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의 야성(野性)이 예전 같지는 않다. 등산객들이 몰리면서 훼손된 곳도 많아졌을 뿐더러, 안전을 고려한 탓에 여기 저기 안전장치를 하면서 야성이 많이 사라졌다. 예컨대 ‘숨은 벽’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슬랩에 로프가 걸쳐져있지 않았다. 그러니 줄을 잡지 않은 채 오르는 것이다. 슬랩 하단에서 기어 오르는 순간부터 호흡은 정지해야 한다. 숨을 한번 가다듬어려면 그 참새에 아득한 낭떠러지 때문에 겁을 먹게되고 이게 사고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로프를 설치한 것은 그로써 비롯될 안전사고를 고려한 탓이다. 안전은 물론 중요하다. 그 대신 ‘숨은 벽’에 야성이 사라졌다고들 아쉬워하는 산꾼들이 많다. 야성은 인성을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속박하기도 한다. 승가봉이나 문수봉, 또는 의상봉 오르는 것도 요즘은 쉽다. 예전에는 아주 힘든 코스였다. 잡고 오르는 쇠줄 같은 것도 없었다. 이 봉우리를 한 밤 중에 오르면서 오금을 저렸던 추억이 있다. 그 게 바꿔 말하면 북한산의 야성이 아니었나 싶다.
야성이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는 북한산이지만, 그래도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있다. 한 여름, 북한산의 물이다. 장마철 우기 때면 북한산은 물로 가득하다. 계곡을 휘감아 흐르는 물 줄기는 설악이나 지리산의 그것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 산성 쪽 원효계곡 쪽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은 오히려 더 강하고 세다. 북한산의 야성을 담뿍 담아 흐르는 물이다. 이 맘 때쯤 이른 아침이면 이 쪽으로 물 구경 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산의 잃어져가는 야성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들 중의 한 명이다. 매년, 이 무렵의 어느 날을 택해 물 구경을 한지 꽤 오래 됐다.
오늘이 그 날이다. 간 밤에 장대비가 내렸기에 기대를 해 본 날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코스는 매년 같다. 산성 입구 관리사무소 왼쪽 길로 오르면 원효계곡이다. 재수가 나쁘려다가 좋았다. 원효계곡 초입부터 출입금지였다. 무슨 공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발 길을 돌릴 없다.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 나 말고 서너 명이 출입금지 팻말 앞에 서서 서성거린다. 이른 아침이라 단속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갑시다”고 했다. 그 말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들 쳐 놓은 줄을 넘었다. 거리낌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모두들 북한산의 큰 물, 그리고 그 물에서 느껴볼 야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계곡의 초입부터 물 흐르는 소리가 진동을 한다. 산길도 흠뻑한 물길이나 다름없다. 하류 쪽인데도 물길이 포말을 일으키며 거세게 흘러 내린다. 좀 더 오르니 웅덩이 경사진 곳 마다가 모두 폭포다. 그 폭포들이 무리를 지어 물을 뿜어내는 게 장관이다. 얼마 올라가지 못해 몸은 땀과 물로 흠뻑 젖어들기 시작한다. 조금 더 오르니 우리들보다 먼저 오른 사람들이 저마다 젖은 채로 물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더러는 좀 더 물에 가까이 갈 요량으로 계단 길에서 벗어나 물 구경을 하고 있다. 계곡 초입에서 백운대, 대남문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로 오르는 계단까지, 한 1km가 북한산 물 구경의 하일라이트일 것이다.
삼거리에서부터 중흥사를 지나 대남문 쪽으로 붙어 대성암까지 오르기로 한 게 나의 계획이다. 거기까지 잡았던 것은 대성암 쪽으로 건너는 개천이 분명 범람해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예전의 경험이 바탕이다. 몇 년 전인가, 그 개천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돌린 적이 있다. 북한산의 야성을 그 경험 속에서 짜릿하게 맛 보았기 때문에, 오늘도 그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대는 빗나갔다. 그 개천은 예전과는 달랐다. 범람하지도 않았고, 개천이 아니라 그저 여느 도랑처럼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사고를 고려해 주변을 정리한 흔적이 뚜렷했다.
개천을 건너 대성암을 지나면 대남문이다. 그리고 그 길로 내려가면 구기동이다. 개천도 걸널 수 있어 내쳐 대남문까지 오르고 구기동으로 내려갈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늘, 북한산을 오른 것은 산행도 산행이지만, 북한산에 가득찬 물을 보러 온, 하여 그를 통해 북한산의 야성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온 길을 다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안개가 걷히고 희미한 햇볕이 났다. 북한산의 물은 그 볕 속에 도처에서 반짝거린다. 흐릿하지만 영롱한 반짝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