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내가고등학교시절의고향에대한추억을적어보고자한다.이번의추억여행은1960년대말의우리고향풍경이다.그곳은,우리가국민학교다닐때에가을소풍을구절산이라는곳으로매년봄가을로다녔고,구절산에올라동쪽으로보면넓고넓은소들강문이라고불리는벌판이널려있고,가을에는벼가익어노란물결이출렁이고,벌판끝으로는아산만과지금은담수호가되어버린삽교천갯고랑이길게뻗어있는곳이었다.삽교천은대원군의쇄국정책의빌미가되었던독일상인오페르트에의하여저질러졌던덕산의남연군(대원군아버지)묘의도굴사건의침로로이용되었던곳이기도하다.
먼저글에서도썼지만우리나라에서가장긴해안선을가지고있던우리고장은1979년10월26일삽교천방조제가완공되므로서점점해안선은짧아지기시작하였고,지금은3개의커다란방조제로둘러싸인고장이되고말았다.
삽교천방조제가완공이되던날우리나라현대사가또한번요동을치게된다.그것은박정희대통령의죽음가져온크나큰파장을말한다.나는일이있어서고향집에내려가있었다.10월27일새벽에나는막잠이깨어나자병환으로누워계신아버님이안방에서부르시는소리에따라안방을건너갔을때에마침라디오에서아침5시정각을알리고,김성진대변인이박대통령의유고를발표하는시점이었다.
삽교천방조제가완공됨에따라우리고장은커다란변화가오기시작하였는데,가장큰변화는서울이나,천안쪽으로나갈려면반드시거쳐야할예산지역을거치지않고바로갈수있다는점이었다.지금은서해안고속도로가생기면서또추억의삽교천방조제가되어버렸다.
삽교천방조제가완공됨에따라바닷물이드나들고,인천까지통통배가다니던고장이내수면으로으로바뀐동네이름은부장리이라하며,예당저수지물을가장끝에서쓴다하여속칭하리라불리는동네이다.오늘의주요이야기무대는그동네폐염전자리에세워진국민학교이다.지금은인터넷상으로검색하여보니폐교된학교라고나온다.
1968년에나의선친이부장국민학교로전근발령이나서학교사택으로우립집이이사가게되었다는소식을인천에서들었다.그래서우리는그곳에서3년여을살게되었다.고등학교를인천에서다니던나는어느봄날토요일늦게버스에서내려서캄캄한밤길을초행으로국민학교를찾아가는데,초행길이라그런지4Km남짖한거리가무척멀게느껴졌다.그길이라는것이완전히진흙투성이어서,운동화가다진흙투성이로되고겨우발을떼어서학교에도착하였다.그때에그곳에사시는분들의농담반진담반으로"마누라없이는살아도장화없이는못사는곳"이라고하셨고,온통들과길이개흙으로되어있어서봄이되면길이더욱엉망이되고는하였다.
밤늦게도착하여자고서아침에학교운동장을보니염전자리에세워진탓에소금이운동장위로나와서햇빛에반짝이고있었다.여름에는조그마한게들이운동장을돌아다니는진풍경도보이는전교6학급인조그마한국민학교이었다.그때에는아직전기가들어오지않아서수업시작과끝을헌산소통을매달아놓고쳐서알리었다.
그리고,그때의그곳에는주민들이식수로지하수(그때에는바닷물의영향으로물이소금기가있어서식수로부적합하였다)를이용하지못하여예당저수지에서내려오는물을집옆에웅덩이를파서저장하여놓고식수로도쓰고,그곳에빨래등을하였다.다행히학교는갯고랑건너에우물을파고파이프를설치하여물을끌어와서식수등으로사용하였다.그러나가끔사리때가되면갯고랑을가로지르는파이프를조수가끊어놓아서,그런때면멀리다른마을에가서통을가지고가서물을길어다가식수로사용하고는하였다.
그동네에남원포라는조그마한포구가있었다.그때를회상하여보면,무동력선(어선)등이정박하여있었고,정기적으로인천까지다니는여객선이있었다.본래는그지방에서많이나는쌀을인천으로실어나르는것이주목적이었으나,사람들도같이타고다니었다.그때에조수때를맞추어아침나절에출발하면인천까지거의하루종일걸리었다.그때에는아직연안부두가축조되기전이라인천역앞의부두에정박하였다.겨울에인천으로오다보면대부도와영흥도사이로지나게되는데,그때에조그마한배가여객선옆으로와서섬주민들이딴굴을몇초롱씩실어서인천으로내보내는것도목도하였다.
거의20년전에차로남원포에가보니포구이며배드날들던흔적은찾아볼수없고,삽교호로흐르는남원천의수로만보였다.거기에서몇몇분들이한가롭게낚시하는모습만보고왔다.
그곳에살때에포구에서어업을하시는부자간대화가생각이난다.어부인아들이갖잡아온싱싱한밴댕이를보고"그밴댕이참좋다"하니,그아버지가말씀하시길"밴댕이가아무리좋아야밴댕이일뿐"이라고하시던말씀이아직도귀에쟁쟁하다.그말씀은스러져가는포구앞에서옛날의흥청거렸던파시를생각하면서서글퍼서한말씀이라고생각한다.결국인천으로쌀을실어가는것으로명맥을유지하던남원포구도방조제가완공되므로서거대한담수호(삽교호)에같혀버려서역사속으로사라져버렸다.
그때에는그부근에서나는수산물이매우픙부하였다.썰물때에삽교천갯고랑으로나가면조개와소라등을망태기에들고올수없을정도로많이채취할수있었다.또한갯고랑에서어부들이그물을쳐서장어를많이잡는것도보고,그것을사서요리도하여먹었던기억이난다.가을에는널은벌판의논의물을거의다뺀다.그때에논끝과갯고랑이맞닿은곳에가면진흙펄속에붕어와망둥이가무척많았다.양동이만있으며손으로그냥물고기를잡아올수있었다.
그곳에는유일한산물이쌀이고,그쌀을도매로매각하려면도정공장(방앗간)에서수십가마씩벼를찧었다.그때에쌀의부산물로서싸래기가나오는데,그곳사람들은겨울에그것으로엿고아서하얗게켜서나누어먹는재미도있었다.그곳은넓은벌판으로되어있어서겨울에눈이오면,특히밤에는사방을구분하기어려웠다.우리어머님은겨울밤에어디를다녀오시다가눈길에서그만방향을잃어버려서한참을헤매셨다는이야기를들었다.
지금은그동네도길도다포장이되고,상수도,전기가다들어갔지만,그시절의불편과어려움을향수로간직한채고향을떠나온분들이그때의고향에대한생각에밤에뒤척이지않을까요.
나도다시금그곳남원포에서통통배를타고인천으로가는꿈을꾸어보고싶다.그리고그것이현실화된다면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