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산3번지 외 대초리 일원
사적 제312호
[운주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자 왼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우뚝 솟은 9층석탑 뒤로 7층석탑들과 돌탑,
돌부처들이 열병하듯 서 있었다.
돌탑뒤로 멀리 대웅전과 운주사의 가람이 보이고,
사방을 둘러보니 양쪽산 중턱에도 탑들이 있다.
[9층석탑(보물 제 796호)]
9층 석탑이 당당하게 세련된
조화를 이루면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꽃잎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운주사는 신라말에 道詵國師(도선국사, 827~897)가
하룻밤 사이에 1000개의 석불과 1000개의 석탑을
조성하려 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천불동은 나를 감동시킨다. 현대의 어떤
예술 작품도 그 만큼 나를 감동 시키지 못했다.”
독일 예술 평론가인 힐트만은
운주사 천불석탑을 이렇게 극찬했다고 합니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주무대로도 등장하면서
일약 민중해방의 미륵성지로 떠 오른 운주사 원래 운주사에는
1000 구의 석불과 1000 기의 석탑이 들어서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불천탑이라 불려졌다고 하나
이제 남은 것은 석불 93구, 탑 19기. 이 천불천탑이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기에 많은 전설과 사연들이 전해진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곳곳에 불상이 있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 남편, 아내
아들,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 오기도 하는데
마치 우리네 민초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운주사의 돌부처들은 세련된 불탑에서
보아 오던 근엄한 표정은 도무지 찾아볼 수조차 없다.
이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매력이라 한다.
동체의 비례며 형태가 무시된, 한결같이 단순과 생략과
무작위의 형상들을 한 불상들이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 없는
돌부처와 더러는 머리만 남은 채로, 더러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법당이 아닌 들판과 산자락에 널려 있다.
오른쪽산 중턱에는 천년의 세월을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5층탑이 서 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 볼 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산속 투박한듯 꾸미지 않은석탑하나
꽃방석도 없이 벼랑에 기대어
서 있는데 코는 닳을 대로 닳아 없어졌고,
눈매도 희미한 것이, 정교하고 빈틈없는 석굴암의
위엄이나 손을 턱밑에 괴고 명상에 잠겨있는 금동미륵상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변화를 원하는 마음과는 정반대로 운주사에는
계곡속에서 천년의 시간동안 뽑혀지고 부서지고 깎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는 돌부처와 돌탑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한 가족의 구성원을 보여주듯 친근한 모습들.
중간에 서 있는 불상은 엄마불상
상반신으로 앉아 있는 아들불상
조금 뒤쪽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불상은 딸일까 ??
[7층석탑과 불상과 대웅전 전경]
[불상 불탑과 멀리 보이는 대웅전]
[석조불감과 원형다층석탑과 7층 석탑]
대웅전으로 가는 천왕문에
이르기 전, 특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보물 제797호인 석조불감.
이는 독특한 양식의 불상으로 돌을 쌓아 만든 석실에
돌부처 2구가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으며, 정확히 남과 북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니 그저 신비로울 따름이다.
앞쪽에 보이는 것이 ‘원형다층석탑(보물 제 798호)’이며,
중간이 석조불감. 뒷쪽에 보이는 것이 7층 석탑이다.
[앞쪽에서 담은 석조불감과 7층 석탑]
[뒤쪽에서 담은 석조불감과 7층 석탑]
석탑들의 모습도 참 다양하다.
주위에 늘려있는 돌 하나 하나에도
사연이 담기어져 천년세월을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웅전]
승당앞…이런 모습의 석탑도 있네요.
스님들께서 공부하시는 승방이나 요사체인듯 싶습니다.
[범종각]
[원형구형탑]
여러가지 모습의 석탑.
항아리를 옹기종기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네요.
[석불군’마’]
많이 훼손되었지만,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들이 돌부처의 앞자락에 많이도 쌓여 있네요.
인자하신 부처는 말이 없으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부처상일까??
[마애여래좌상]
대웅전앞을 지나 공사바위아래
있다는 마애여래좌상을 보려 올랐다.
비탈진 산길을 조금 오르니
곧장 막아서는 암벽에는 흐릿하게 새겨진 마애여래좌상.
눈여겨보지 않았으면 그냥 스쳐 지나칠뻔했다.
