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장편소설 ‘신탁의 밤’

폴오스터장편소설‘신탁의밤’열린책들,황보석옮김,317쪽,9500원

“세계는내머리속에있고,내몸은세계속에있다.”(오스터)
운명은우연(偶然)을먹고자란다.운명의침입으로얼룩진,사랑하는사람들의인생은대개의경우열정과비밀의구렁에내던져있다.불행하게도둘이외에중간지대는없다.우리는때로무작위적인우연의힘에저항하기도하고,때로는우리내면에잠복한미래의암시를염탐하기도한다.‘어쩌면그게글쓰기의전부인지도’모른다.(287쪽)
스승처럼친구처럼알고지내는선배작가가사실은아내의정부(情夫)였다는것을알게되는주인공시드니오어(SidneyOrr)는아직은크게성공하지못한,서른네살소설가다.아내인그레이스테베츠는‘어느주어진순간와닿는빛의강도와색조에따라색이변하는눈’을가진아름다운여인이다.그녀는출판사의미술부에서디자이너로일하고있다.
성공한선배작가존트로즈는이들부부와서로가족이상으로친밀하게지내는사이다.그러나좋은사람도나쁜일을할때가있는법이다.
오스터의신작을기다리는세계곳곳의열성적인팬들은제나름의이유를갖고있겠으나무엇보다스토리의묘미가압권이다.‘이야기는모든운명의증언이기’때문일까.2003년에발표했던이번장편도대략삼중구조의이야기를가지고있다.당신이펼친소설속주인공인시드니오어는그소설속에서도소설을쓰는작가다.그런데독자를더욱흥미진진하게만드는것은소설속소설의주인공인닉보언도소설을출간하는뉴욕의한대형출판사에서편집자로일하고있다는점이다.닉보언은1927년에쓰여진후원고상태로전해져오는또다른소설을읽고있는데,그세번째소설의제목이‘신탁의밤’이다.그러니까소설①과소설③의제목이일치하는셈이다.
소설①의주인공은소설가시드니오어,소설②의주인공은출판편집인닉보언,소설③의주인공은영국군대위르뮈엘플래그다.마치영화‘세월’(TheHours)에서처럼이세주인공들은전혀다른시공간에서전혀다른액자에갇혀살아가고있지만,그들역시우연,운명그리고현재에징후를드러내는미래의망토자락에휘둘리는삶을견디고있다.
소설③의주인공플래그대위는제1차대전에참전했다가박격포탄폭발로눈이멀고간질병을닮은발작증세까지일으킨다.그는발작증세도중에미래를이미지로예언할수있는놀라운능력을얻게된다.그러나플래그는사랑에빠진여인과결혼하기전날발작을일으키고그애인이채1년도가지않아서자기를배신하리라는것을미리알게된다.그는‘자기앞에놓여있는운명이라는고뇌에직면할수없어서자신의가슴에칼을꽂고생을마감’(85쪽)한다.
이같은소설③을읽게되는,소설②의주인공닉보언은아무런예고없이건축공사장의10층에서떨어질수있는들보때문에,아니면11층아파트의건물정면에붙어있는이무기돌이떨어져서삶이아무때든끝날수있다는경험때문에‘인생을닥치는대로바꾸기로’결심을한다.그는직장과아내를버리고전혀낯선도시인캔자스시티를향해밤비행기에몸을싣는다.닉보언은예순일곱살먹은흑인택시운전사를만나고,세계유명도시의전화번호부를수집하는기묘한일에휘말리다가지하에있는방사선낙진대피소에갇히게된다.출구는막혔다.
이런스토리로소설②를쓰던소설①의주인공시드니오어는아내그레이스가임신중이라는사실을알게되고,돈을좀벌어볼요량으로타임머신에관한공상영화의시나리오를썼다가퇴짜를맞기도하며,중국인문방구주인이안내하는갈봇집에가서오럴섹스를경험하기도한다.또존트로즈의아들인제이콥이오어의아파트를도둑질하는사건과,그레이스가아무말없이외박을하는일도벌어진다.그러나이러한불안을몰아내기라도하겠다는듯이시드니와그레이스는‘옷을반쯤벗은채침대로가려다결국그러지도못한채바닥에구르며’(240쪽)격렬한섹스에탐닉하기도한다.
시드니오어가아내와스물여섯살위인존트로즈의불륜을알아내는것은연역적추론을통해서였다.불명확했던과거의디테일들이둘사이를불륜으로설정하자희한하게맞아떨어지기시작했다.그것은시제(時制)로서과거이자소설작법상의미래였다.실제로시드이오어는그로부터12년이흐른1994년(미래)에제임스걸레스피가쓴‘꿈의미궁:존트로즈의생애’라는책을통해서자신의연역적추론이옳았다는것을재차확인하게된다.
