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식기습작전,5C동북아패자는중국아닌고구려임을의미
연세대지배선교수,중국역사책진서(晉書)기록찾아내
<이기사는weeklychosun2049호에게재되었습니다.>
사진=허재성조선영상미디어기자
고구려가전성기로치닫던404년“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5~413)이중국의수도인북경(당시지명은연군·燕郡)을침공해게릴라전을폈으며,이로인해당시중원(中原)의패권을쥐고있던후연(後燕)이멸망의길을걷게됐다”는연구결과가나왔다.후연의도읍이던연군은연(燕)나라이후명(明)~청(淸)시대를거쳐오늘날까지중국의수도가자리하고있는대륙의심장부다.따라서이러한학계의주장은5세기당시동북아시아의패자(覇者)가중국이아닌고구려였다는사실을방증해주는것이어서주목된다. 진서(晉書)는당태종때편찬된정사(正史) 연세대학교역사문화학과지배선(池培善·62)교수는‘고구려광개토대왕의燕郡(北京)침공원인에대하여’라는논문을통해이같이주장하면서,중국역사책인진서(晉書)의기록을근거로제시했다.진서는당(唐)태종(太宗)이지시해편찬한진(晉)왕조의정사(正史)로,5호16국(五胡十六國)과진나라시대를이해하는데필수적인사료다.이책권124모용희재기(慕容熙載記)404년12월조(條)에는“그때고구려가연나라를공격하여100여명을죽였다(會高句麗寇燕郡,殺略百餘人)”고기록돼있다. 지교수는“진서는중국인들이일점일획의거짓도없다고믿는정사(正史)”라며“하지만안타깝게도삼국사기(三國史記)나삼국유사(三國遺史)같은우리역사서엔‘광개토대왕이친히군사를이끌고(出師)연나라를공략했다(三國史記廣開土王本紀十三年條,十二月出師侵燕)’는사실만간략하게나와있을뿐,연나라를쳐들어가서어떤공적을세웠는지에대한내용은적혀있지않다”고덧붙였다.중국정사를통해광개토대왕의이같은활약상을확인한것은지교수가처음으로,이논문은오는4월발행되는백산학보(83호)에실릴예정이다. 광개토대왕의후연공격원인을살피기위해선시대를거슬러올라가,고구려와선비족(鮮卑族)의관계를살펴야한다.선비족은한나라(前漢)북쪽에살던호전적성향의유목민이다.고구려역사에선비족이처음등장한것은BC9년으로,삼국유사유리왕본기(瑠璃王本紀)에‘선비족이고구려국경을자주침공하자,고구려가계략을꾸며힘센선비족을제압해속국으로삼았다’는내용이기록돼있다.
“고구려가연나라공격해100명죽였다”기록
지배선교수는“여기서도적을뜻하는구(寇)자를사용한점으로미뤄중국인들이광대토대왕의연나라공습사실을격하했다는점을알수있다”며“따라서100명을죽였다는기록역시사실과다르게축소된것일수있다”고말했다.그는광개토대왕의북경(연군)공습에대해“할아버지인고국원왕의복수를위해대규모군사작전을벌인것”이라며“적국의수도를유린한이게릴라전의후유증으로인해당시중원의패자였던후연(後燕)은붕괴의길을걷게됐다”고말했다.
수백년걸친고구려-선비족갈등이게릴라전배경
고구려속국된선비족은보복으로미천왕시신약탈
고구려의속국이되긴했지만,선비족의전투력은막강했다.씨족사회를기반으로삼아뭉치고흩어지길반복하던이들은285년전연(前燕)을건국한모용외(慕容鬼)를중심으로전열을정비,293년고구려로쳐들어왔다.이때모용외는고구려서천왕의묘를파헤치려했다.자신들을압박했던서천왕에대해일종의복수를시도한것이다.이에대해지배선교수는“죽은이의무덤을훼손하는것은그시기유목민들의전통적인복수방법”이라고설명했다.하지만모용외는도굴에성공하지못했다.이후그는도굴을목적으로재차고구려를침공하지만결국‘뜻’을이루지못한다.
선비족과고구려의갈등은이후봉상왕(烽上王)~미천왕(美川王)시대를거치면서심해졌다.낙랑(樂浪)군을공격해위명을떨친미천왕이선비족세력권이던요동(遼東)지역을자주침공하자,선비족도이를맞받아쳐접전이끊이지않았던것이다.그러던두나라가감정의골이결정적으로깊어진것은미천왕의뒤를이어즉위한고국원왕(故國原王)때였다.
당시선비족의패권을쥔사람은모용황(慕容皇光)이었다.모용외의뒤를이어337년전연의왕으로등극한그는동생모용인(慕容仁)보다무공이약하다는콤플렉스를극복하고,자신의권위를확고히세우고자342년고구려침공을감행했다.
수년간복수를다짐해온선비족의군사력은강건했다.그들은고구려수도인환도성(丸都城)까지쳐들어와궁성을불사른뒤,유목민전통을따라고국원왕의아버지인미천왕의시신을약탈하고고국원왕의어머니주씨(周氏)와왕후를납치해갔다.
