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이야기6] 김씨는 흉노족의 후손?

날짜 2005/06/2009:42:45 조회 43206

김씨는흉노족의후손?

흉노의전성기는묵특(기원전209∼174)이강성기에초원의제유목민족을정복하고한반도북부에서시베리아바이칼호,티벳으로영토를확장한시기이며60여년간한나라로부터조공을받았다.한나라는유럽에진출한흉노가로마로부터매년조공을받았듯이주종의관계를유지하다가북방민족의지배로부터벗어나려는한무제가서기69년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전술로흉노족들을서로이간질시킨다.북방민족은서로싸우며멸망의길로들어서게되었으며북방민족인흉노의서진과동진,남진이시작되어한반도북부만주지역에정착했든흉노가한반도로유입한시기라고할수있고한반도북부와만주지역에남아있든흉노가4세기에5년간계속된냉해로한반도북부에서유럽으로진출한흉노집단의일부라고추측할수있다.북한과만주지방에서출토된흉노의청동솥은그지역에흉노가정착해서살고있었다는사실을입증하고있다.


<장천고구려고분벽화>

고조선이멸망(BC108)하고고구려(BC63)를세운예맥족은고조선의유민들이며대표적인고조선의기층부족이다.고구려고분벽화에서기둥을받치고있는역사는말갈인으로전형적인아이누인의특징을가지고있다.이들외에고구려경내에서살고있던흉노와선비족을고구려고분벽화에서찾아볼수없는이유는그들이우리와모습이같기때문일것이며,고구려가다민족사회였다는사실을보여주고있다.김내현단국대교수가선비,흉노,말갈족들을한민족에포함시켜야된다는이유가여기에있다고볼수있다.

신라의위치는<삼국지위지동이전>의진한지방이며,진나라때만리장성의노역을피해온진나라사람들이살고있었다는지방이다.신라의옛국명은사로국이다.삼국사기의신라(BC57.건국신화생략)탈해왕9년(서기65)시림(후대에계림으로개칭)에김씨의시조인김알지가나타나탈해왕이길렀다는고사는북방유목민족인흉노가이미기원전에신라에진출했다는사실을말해주며,신라에서왕이라는칭호가아닌이사금,마립간과같은북방초원민족이지배자를호칭하는용어를사용한기록은초기신라의지배자들도기원전에남하한북방유목민이라는사실을부인할수없다.(자료참고1)

김알지의후손미추왕이262년에왕위에오르면서석씨와박씨계의왕계는끊어지며김씨는신라가멸망할때까지왕위를이어갔다는사실은김씨와그를추종하는세력이신라의통치권을장악했기때문이라고할수있다.

고대사의미스터리로대변되는신라고분천마총및금관이출토된금관총,서봉총,금령총,황남대총그리고금령총옆에있는식령총이한결같이모두가다5세기말-6세기초로편년되고있다.이사실은신라의고분군이갑자기출현한이유를대변한다.고구려고국원왕12년(서기342)선비족인모용황이환도성을침공해고국원왕의부친인미천왕의묘를파내시신과왕족외만여명의포로를잡아간사건이발생했다.고구려를침공한선비족의반은흉노로구성되었고이때이탈한흉노가한반도남단으로내려와신라왕권을찬탈하고신라고분을건설하며가야지방으로내려가가야를세웠다는설이있다.

이설을뒷받침하는삼국사기는신라김씨를모용씨라고기록한것으로봐서4세기에일단의흉노가대거남하했을가능성은배제할수가없으나그들이단시일내에금관이발굴된고분군을조성했다는설은불가능에가까운일이다.

금관이출토된고분은왕의무덤이확실하며,4세기중반에도래한흉노가고분군을건설했다면그집단에서5명의왕이100여년간왕위에등극하고사망했다는것은상식적으로생각해보아도있을수가없는일이다.왕의능묘한개를만들려면출토된유물로봐서막대한재정과시간이소요된다는것을짐작할수있다.

이미발굴된다섯개의능묘를100여년에걸쳐일시에조성했을것이라는가정은방금도래한흉노집단으로서자신들의직계조상인아닌피장자들을위해막대한노동력과재정을소비해가면서왕의능묘를건설할이유가없기때문이다.

흉노가한반도에도래해서고분군을건설한기간을유추하는방법으로미주한인이민의예를들어보면좋은비교가될수있을것이다.1903년증기선을타고태평양을건너30여일걸려서하와이와맥시코로이주한한인은3천여명에불과했으나한국전쟁후미국으로이민한동포들은6,000여마일을비행기를타고10여시간걸려서미국에도착했다.

동포사회에서한국인공동묘지가따로건설되고봉분묘를만들기시작한시간은미주동포가100만을넘어서는이민역사백년전후다.한국말과문화를가지고있는한국인커뮤니티가존재했기때문에이와같은한국식의봉문묘를만들수있었고또동포들이두고온장례문화를미국에서재현할수있었다.