현재에징후를드려내고있는미래는복합적이다.미구에닥칠불운의암시로감춰져있거나,아직밝혀지지않은과거의미궁으로가로막고서있다.
오스터의최대출세작인‘뉴욕3부작’(1986)에나오는주인공퀸은빨간공책에글을썼고,이번장편에서주인공시드니오어는파란공책에글을쓴다.둘다소설가다.
소설이란‘감동’과‘여운’이있어야한다는게문학전문가들의어휘라면,우리식어휘로는‘시간이나잊게해주고,그러면서도다읽고난후뭔가찡하게남는게있어야한다’는것일게다.‘시간을잊게만들기위해’오스터는거의예외없이추리적작법을쓴다.누구야?,어디로갔을까?,어떻게된(될)것이냐?같은의문이꼬리에꼬리를물도록하고있다.글자를아는사람이라면빠져들지않을도리가없다.‘뭔가찡하게남는것’은이중삼중의상자를뚫고우연의총탄세례를맞아가며운명을,사랑을껴안는휴머니즘이있기때문이다.물론운명의바닥에는허무주의라는배설구를만들어카타르시스를돕는다.‘사람은우연한일로죽으며눈먼우연이용서해주는동안에만살아있다’(80쪽)는식의.
삼중으로장치한‘소설가소설’의최대장점은소설가와소설사이의공간을최대한좁힐수있다는점이다.그때수집하는리얼리티보다도더적실한것은없다.모든아이디어와에피소드는피부감각적으로적나라하다.오스터는소설가소설의리얼리티를벽돌삼아서우연의공간을축조한다.“나는스스로를엄밀한의미에서리얼리스트라고생각한다”는오스터는재래식리얼리즘의관례를깨고,대신허구(소설)보다기이(奇異)한사실들을채집한다.
독자는그우연이의도된우연이아니라어쩔수없었던,필연적우연이라고받아들일수밖에없다.왜?리얼리티로축조됐으니까.있을수있는,그리고있을수밖에없는,그러면서도재미있는얘기들을따라가다보면오스터는어느새독자를환상적우연의세계에흠뻑빠져들게만든다.
소설가소설은일종의유체이탈이다.소설을쓰고있는나자신을소설속의주인공으로삼음으로써극도의리얼리즘과극도의작가주의를동시에겨냥하면서가장손쉬운방법으로소설의입체성을획득한다.
또하나오스터의작법은‘상자속에서상자꺼내기’(차이니즈박스혹은러시아인형)다.액자를풀면,또액자가나온다.다만이것은누구나쓰는수법이다.오스터를오스터답게만드는것은,풀면또나오고풀면또나오는‘이중의상자’라는구조밑에,‘막다른방은없다’는오스터특유의문학적기간전략이작동하고있다는점이다.‘뉴욕3부작’에서도‘방안에는창문없는칸막이방으로통하는문이또하나있었고’(196쪽),이번장편에서도소설②의주인공이갇히는지하벙커에는‘또하나의방’이있다.이것은‘그전까지썼던모든것은지금이야기하려고하는끔찍한일의전주곡에지나지않았다’(287쪽)는식의주의환기방식이다.마치TV뉴스앵커가중간광고가나가는동안시청자에게“멀리가지말라”고환기하는것과같다.오스터가들려주는이야기가바싹다가앉지않을도리가없게만드는것이다.도대체해찰할틈이없다.
뉴저지의뉴워크에서가구점집아들로태어난폴오스터(PaulAuster·57)는콜롬비아대학에서문학을전공했고,60,70년대파리에도번역일을하는등한동안머물렀으며,1980년대들어비로소본격적인소설가가됐다.‘죄와벌’에서엄청난영향을받았다는그는무명시절열일곱군데출판사에서거절당한적도있다.
지금은“재치넘치는언어,도회적(뉴욕적)인감성,아방가르드적인글쓰기”를통해“동시대인들의열망과좌절,고독과절망,강박관념등을그려내는데탁월한솜씨”를발휘해왔다는평을듣는세계적작가다.이번장편은‘환상의책’‘달의궁전’‘공중곡예사’같이국내에번역되는열다섯번째책이며,황보석은그중아홉권을번역했다.
무라카미하루키는“뛰어난연주가의스타일과음악적구조때문에오스터의소설을무척좋아한다”고말했다.오스터는유대계미국인이다.‘스모크’(1996)‘블루인더페이스’(〃)‘다리위의룰루’(1998)같은영화에시나리오를쓰거나감독을하기도했다.
/김광일기자k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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