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402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俛仰亭(면앙정) 표석비]
길가엔 살살이꽃(코스모스)이 바람에 살살 살랑인다.
뒤로 뒤로 자꾸만 뒤로만 달아나는 들판과 가로수, 꽃, 구름, 산 산 산…
구불구불 시골길을 더듬어 달려 드디어 면앙정에 이르렀다.
잡목 숲과 대밭 사이에 가파른 언덕에 만들어진
면앙정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가파르게 경사져 있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옛 어르신을 뵈오려 가는 길에 가뿐 숨을 내쉰들 어찌 힘들다 하겠는가
[俛仰亭(면앙정) 오르는 돌계단]
宋純(송순) 朝鮮(조선) 中宗(중종 28) 조선 명종때의 문신이며, 시인
자는 遂初(수초). 호는 俛仰亭(면앙정), 企村(기촌). 좌찬성을 지냈으며,
작품에는 ‘俛仰亭歌(면앙정가)’ 저서에는 ‘企村集(기촌집)’ 등이 있다.
中宗(중종 28) 1533년 中樞府事(중추부사) 大司憲(대사헌)
관직을 그만두고 鄕里(향리)인 이곳에 와서 면앙정을 건립하고
退溪(퇴계) 李滉(이황)을 비롯하여 江湖諸賢(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유서 깊은 곳이다.
[俛仰亭(면앙정) 전경]
그 옛날 올랐을 면앙정 송순 선생을 떠올리며
돌계단을 올라서니 왼편으로 면앙정 정자가 반겨주며,
오른쪽으로는 수령이 200여년이 된 정자를 세울 때 송순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상수리 나무가 있다.
‘俛仰(면앙)’은 孟子(맹자)에 나오는 말로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는(仰) 정자(亭)’라는 뜻이다.
[俛仰亭(면앙정)]
면앙정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특이하게도
가운데에 한칸의 방이 있고 빙 둘러 주변에는 마루가 놓여있었다.
정자 앞으로 널직한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여유로와 보였다.
송순 선생의 숨결이 지금도 곁에서 들리는 듯
굴참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담양의 넓은
들을 거쳐 이곳까지 와서 나그네의 땀을 씻어준다.
[俛仰亭(면앙정) 현판]
면앙정의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 성수침의 글씨라 한다.
송순은 면앙정 현판 글씨를 받기 위하여
성수침이 사는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갔다 한다.
성수침의 아들이 바로 우계 성혼이다.
[俛仰亭(면앙정)]
면앙정에서 보여지는 멋진 광경을
‘기대승’은 ‘俛仰亭記(면앙정기)’에 남겼다.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백년 살고자 한다’는 곳이다.
면앙정은 간소한 양식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커서 중요한 자료라 한다.
[면앙정 안내판 글 내용]
[俛仰亭(면앙정)]
20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벼슬길에 올랐고,
그 후 60년 동안 조정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사이 몇번의 귀양이나 致仕(치사)등의 일이 있었지만,
송순이 오랫동안 관직 생활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군자다운 인품과 원만한 대인관계 때문이였을것 같다.
이런 연유로 송순 주변에는 명인 학사들이 끊임없이 드나 들었는데
임억령, 양산보, 이황, 김인후, 정철, 기대승, 임제, 고경명….등등
또한 그가 길러낸 후진들이 조선시대 16세기 가사문학의 꽃을 피웠다.
그의 본격적인 문학생활은 귀향 후부터 시작되었으며, 면앙정 또한 이 무렵에
세워진 것이라 추정된다.
[옆에서 담은 俛仰亭(면앙정)]
면앙정을 소재로 한 시가 모두 해서 600여 수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장소를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작품이 나온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면앙정 송순의 높은 인덕과 문학적 기질,
그리고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라 하겠다.
작품들은 한시가 주류를 이루지만,
국문학 가사도 20여편이 있어 면앙정은 우리 국문학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 같다.
정자 안에는 이황. 김인후. 임제. 임억령등과
면앙정에서 본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俛仰亭三十影(면앙정30영)’
‘俛仰亭(면앙정)’ 세 글자를 머리에 넣어서 지은 송순 자신의 시
‘俛仰亭三言歌(면앙정삼언가)’ 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면앙정가를 비롯하여 자상특사황국옥당가 1편, 잡가 2편, 치사가 3편,
면앙정단가, 오륜가가 있는데 이를 보면 그의 면앙정 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가사문학중 최고 걸작중의 하나로 꼽히는 ‘俛仰亭歌(면앙정가)’의
배경인 면앙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순(1493~1582)이
고향마을인 담양군 제월리 뒷산 언덕위에 지은 정자이며, 면앙정은 정자의
이름이면서 송순의 호이기도 하다.
[좌측에서 담은 면앙정 전경]
그가 이 초가 한 칸 정자를 지은 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아래 시는 너무나 유명한 자연시이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송순이 말년에 면앙정을 두고 읊었다고 전해지는 詩이다.
송순의 ‘면앙정가’와 정철의 ‘성산별곡’등이
지어져 담양은 우리나라 시가문학을 대표하는 산실로서
훗날 판소리 생성의 밑거름이 되었다한다.
원래의 정자는 선조 30년(1597)에 임진왜란으로 부서졌고
165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후 몇차례 보수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후에 송순이 이 시들을 모아 쓴 것이 바로 면앙정가이다.
면앙정은 당대 문인들의 활발한 교류장소였으며
호남 가단을 이끈 문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곳 면앙정에서
송강이 쓴 시는 한 수도 보지 못하였다.
대신 ‘면앙 상공의 화교(話敎)한 운에 봉증하다’
는 송강의 시를 올려봅니다.