이후고구려는미천왕의시신과고국원왕의생모·왕후의송환을위해총력을기울인다.희귀한보물을1000여종이나진상하며송환을요청했지만,모용황은미천왕의시신만돌려줬을뿐생모와왕후는돌려보내주지않았다.
그러던두나라관계에변화가생긴것은모용준(慕容儁)이전연을장악한348년이었다.강해진국력을바탕으로자만에빠진모용준은스스로를황제라칭하며수도를업(業홙)으로이전했다.점차한족의풍습에젖어든그는요동과창려(昌黎)에모용외의사당을,범양(范陽)과연군에는모용황의사당을짓고참배를드리게했다.유목민의야성을상실한그는고구려의요청을수락,고국원왕의어머니주씨를돌려보내줬다.하지만역사는교만한자에게냉정한법.호시탐탐연(燕)을노리고있던전진(前秦)이때를놓치지않고공습을감행,전연을붕괴시켜버리고말았다.
이후고구려는전진과문물을교류하며화평한시기를보낸다.하지만평화는잠시,모용황의아들모용수(慕容垂)가세력을규합해384년후연을세우면서고구려와선비족간의오랜갈등은또다시불거지게됐다.
이번에선공을가한것은고구려였다.광개토대왕의아버지고국양왕이385년6월후연의본거지인요동을공격,함락한뒤1만명을사로잡아돌아온것이다.그러자그해11월후연은다시군사를보내요동을회복했다.지배선교수는“기록에의하면당시유주(幽州)와기주(冀州)의유민들이다수고구려에투항했다”며“유주는지금의베이징인근이며기주는베이징200㎞남쪽의내지(內地)로,이지역에서유민이투항했다는사실은고구려의영향력이중국내륙까지깊숙이뻗쳐있었다는의미”라고말했다.
광개토대왕공격후유증으로후연결국멸망
후연무너뜨리고북연(北燕)세운왕도고구려유민
392년즉위한광개토대왕은그해7월부터영토확장에주력했다.백제를침공해10개의성을빼앗아후방을다져놓고,북쪽의거란을공격해잡혀갔던고구려인1만명을이끌고돌아온그는서쪽으로고개를돌려숙적연나라를주시했다.
대왕이칼을뽑은것은401년.천부적군사감각을갖고있던광개토대왕은후연의권력을쥐고있던모용성(慕容盛)이쿠데타로시해되고,모용수의아들모용희(慕容熙)가권좌에오르는혼란기를놓치지않았다.군사를몰고쳐들어간대왕은숙군성(宿軍城)을점령해기염을토한뒤,여세를몰아중국내륙을공략했다.
이사실에대해자치통감(資治通鑑卷113晉紀35安帝元興3年12月條,高句麗侵燕)과삼국사기(三國史記廣開土王本紀十三年條,十二月出師侵燕)는“고구려가쳐들어갔다(侵)”고기록하고있다.반면진서(晉書卷124慕容熙載記,會高句麗寇燕郡殺略百餘人)는“고구려가도적질을했다(寇)”고기록하면서“100여명을죽였다(殺略百餘人)”고당시상황을전했다.지배선교수는“도적질했다(寇)는진서의표현은중국인들이이사실을격하했다는의미”라며“따라서100명을죽였다는기록역시사실과달리축소된것일수있다”고말했다.그는“춘추전국시대이전부터북경일대는연이라불렸다”며“전연·후연같은나라이름에도‘연’이들어갔다는점에서알수있듯,북경일대는매우중요한정치·군사적요충지”라고말했다.“그런요지가고구려에유린당했다는사실을중국인들이인정하기싫었을것”이란얘기다.
게릴라전을전개하며북경을유린한광개토대왕이할아버지고국원왕의복수를위해선비족의사당을유린했을까.아쉽게도이에관한기록은전해지지않는다.미천왕의시신을돌려받기위해연에줬던1000여종의보물을되찾았는지에대해서도기록은말이없다.선비족과의수백년에걸친갈등과정에서연으로끌려간고구려인들이무사히송환됐는지에대해서도묵묵부답이다.
다만△수도를유린당한후연의모용희가이를만회하기위해고구려목저성(木底城)을공격하다또다시패했고△강성해진고구려가위용을과시하기위해406년궁궐을중수(重修)했으며△이듬해인407년고구려유민고운(高雲)이모용희를살해한뒤북연(北燕)을건국해왕이됐다는기록은전해지고있다.삼국사기는고운에대해이렇게묘사했다.“북연의왕고운의할아버지고화(高和)는고구려사람으로스스로를고양씨라칭하며고(高)씨를성씨로삼았다(雲祖父高和句麗之支屬自云高陽氏之苗裔故以高爲氏焉).”
지교수는“광개토대왕의게릴라공습으로인해후연이멸망의길을걷기시작한점과,북연을건국한고운이광개토대왕에게같은종족으로서예를취했다는기록이있는점으로미뤄,5세기초고구려는아시아는물론북중국의질서까지장악했다고봐야한다”고말했다.그는“훗날북위(北魏)의침공으로북연이붕괴되자,장수왕이2만군사를파견해북연왕실과도성주민들을고구려로이주시켰다”며“이는장수왕때까지북중국동부에서고구려의영향력이지속됐음을의미한다”고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