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사적 30호
[왕릉 가는 길 솔숲]
신라 제42대 興德王(흥덕왕, 826~836 재위)의
본명은 金秀宗(김수종), 景徽(경휘)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惠忠太子(혜충태자) 仁謙(인겸)이며,
어머니는 聖穆太后 金氏(성목태후 김씨)이다.
妃(비)는 소성왕의 딸인 章和夫人 金氏(장화부인 김씨)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定穆王后(정목왕후)로 추봉되었다.
[왕릉가는 길 솔숲 2]
즉위 후 당나라 文宗(문종)으로부터 신라왕에 봉해졌으며,
828년 대아찬 金祐徵(김우징)을 시중으로 삼았다.
그해 張保皐(장보고)를 淸海鎭大使(청해진대사)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았다.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金大廉(김대렴)이 茶(차)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안내판 글 내용]
[興德王陵(흥덕왕릉) 전경]
소나무 숲속을 조금 들어가면 비화산을 祖山(조산)으로
웅장한 王陵(왕릉)이 소나무의 도열을 받으며 1170年을 당당히 버티고 있다.
왕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사랑했던 章和王妃(장화왕비)를 잃어….
슬픔에 젖어있는 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은 새 王妃(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하였지만, 모두 거절하면서….
“새도 짝을 잃으면 슬피 우짖는데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고서
어찌 차마 無情(무정)하게도 다시 아내를 맞이 하겠는가”하였다.
흥덕왕은 앵무새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興德王陵(흥덕왕릉) 전경]
이 세상에 사랑만큼 오묘하고 가슴 벅찬 사연들이 있을까?
그 중에서도 흥덕왕과 장화부인김씨의 애달픈 사랑이 아닐까?
삼국유사, 왕력편에 陵(릉)은 안강북쪽 比火山(비화산)에 있으며,
왕비 章花夫人(장화부인)과 함께 매장했다.고 하였다.
왕이 원하면 뭐든 취할 수 있던 시절이 였음에도..
왕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지고지순한 부부애를 보여준 아주 드문 예인것 같다.
興德王(흥덕왕)은 죽으면서 “사랑하는 王妃 곁에 묻어다오”라는
말을 남겼기에 왕비와 함께묻히는 행복을 누렸으니
이보다 더 큰 幸福(행복)이 어디 있으리오.
[정면에서 담은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
王陵(왕릉)의 앞 왼쪽에는 碑石(비석)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채 남아있다.
그 옛날 영화를 못잊어서일까?
아니면 다시 돌아올 비석을 기다리는걸까?
외줄기 대왕의 사랑을 닮아 무구한 세월동안 그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듯하다.
[뒤에서 담은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
[능을 지키는 우측 문인석]
[능을 지키는 좌측 문인석]
무덤 앞에는 또 하나의 수호신이 있다.
우락부락한 눈을 부릅뜬 무신상이다.
부리부리한 눈과 생김새에서 단박에 서역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와 서역과의 문명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게 하는 단면을 보는 것 같다.
[興德王陵(흥덕왕릉)에서 담은 앞쪽 전경]
대개 신라왕들의 능은 누구의 것이라 알기엔 뚜렷한 묘지석이 없다고 한다.
기록에 의해 어느 곳에 장사지냈다. 라는 것을 보고 추론 할 뿐이다.
1977년 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때 상당수의
碑片(비편)과 함께능의 주변에서 ‘興德(흥덕)’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興德王(흥덕왕)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해상왕 장보고를 있게 한 군주가 바로 흥덕대왕이다.
발굴된 흥덕대왕의 斷石(단석)에 보면 왕의 풍모가 잘 드러나는 문구가 있다.
神謀決斷(신모결단) 신과같은 지혜와 결단을 가진 사람.
이런 개혁 의지가 있었기에 미천한 백성이었다는 장보고를 발탁을 할 수 있었으리라…
기우는 신라를 어떻하든 바로 세우고자 애쓰신 흥덕대왕.
