에 없이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그저 좋을 뿐이다.
친구는 옛날 노래를 좋아한다. 얼마 전 둘이 노래방에 가서는 목이 터져라 옛날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는 옛날 일본 노래를 좀 보내달라기에 이시카와 사유리가 부른 일본 엔카 몇 곳을 카톡으로 보냈더니 좋아했다. 그 ‘덕분’으로 조니워커 블랙 한 병을 나에게 안겼다. 친구는 남해 집을 처분하고 서울에 정착할 작정으로 남해를 자주 오르 내리고 있다.
렇게 살아가는 그 친구에 비해 내가 왜소하고 찌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생의 장정으로 보아, 슬프고 안타까운 한 점을 먼저 찍은 그 친구가 나에게는 이를테면 인생의 선배인 셈이라서 그럴까, 지금은 어찌됐든 멀쩡하게 잘 사는 그 친구를 한번 콕 찔러보고자 하는 짓궂은(?) 마음이 들 때가 가끔씩 생기는 것이다. 친구로부터 듣고싶은 얘기가 하나 있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그 심정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은 것이고, 그 연장선에서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지금처럼 그렇게 훌훌 털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짓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술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슬쩍 그런 투로 말을 꺼냈다. 돌아온 반응은 별 쓸데없는 것을 다 물어보는구나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면서 넌지시 내비친 표정에는 “나이 먹어봐라”는 말투가 담겨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월이 흐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먹으며 함께 흘러가는 세월이 모든 슬픔과 아픈 기억을 잊게하는, 이를테면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이 약’이라는 의미로 던진 말인지 모르겠다. 별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그렇다면 좀 그렇다. 아내 떠난지 이제 2년 째 접어들었는데, 그 세월에 나이를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다는 것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퍼뜩 이런 생각이 든 것은 그 얼마 후다. 세월이 모질면 2년이 20년도 되고 30년도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친구는 2년을 그 몇 배, 몇 십 배처럼 살아왔다는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생물학적인 지금의 나이는 말 그대로 산술적 헤아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친구에게 이런 짓궂은 짓을 한 나를 지금에사 돌이켜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친구가 처한 아픔을 통해 뭔가 나를 반추하고 확인해보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경우야 다르지만, 상처와 아픔이 나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하는 생각에서다. 나도 지난 몇 년이 그랬다.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절대적 무력감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어떤가. 속이야 어찌됐을 지언정 겉으로는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산에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고 술도 잘 마신다. 주어지는 일도 딴에는 열심히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이즈음의 여러 상황에서 그 친구를 통해 느끼고 있는 것은, 나 또한 결국 모든 것을 시간과 세월, 그리고 그에따라 더해지는 연륜에 맡기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흐른 세월이 5년에서 6년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5-60년 세월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그런 세월 속에 내 나이도 그 쯤에서 헤아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점에서 그 친구와는 처지가 서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일컬어 동병상련이라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참 묘한 동병상련이다. 서로 보듬어주고 어루만져 주는 일만 남았다.

 

 

gi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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