말을타고하루100km를여행할수있는시기에신라지역에도착해150여기의고분군을남긴우리선조인흉노족김알지가서기65년에신라에등장하고그의후손인미추왕이서기262년에왕위에올라5세기말과6세기에걸쳐그들이가지고온스키타이식의적석목곽분묘를축조한시기는무려4백여년이나걸렸다.그들도미국으로이주한미주동포들과같이그들이가지고온적석목곽묘를축조할때토착민인구의20-30%정도의흉노문화를가진공동체가없었다면신라고분군은탄생할수가없었다고나는생각한다.

신라경주에흉노족의공동체가있었다는사실은고분에서출토된금속공예품과마구용품,생활용품,유리공예품들을만들며제작할수있는장인들이공동체내에있었기때문에가능했고한가지분명한사실은신라토착민이중앙아시아까지가서북방문화를들여왔을가능성은거의없다는것이다.

금관이출토된고분중에하나는틀림없이김알지의후손으로최초로신라왕위에오른미추왕의묘라고추측해도틀리지않을것이라는내추측은김알지의후손의위치에서생각해보면쉽게이해가갈것이다.

KBS방송에서제작한역사스페셜에서삼국통일후일본에서신라에주문한물품품목에비단외에양탄자가있었다는사실은신라에유목민이거주하며양탄자의재료가되는양이나낙타를길렀고,또양이나낙타의털을이용해서양탄자를만들수있는기능공이있었다는확정적인증거라고할수가있다.

유리로만든공예품도신라에서제조했다는사실은80년대초에방송에서유리공예품을만들었던지역을찾아내고발견된유리파편과고분에서나온유리제품의성분을분석한결과신라지역에서도유리제품이생산되었다는사실도이미밝혀졌다.발굴된신라고분군의특징은피장자가누구인지를밝혀줄만한기록을묘에남기지않았다는사실이다.

5세기말에조성된고분들은신라에서한문을사용하면서왜피장자의신분을남기지않았는지에대한의문은흉노의침공으로그들의장례문화영향을받은유럽여러나라에서찾아볼수가있다.유럽의장례문화에서관을하관할때,따라온문상객들은자리를피하며친족몇명이지켜보는가운데파놓은땅에관을하관하고묻는다.그이유는피장자가묻히는곳이여러사람들에게알려지는것을막기위해서다.

스키타이매장문화를계승한흉노는사망한지도자나왕을매장한후후일에있을지도모를,묘를파헤치는보복을당할지도모른다는생각에서피장자의신분을밝힐수있는기록은남기지않았다고추측할수가있다.신라고분도전통적인흉노의장례문화에따라묘를조성했기때문에피장자의신분을밝히지않았을것이다.
아틸라의묘가어디에있는지(추정만할뿐)모르는이유도바로이때문이다.

한국인성씨중금이라는뜻의김씨가압도적으로많은이유는흉노가남긴자취이며,삼국을통일한신라제30대왕인문무대왕이자신을흉노의후손이라고기록을남긴것은고대한반도에흉노의존재를입증하는결정적인자료들이다.

[참고1]김태식기자정리
1970년대후반부터80년대초반까지국립경주박물관발굴결과신라건국과밀접한기원전1세기경각종화려한유물을출토한경주조양동유적발굴보고서가늦어도올연말쯤에는나올전망이다.

최근취임한지건길국립중앙박물관장은16일"무슨일이있어도조양동발굴보고서를올해안에낼계획"이라고말했다.
조양동유적은지난79년6월이곳에거주하는한개인의집을신축하는과정에서몇점의토기가발굴된것을계기로경주박물관이82년까지4차례에걸친발굴을벌인결과그중심연대가삼국사기가기록한신라건국연대(BC57년)와대체로일치하는기원전1세기경각종유물들이쏟아져나왔다.

유물중에는무덤으로는토광묘와목곽묘가섞인특이한무덤이있는가하면옹관묘,목관묘도확인됐고더구나이곳에서는말재갈을비롯한다량의철기와중국전한(前漢)및왕망(王莽)의신(新)시대에만들어진것이명백한구리거울등이다량으로출토됐다.

이중에서특히목곽묘와목관묘는기원후4,5세기경어느날갑자기경주지역에출현하는것으로보았던대형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의원류가된다는점에서비상한관심을모았다.

당시는물론이려니와지금도한국고대사학계및고고학자대다수는한국고대사말살에혈안이됐던일제식민사학자들이그랬던것처럼삼국사기가기록한신라건국연대를조작이라몰아붙이면서신라의실질적인건국을대형적석목관분의출현과함께하는4세기중,후반으로보아왔다.

그러나조양동유적에서는이유적의축조연대를명확히알려주는전한의구리거울을비롯한화려한유물들이다량으로쏟아져나오고더구나이들과같이출토된유물들로보아이미기원전1세기경경주지역문화가고도의문명단계로들어섰음을입증해줬다는점에서삼국사기가BC57년이라고기록한신라건국연대가마구잡이로끌어올려진것이아님을증명했다.

따라서이유적은마치풍납토성이좀처럼그실체를인정하지않으려했던초기백제사를새롭게쓰게하고있듯이일제식민사학자들과이병도이후국내고대사학계가그존재를말살했던초기신라사를재조명할수있는결정적인증거가된다는점에서신라판풍납토성으로평가되고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