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수필]오음실 주인(梧陰室 主人)-윤모촌-

오음실주인(梧陰室主人)-윤모촌-

(1979년1월한국일보신춘문예수필부분당선작)

내집마당가엔수도전(水道栓)이있다.마당이라야손바닥만해서현관에서옆집담까지의거리가3미터밖에안된다.그담밑에수도전이있고,시골우물가의장자나무처럼오동나무한그루가그옆에서있다.이른봄해토解土가되면서부터가을까지,이수돗가에서아내는허드렛일을한다.한여름에는온종일뙤약볕이내려적지않은고초를겪어왔다.좁은뜰에차양을할수도없어서그럭저럭지내오던터에,몇해전우연히오동나무씨가날아와떨어져두그루가자생하였다.처음에는어저귀싹같아서흔하지도않은웬어저귀인가하고뽑아버리려다가,풀도귀해서내버려두었다.50센티가량자라났을때야비로소오동임을알았다.이듬해봄에줄기를도려냈더니2미터가량으로자라,한그루는자식놈학교에기념식수감으로들려보냈다.

오동은두어번쯤도려내야줄기가곧게솟는다.이듬해봄에또도려냈더니3년째에는훌쩍솟아나서,대인의풍도답게키(箕)만큼씩한큰잎으로그늘을드리우기시작했다.올해로5년째,그수세는대단해서나무밑에서면하늘이보이지않는다.나무의위치가현관에서꼭2미터반지점에서있다.잎이무성하면수돗가는물론이고,현관안마루에까지그늘을드리워여름한철의더위를한결덜어준다.한가지번거로움이있다면,담을넘어이웃으로벋는가지를쳐주어야하는일이다.더위가한창인8월에도처서만지나면,가지밑의잎들이떨어져내린다.그래서이웃으로벋은가지를쳐주어야하는데그럴때마다짐짓오동나무가타고난팔자를생각하게된다.바람을타고가던씨가좋은집뜰을다제쳐놓고,하필이면왜내집좁은뜰에내려와앉았단말인가.

한여름낮,아내가수돗가에서일을할때면,오동나무그늘에나앉아넌지시얘기를건넨다.빈주먹인내게로온아내를오동나무에비유하는것이다.
"오동나무팔자가당신같소,하필이면왜내집에와뿌리를내렸을까."
"그러게말이오,오동나무도기박한팔자인가보오.허지만오동나무는그늘을만들어남을즐겁게해주지,우리는뭐요.""남에게덕을베풀지는못해도해는끼치지않고분수대로살아가는것이아니겠소."
구차한살림속에서오동나무의현덕만큼이나드리워진아내의그늘을의식한다.

이전에함께학교에있었던S씨의말이나이들수록가슴으로젖어든다.고된일과를마치고막걸리잔을나누던자리에서,그는찌든가사얘기끝에아내의고마움을새삼스레느낀다고하였다.여러자녀를데리고곤히잠들고있는주름진아내를밤늦게책상머리에서내려다보면미안한마음뿐이더라고했다.나잇살이나먹으니내조가어떤것인가를알겠더라며그는헤식게웃었다.진솔한그의고백이가슴에와닿는게있어,점두를했던일이오래전일이건만어제일같다.

언젠가충무로를걷다가,길가에앉아신기료장수에게구두를고치고있는중년여인을본일이있다.그여인상이머리에서지워지질않는다.거리에서구두를고치던중년이돋보이는내나이-생활이란것이무엇인가를조금은알듯하다.내게로온이래손톱치장한번한일없이푸른세월을다보낸아내를보면,살아가는길이우연처럼생각된다.세사世事는무릇인연으로맺어지는것이라하던가,남남끼리만나분수대로인생을가는길목에,오동나무씨가날아와반려가된것도그런것이라할까.

좁은뜰에나무의성장이너무겁이나서가지끝을잘라주었다.여남은자가량으로키는머물렀지만,돋아나온지엽이또무성해서지붕을덮는다.이오동의천수는예측할수없고,내가이집에머무는한은그늘덕을입게될것이다.이사를하게되면벨생각이지만,오동은벨수록움이나와다음주인에게도음덕을베풀것이다.

요새사람들은이재理財에밝아오동을심지만,선인들은풍류로오동을심었다.잎이푸를때는그늘이좋고,낙엽이지면빈가지에걸리는달이좋다.여름엔비듣는소리가정감을돋우고,가을밤엔잎떨어지는소리가심금을울린다.오엽梧葉에지는빗소리는미상불마음에스민다.병자호란때강화성이떨어지자자폭한김상용그분은,다시는잎넓은나무를심지않겠다하고,오엽에지는빗소리에상심과장한을달랬다한다.

달은허공에떠있는것보다나뭇가지에걸렸을때가더감흥을돋운다하였지만,현관문을나서면나뭇가지에와서걸린달이바로이마에와닿는다.빌딩가에걸린달은,도심의소음너머로플래스틱바가지처럼보이지만,내집오동나무에와걸리면신화와동화의달로되돌아간다.그리고소녀의감동만큼이나서정의초원을펼쳐주고,어린시절의고향을불러다준다.

선조때문신에오음이라고호를가진분이있다.그의아우월정과더불어당대의명신으로불리던분이다.호는인생관이나취향에따라짓는것이라하지만,아우되는분의월정에선재기가번득이고감상적이며,맑고가벼운감이있으나,오음에서는중후하고소박하고현묵함을느끼게한다.두분의성품이그랬는지는알수없으나오음쪽이깊은맛이난다.내집오동나무의그늘을따서나도오음실주인쯤으로당호를삼고싶지만명현의이름이나호는함부로따쓰는법이아니라고한할아버지의지난날말씀이걸려선뜻결단을못하고있다.

처서까지오동은성장을계속해서,녹음은한껏여물고짙어진다.음7월을오추梧秋또는오월梧月이라고부르는뜻을알만하다.옛부터오동은거문고와가구재로애용되고있는것은누구나가알고있는일이다.편지에쓰이는안하니하는글자외에도,책상옆이라는뜻으로오우梧右혹은오하梧下라고쓰는것을보면,선인들은으레책상을오동으로짠것같다.동재가마련될때는친구에게도나누어서필통도깎고간찰簡札꽂이도만들어볼까한다.

무료하면오동나무를쳐다보게되고,그럴때마다찌든내집에와뿌리를내린오동나무가그저고맙기만하다.(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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