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인간 윤 치 호 (尹致昊)한말 정객(韓末政客)의회고 2.
BY orullee ON 1. 31, 2009
인간윤치호(尹致昊)
풍우20년—한말정객(韓末政客)의회고2.
1930년1월11일-15일동아일보소재(所載)
서재필씨와악수,독립협회서활동
귀국하는길에나는홀로파리에서떨어져서불란서말을서너달배우고,그해(1896년)11월에상해로돌아와얼마동아체류하다가,그이듬해이월에서울로돌아와서서재필씨가회장으로있는독립협회에관계하다가7월에그가미국으로돌아간후부터그뒤를받아내가회장으로되어<독립신문>도경영하였는데,서재필씨가경영할때에는,한쪽에는조선문,한쪽에는영문으로격일간행했으나,내가취임한후에조선문은따로떼어일간으로하고영문은사흘에한번씩간행하였소.
補負商(보부상)에대항,處處(처처)市街戰연출
당시조선의정계는소위아라사파가세력을잡아상감께서아관에파천까지하시었다가경운궁으로환궁하셨으나,아라사의세력은당당하였소.
그사이에독립협회의활동은실로활발하여정부를움직일만큼까지되었으나필경은칙령으로해산이되었소.그러나표면으로만해산된거지회원들은다시관민공동회를조직하여대관들까지입회시키어그세력이굉장하였었소.그러나그운동이순전한반정부적이었으므로,정부관리는대개물러가고순전한재야당이되매명칭은‘만민공동회’라하였으며,그세력은더욱창궐하여필경은조병식내각을경질케까지하였으나,정부에서만민공동회를제어할단체로지방에흩어져있는보부상을황국협회길영수등으로하여금불러올리어대적케하여처처에서시가전이연출되었소.
l외국인跋扈(발호)를懲治(징치)
(동아일보제3381호1930년1월14일자)
독립협회가해산되언날이10월25일인데,해산되자수령들은많이감옥에갇히었소.이승만씨도그때갇히었소.당시나도당연히투옥될것이로되,내부친이군부대신으로있을때이므로무사히되고,그해겨울에벼슬을얻어원산감리로부임하였소.
원산에2년,진남포에1년있다가다시원산으로가서2년을있었으니,감리생활을전후5년을하였지요.
<독립신문>은내가서울을떠난후에영국인이경영하다가정부에서매수하였소.
치외법권(治外法權)자세,오만하던선교사
내가감리로다닐때서양인의발호가대단하였소.예수교인은인격자가많아오히려공경할점이많았지마는,천주교의신부는호기를대단히부려안하무인이었소.
어디나갈때에는관찰사의행차와도같이앞뒤에순리를세우고사인교를타며장죽을물고완연한대관행차이었지요.이렇게까지오만하게된것은,당시서양인은아무러한짓을하여도조선법으로는다스릴수가없는치외법권을가졌을뿐더러,조선민중이극히우매하였으므로전도를하여교세를확장하려면그같이권세를보여민심을규합하는것이가장첩경이었던것이었겠지요.
탐관오리에반동(反動),교도(敎徒)행패가자심
당시관리는대개가탐관오리가많아가렴주구가혹독하므로일반민중은생명.재산을보존할길이없어관리에대한적개심이날로높아가던때이라,교인이되어신부의보호만받으면무법한관리의마수도침범치못하므로,나도나도하고학대받던사람들이그리로모여일종의천주교왕국을형성하여놓으니,처음엔그저보호를받으러들어간교도들이반동적으로차차행패를하기시작하여나중에는,교도중에는남의빚받아주기,굴총(掘塚)하기,동리사람잡아다가제재하기등별의별죄악을다짓기에이르러,그폐해라니실로심상히볼바가못되었소.
까막바지를압수,공사단(公使團)에항의
나는감리로가기전부터각처에그러한폐단이많다는소식을자주들었던터이라,원산에도임하여보니과연그런일이많은중에도안변에와있는나신부가관찰사이상으로위세를뽐내며그행패가무쌍하므로엄중히감시하던차에마침‘까막바지’를발하여무고한동민을잡아간일이있었소.
그대는잘모르리다마는,‘까막바지’라는것은‘유신문사(有訊問事)하니즉위착래사(卽爲捉來事)’라는,지금말하면호출장과같은것을발하여사람을함부로잡아다가볼기를치며문초를하여억울한벌을당한자가관가에호소를하므로,당연히전기나신부밑에서행패하던자를잡아다가징치하고‘까막바지’를빼앗아서울공사단으로통첩하여엄중히항의를하였지요.