어디에 있을까 하고 둘레둘레 찾는 나를 보고,
짝꿍이 저기 하고 가르키는 쪽을 쳐다보니 희미하게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이 보였다.
[명당탑]
대웅전 뒤로 산신각이 있고
그 오른쪽에 원형구층탑과 또 다른 석불군이 있다.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니 명당탑과 4층 석탑이 나타난다.
운주사의 탑을 제대로 보려면
공사바위에 올라야 한다기에 열심히 올랐다.
공사바위로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5분여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불 천탑을 만들었다는 도선국사가 공사를
지휘했다는 이 바위에 오르면, 절의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넓은 터에 자리잡은 탑과 부처의 전시장이다.
[공사바위에서 내려다 본 운주사 전경]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
와불을 뵈려 가기전 바로 아래에
이 석불이 와불을 지키듯이 서 있었습니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세상이 바뀐다??
[와불]
운주사에 들어가면 놓치지 말고 봐야할 곳이 바로 와불.
도선국사가 하늘에 있는 석공을 불러 하루저녁에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불상을 만들다가 동자승이 장난삼아 닭소리를 내어 날이 밝은 줄 알고
미쳐 못 일으켜 세운 부처라고 알려지는 와불.
12m인 남편불과 10m인 아내불이 솔숲에 사이좋게 누워 있다.
감시카메라가 옆에 세워져 있고
‘와불에 올라가지 마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계신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불상 아래쪽에
쐐기를 박아 떼어놓으려는 흔적도 보인다.
또한 두 와불 중에 아래 와불은 머리에 붙어 있어야 할
육계가 떨어져 옆에 서 있다.
산중턱에 누운 와불이 일어서는날.
민중해방의 날이 온다고 황석영이 소설
‘장길산’에서 묘사한 그 와불이다.
[칠성바위]
와불을 감상하고 내려오다
보면 칠성바위 표지판이 눈에 보인다.
칠성바위도 와불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한 것.
소나무 숲에 일곱 개의 바윗돌이
놓여 있는데 칠성바위라고 불리우고 있다.
내력이나 까닭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옛날에 이 바윗돌을 깨뜨려 주춧돌로 사용하려 했던 사람이
날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과 함께 신령스런 돌로 여겨 오고 있다.
각기 다른 7개의 타원형 돌인데 북두칠성을
상징한다해서 칠성바위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이칠성바위의 위치각이 북두칠성의 각도와 똑같아지는 날.
미륵세상이 온다고 한다.
이런 설화들이 있어 더욱 신비로운 곳이 바로 운주사다.
전설처럼 雲住寺(운주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석탑과 석불이 널려 잇고 거대한 불상이 북극성을 바라보며 누워있다.
숲속에 숨어 오수를 즐기는 석탑모습 또한 신비롭다.
운주사에는 발길에 차이는 돌덩이가 바로 부처다.
서민적인 친근함이 넘쳐나는 돌부처는
언제, 누가 이 불탑과 부처들을 세웠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름만으로도 평화스러움이 넘쳐나는
화순땅 운주사에는 그 많던 부처와 석탑들이
도난 당하고 지금은 석탑 17기와 석불 80여구가 남아 있다고 한다.
데레사
2016년 3월 7일 at 8:17 오전
운주사 구경하고 그 부근 어디엔가 온천이 있던데
온천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어요.
이제 날씨 따뜻해지면 돌아 다닐 곳이 많아 질겁니다.
이번주도 즐거운 한주, 되기를 바래요.
초아
2016년 3월 7일 at 11:06 오전
아마, 도곡온천이었을것 같아요.
저희도 그곳에서 하루 묵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역시 곧 발동이 걸릴것 같아요. ㅎㅎ
mutter999
2016년 3월 8일 at 8:18 오후
화순은 몇번씩 가보았으면서도 운주사는 못가보았어요.
가보았어야 하는데 안타깝네요.
그렇게 유서가 깊은 곳이었군요.
초아님 잘 보았습니다.
초아
2016년 3월 8일 at 8:24 오후
에구 제가 다 안타깝네요.
화순에 들리셨을 때 운주사도 들렸으면 좋았을텐데..
나중 혹 다시 갈 기회가 되신다면
들려보셔요.
제가 올린것보다 더 많은것을 볼 수 있으실거에요.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