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新加坡)에 다시 와서/顯忠日 아침에

어제 밤비행기로 아내와  같이 싱가포르 딸네 집에 다시 왔다. 여기 오기전 한 3주동안은 아내와 같이 집안을 수리하느라고 정신없이 지내고, 대충 집안을 정리하고서는 외손주를 보러 다시 이곳에 온것이다. 외손주의 생일 선물로는 커다란  장난감 차세트와 외손주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아내가 만들고 그리고 우리가 먹을 음식과 식재료들을 가방 세개에 가득 싸가지고 왔다. 약 15일 정도있다가 나는 먼저 한국으로 가고, 아내는 좀 더 있으면서 외손주를 보아 줄 예정이다. 내가 먼저 가려는 이유는 집 베란다에 있는 각종 꽃나무들이 물이 말라서 죽을까 염려되어서이다. 지금 막 꽃대가 나오는 小葉風蘭등은 뒷베란다의 큰 대야에 물을 채우고서 옮겨 놓고 왔다.

이곳에 오고 보니 오늘이 顯忠日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사는 것은 우리할아버지 세대의 한일합방의 國恥와 일제치하의 압제와 고난, 그리고 우리 아버지 세대가 한국전쟁을 치루어 낸 대가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오늘은 단순히 국가 기념일 아닌 국가를 위하여 犧牲하시고 殉國하신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생각하고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 국기를 꼭 달아야하지만 집을 비워서 그러하지 못하여 부끄울뿐이다.

오늘 우리나라의 시대상을 보면  좀 잘 배우고, 權力도 있고, 돈도 많이 가지고 있고, 名譽도 있는 분들의 墮落을 보면, 이들의 타락의 공통점은 분수 이상으로 돈을 貪하였다는 것이다. 그 돈이 무슨 마술을 부리기에 조금더 많이 소유할려고 하다가 그 동안 쌓아 놓았던 명성과 자존심이 아주 개차반이 된 꼴이다. 그 무슨 염치로 낯을 들고 이 세상에 나와서 다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선대할아버지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속에서도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면서 나라의 독립과 후대를 교육시키기에 전력을 다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大韓帝國(朝鮮)이 망할 때에 양반이나 왕족 그리고 명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나라의 부흥을 위하여 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부상과 상민, 몰락한 양반출신 선비들이 고난을 자처하면서 이 나라를 위하여 온 몸을 던져서 노력하였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역사의 교훈을 잊는 민족은 다시 그 악순환에 빠지고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을 記憶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원하여 본다.

아내의 조부께서도 고향에서 일찌기 私塾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민종식등과 같이 의병활동을 하시고, 그리고 만주로 망명하시어 양기탁등과 같이 나라 독립과 후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고분분투하시는 중에도, 일본의 압제를 끝내기위하여 일본 총독부를 폭파 게획을 하시는 중에 被逮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영어 몸이 되었다가,  고향집에 가택 연금 형태로 일제 말을 보내시셨으며,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뒤에는 우리나라를 제대로 세워 보시려고 서북청년단을 이끌어 나가셨으며,  그 이후에는 노구를 이끌고 제헌의원 선거에도 나가시는 등 나라를 위하는 일념으로 평생을 보내셨는바, 한국전쟁중에 공산당에게 피체되어 심문을 받으시다가 작고를 하시었다.

SAM_1198

故 華山 南(宜寧)正 선생님 모습

지금은 비록 늦게나마 국가에서 그분의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시어 국가훈장도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모시어져 있다. 이분처럼 비록 누가 알아 주어서 아닌 나라를 찾아야겠다는 신념하나로 온 몸으로 헤쳐 나가신분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이만큼이나마 존재하고 유지되고, 굴러 가고 있음을 이 아침에 잊지 말았으면 하면서 나의 私的인 내력을 적어 보았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