‘청해진대사’란 직함을 부여받은 장보고. 貿易(무역)을 통해
신라 사회를 부강으로 이끌려 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릉을 지키는 우측 석사자상]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王陵(왕릉)을
인도의 타지마할 宮殿(궁전)과 북한의 개성에 있는
노국공주와 합장한 공민왕릉을 이야기 한다.
[릉을 지키는 좌측 석사자상]
그런데도 나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王陵(왕릉)으로
興德王陵(흥덕왕릉)이라 생각하고 싶다.
사랑의 설화를 담고 있는 흥덕왕릉은 수 천 그루의 울창한
소나무들이 한결같이 구불구불, 몸을 비틀고 있다.
대왕과 장화왕비의 사랑을 바라보기 부끄러워서 일까??
아니면 그들의 짙은 사랑이 간지러워서일까?
꼬이듯 서로 엉켜 자라는 나무도 있었다.
[興德王陵(흥덕왕릉)]
봉분 바로 앞의 상석은, 새 것으로 바꾼지 몇 년 안되었다고 한다.
바꾸기 전 옛 상석은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설화에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형체가 달라질 정도로 닳았다고 한다.
그러나 닳았을 망정 그대로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새로운 상석이지만, 옛 상석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소중하게 아껴주었으면…
흥덕왕의 지극한 사랑을 닮고자 하는 마음으로 새 상석에도 왕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 것 같아서 살며시 만져 보았다.
新羅(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 왕릉으로 封墳(봉분)의 규모가 비교적 크다.
[십이지상 조각]
왕의 나이 오십 줄에 등극을 하여서 11년의 짧은 재위 기간 때문에
해상 부국으로 번영을 구가할 신라의 운명도 왕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갔다.
장보고도 그 후, 암살당하고 말았다.
王陵(왕릉)주위에는 41개의 돌난간이 아름답게 둘려있으며,
護石(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겨 王(왕)을 호위하고
주위의 사악한 잡귀를 근접하지 못하게 지키고 있다.
[능옆을 지키는 석사자상]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있는 사자도
대왕의 사랑을 방해 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능 옆을 지키는 석사자상]
누군가 혹 방해하는 사람이던 짐승이던
나타나기만 하면 금방 달려들것 같은 모습의 석사자의 모습
[다시 담아 본 興德王陵(흥덕왕릉) 전경]
경주시내 안에 있었다면 오가며 드나드는 관광객으로
발걸음 소리도 소란했을탠데… 슬픈 사랑의 솔바람만 불어오는듯하지만,
어쩌면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에서 살아생전 못다한 정을 나누며 계신지나 아닌지…
[릉을 나서며 담아 본 입구쪽 넓은 들판전경]
1170년 전의 두 戀人(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주는 솔바람 香氣(향기)를 가슴가득 담고 돌아섰다.
데레사
2016년 3월 16일 at 7:32 오전
우리 동네에는 헌덕왕릉이 있었어요.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석탈해왕릉이 있었고…
옛날 그 시절에는 문화재인지 뭔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봄이면 동네가 모여서 화전놀이를 했지요.
능숲에서 전도 부치고 국수도 삶고 소나무에는 그네를
매달기도 하고….
몇년전 경주가서 모처럼 헌덕왕릉을 지나치면서 엄마생각도
하고 그네 잘타던 우리 언니 생각도 했답니다.
언제나 탱큐. 초아님
초아
2016년 3월 16일 at 8:21 오후
데레사언니와는 사연이 깊은 곳이었네요.
예, 석탈해왕릉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땐 누구나 다 그랬지요.
먹고 살기가 힘든 시절이었으니까요.
소나무에 맨 그네 저도 타 보았어요.
그네는 혼자보다는 둘이 함께타는 쌍그네가 더 재밋어요.
저도 언제나 탱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