그랬더니공사단에서도내항의를옳게여겨다시는그런일을안하겠다는다짐을두고나신부는안변을떠나버렸는데,이것이아마대원군의천주학도학살후엔처음으로생긴천주교의징치이었소.그전까지는천주교인이어떻게야단이든지누가감히손을대었겠소.
사법.행정.경찰등혼자서맡은지방관
원산감리로부터천안군수로경질되어일천구백사년갑진년에서울에돌아왔는데,나는얼마벼슬은살지않았으되지방관이가장취미있는관직으로알고있소.그것은,지방관은사법.행정.경찰등모든권리를혼자맡았으므로자기의이상만높으면자기뜻대로모든일을해나갈수가있었던까닭이오.
하와이이민(移民)을위문
천안군수로있다가상경하니,나라에서는외부협판(外部協辦)에임명하였소.독판은이하영인데때마침개발회사의이민으로하와이에건너가있는우리동포의곤경이대단하다고하므로,나라의명령으로시찰을떠나니1905년가을인듯싶소.
하와이에가본즉사천명가량의동포가있는데전부가사탕밭농부로,그냥상투를짜고조선옷을입고또한무식하여참혹하기짝이없는바,영사가있을리가있소.보호하는기관조차없었지요.돈은상당히버는모양이었으나은행에저금하는것은도리어위태한줄알기때문에허리에차고다니다가잃어버리기도하고도박으로없애버리기도하였소.
정말숨히막히고눈물이앞을가리웠소마는내힘하나로어쩔수가없는일이라,달포나있다가돌아오니,이거또큰일이났습디다그려.서울에돌아온이튿날에보호조약이체결되어버리지않았겠소.
한영서원(韓英書院)을설립,기금은연설(演說)수입(收入)
벼슬은더할생각도나지않았소.이제는도저히한두사람의힘으로는어쩔수없는일이라근본적으로국가를개조할뜻을둠이오히려나으리라하여송도로내려가한영서원을설립하였소.
어찌해개성에세웠느냐고요?내가상해에있을때와미국다닐때에남감리교에관계하였는데미국남감리교회에서,조선에서선교사업을하자면어느곳이좋겠느냐고하기에다른곳은이미다른종파에서사업을시작하고있고남은곳은서울서가까운송도밖에없으므로그곳을지적하였으며,한영서원도선교사의도움을받았지만내가미국에유학할때에하기방학중연설을하여얻은돈으로학비에쓰고남은것2백달러를선교부에맡겨두었었는데,그것도일부의기금이되었지요.
이상촌(理想村)계획은수포,울화에세계일주
한영서원은목적이결코보통학문이아니라농업.목축.공예같은실업교육이었으며,학교한편에대규모의모범촌을설립할작정이었으나국가의시운이불리하게되니선교사들도적극적사업을주저하게되어,그희망은공중누각으로사라져버리었소.
한영서원교장으로있는동아1908년인가안창호.이동휘군등이평양에대성학교를경영하다가그곳교장일을보아달라기에,동지가하는일이라찬성하고두곳을겸해보면서총준(聰俊)의양성에힘을도우려고하던차에,1910년8월29일에한일합방이되자,나는울적한심회를씻어나보려고세계일주의길을떠났소.
백오인사건(百五人事件)으로철창생활3년
각국을유람하고3년만인1912년7월에귀국하니,때마침서북인들이사내(寺內)총독(總督)암살계획을하였다는소위백오인사건이일어나자나도그공모자의하나로붙잡혀문초를받다가미결2년,징역1년으로만3년을감옥생활을하였소.실상관계했는가말이오?관계가있다고잡힌것은아니오.아마내가보호조약후에벼슬을안살고한영서원과대성학교에관계하여평상시에혐의를받아온탓인줄생각하오.
심신단련에노력,소유농토를고수(固守)
지금은이렇게어린것들이나양육하고밖으로는교회사업을볼뿐이오.그밖엔아무일도없소마는,나는이런생각을하고있소.우선신체를건전히하고정신을훈련하며,실업에힘쓰고농토를지키고있을밖에없다는생각이오.
라고하며좌옹선생은서양각국의실례를들어한참동안민족문제의의견을말하였다.
[한일합방직전의생생한역사의기록으로,그때의사회상을볼수있는귀중한자료라고생각합니다]
Share the post "[펌]인간 윤 치 호 (尹致昊)한말 정객(韓末政客)의회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