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연작형식을띠면서도‘모구실’‘진료소’‘수련원’같은3글자소제목을따라열네토막으로나뉜이작품은각토막이또울타리를친한가지씩의이야기틀을갖추고있었다.이토막들이지난3년동안현대문학,동서문학,문학과사회,21세기문학,창비같은문예지에단편들처럼발표됐던것이고,이번에저자가다시손질해서장편으로묶은것이다.
등장인물은딱세명이다.쉰을넘긴천수건은대학교수다.어느날그는산간벽촌에있는마을모구실을찾아간다.딸이그곳보건소의소장으로있기때문이다.딸은아비와소식을끊고잠적하다시피들어와있다.그마을에는폐교가하나있는데그곳을지키고있는남자가두번째중요인물인서존만이다.우연히만나게된천수건과서존만은술잔을기울이고,이마을의허름한점방집아들인조성달이끼어든다.그들은어느새‘초면이구면이고구면이초면이되는’술친구가된다.
세남자는진료소,수련원,섬진강,동사무소같은곳으로아주느릿느릿장소를옮겨가며술판을벌인다.그들은흡사아라비안나이트의셰헤라자데처럼이세상살이와얽혀있는온갖이야기를안주삼으며,그곳에동서고금의신화와고대역사를꿰뚫는다채로운이야기를다시얹어놓는다.
이번소설을‘달궁’시리즈의세장편(1987·1988·1990)들과,저번장편‘용병대장’(2000)을아우르는서정인의대표작이라고불러보는이유는,서정인의작품을경험한독자든아니든상관없이,그의전모(全貌)를맛볼수있는요소들이녹아있기때문이다.우선이번책에는요즘의세태비평이전편을흐른다.저자는비유나비평이아니면말하지않는다.노드럽프라이가“비평의본령은현재도그렇고앞으로도그럴것이지만,바로해석이다”라고말했듯이서정인은박상륭같은내재율과,움베르토에코같은종횡무진을풀어놓으면서“정의(定義)가들어갈수없을만큼작은틈바구니에”(G.K.체스터턴)독특한비평을아로새긴다.그는도덕사회,정의사회,공평사회를부르짖는당대의깃발들을희롱하면서“없는세상을위해지금있는세상을버리랴,나는안버린다”(160쪽)는다짐을반복한다.
누구의아들놈은몇년이넘도록찾아오지도않는다는얘기,누구의모친은개가를했다는얘기,누구는여자고등학교에명사특강을해달라는초청을받았다는얘기,문닫은음식점에들어가밥상차려내는얘기들이두서없이흐른다.심지어나이차이에따른호칭문제,있는사람들별장얘기,벌초얘기도끼어든다.‘인간’의의사소통은애시당초언어나문법과는관계없고,다만정황(情況)이있을뿐이라는큰전제에기대서‘인물’들은횡설수설한다.
인류역사와삼라만상에대한천의무봉이요일필휘지같지만급기야연륜이지친듯말이헛샌다.서정인은바로그지점,말이헛새는곳에말맛의리듬을살리고,산문진경의미학을독자와공유한다.
그리듬을따라독자들이귀와혀를풀어놓으면,서정인은신화시절부터비롯된역사·철학·문학의흥미진진한에피소드를언어의바다위로해학이라는쪽배에실어띄운다.그래야독(毒)을품은말들이공격성을포기하고,비평또한퇴로를열면서흔들거린다.그때“세상에는둘다맞기도하고,둘다틀리기도한것이많다”(117쪽)는,고급한상대주의요,혼돈스러운질서인작가의생각들이자리를잡는것이다.
문장의기운은퍼졌지만붓끝이마르지는않는다.서정인은그때가말흩뜨리기를그만둘때라는것을알고있다.사십년웃돈경험에얻은문학적악력인셈이다.술기운이뱃속으로퍼졌지만아직취하지는않은때처럼(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