剔盡巖苔萬丈蒼(척진암태만장창)
만 길 바위벽에 푸른 이끼 깎아내고
暮年棲息有茅屋(모년서식유모당)
늙은 만년 안식처라 초당을 지었구려
仙亭見說牛鳴外(선정견설우명외)
듣자니 신선 사는 정자가 멀지 않는 곳에 있어
秋月春風與更長(추월춘풍흥갱장)
가을 달, 봄바람에 흥취가 길어지네.
한참동안 면앙정 마루에서 면앙정에 얽힌 사연이 담긴
시와 문장을 보고 연연히 이어온 그분들의 정신과 뜻을
떠올려보곤 마루를 내려섰다.
[송순이 심은 상수리 나무와 안내석]
면앙정가비를 다 보고 나서 정자 앞 들판에 있는 참나무 한 그루를 본다.
이 나무는 송순이 정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송순은 90의 생애를 보내면서 여러 가지 공헌을 세상에 남겼다.
곧 학문, 정치, 유학 등에 대한 송순의 공이 크다.
그러나 송순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공은 시가에서 남긴 공이다.
송순은 거의 600여 수에 이르는 한시문과 20여 수의 시조 그리고
불우의 명작 ‘면앙정가’를 창작하여 오늘에 남긴 점이다.
이러한 송순 시문학의 산실이 바로 봉산의 제월리에 있는 면앙정이다.
그 뒤 면앙정은 송순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 뒤 정유외란 때
병화를 입어 소실이 되고, 그 뒤 반세기가 넘도록 빈터로 남아있었다.
이 정유외란 때 송순과 제현들의 시문이 없어진 것으로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정자는 孝宗(효종 5년) 1654 곧 송순이 타계한 지
73년, 정유왜란으로 소실된 지 57년만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니 300년이 넘는 셈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 저를 남편이 담아주었네요.^^]
[俛仰亭歌碑(면앙정가비)]
가사문학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는 선생의
‘면앙정가’ 한 구절을 새긴 시비가 서 있다.
俛仰亭歌碑(면앙정가비)
너럭 바위 위에 송죽을 헤헤고
정자를 언쳐시니 구름 달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 나래 버렷는듯
옥천산 용천산 나린 물이
정자 앞 너븐 들에 올올히이 펴진드시
넙거든 기디마나 프르거든 희디마나
이 노래는 송순선생의 면앙정가중에서 1절이다.
[俛仰亭歌碑(면앙정가비) 글 내용]
임금이 옥당에 보내온 황국화를 보고는 감격하여 지은 시를 소개할까합니다.
風霜(풍상)이 섯거친 나레 갓 피온 黃菊花(황국화)를
金盆(금분)에 가득 다마 玉堂(옥당)에 보내오니,
桃李(도리)야 곳이온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선생의 다른 옛 시조 하나.
곳치 딘다 하고 새들아 슬허 마라.
바람에 흣날리니 곳체 탓 아니로다.
가느라 희짓난 봄을 새와 므삼하리오.
을사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죄 없이
죽어가는 선비들을 보고 지은 풍자 시조이다.
이 시조로 인해 송순은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어느 기생이 연회석에서 이 시조를 가곡으로 부르자
그 풍자 내용을 읽어낸 이가, 작자가 누구인가를 닦달하였으나,
그 기생은 끝까지 함구해서 송순은 무사할 수 있었다한다.
여기서 꽃은 죄없이 죽어가는 선비, 새는 그들을 애처러워하는 이들.
[면앙정 중수기적비]
그가 면앙정을 지은 것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원래 면앙정 터에는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金魚(금어)와 玉帶(옥대)를 두른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오락가락 하는 꿈을 꾼 그는 자기 아들이 벼슬을 할 것이라 여겨 아들을
공부 시켰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집안마저 가난해졌다.
곽씨는 이곳의 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송순이 그 터를 사 놓았다가 나중에 정자를 지었다.
뒷날 이곳이 소위 면앙정 가단을 이루어 당시에 이름난
학자, 가객, 시인들의 창작의 산실 휴식처가 된 것을 보면
곽씨의 꿈은 헛 꿈이 아니였나보다.
곽씨의 꿈대로 면앙정을 드나드는 출입객들은 호남제일의 가단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소세양,
윤두수, 양산보, 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 ‘면앙정제영’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自上特賜黃菊玉堂歌(자상특사황국옥당가)’,
‘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송순의 삶의 철학은 ‘寬容(관용)과 大道(대도)의 철학’을 가지고 살았다.
한 예로 송순의 적자인 두 아들의 이름이 海寬(해관)과 海容(해용)이다.
자식의 이름을 지으면서 宋氏(송씨) 10대손 行列字(행렬자)인 ‘海’의 밑에
취한 글자가 ‘寬과 容은’이다. 이 글자를 합자하면 ‘寬容’이 된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붙여준 이름의 의미소가 관용인 것이다.
이는 자식의 삶에 어버이가 준 가장 큰 교훈과 당부가 寬容(관용)이라는 뜻이다.
송순의 애제자 정철은 공이 타계하자 가장 먼저 영전에 달려와서
스승의 삶이 ‘大道(대도)’에 있었음을 祭文(제문)으로 지어 남기기도 했다.
송순의 관용과 대도의 삶은 벗과 제자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 가까이 다가오도록 만들었다.
한 예로 1579년, 송순이 87세 때 있었던 回榜宴(회방연)의 고사이다.
[면앙정에서 담은 내려가는 길]
임금 宣祖(선조)는 축하의 꽃과 御酒(어주)를 내리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하였다.
밤이 되어 송순이 취하여 처소로 돌아가려고 하자 정철이 제의를 하였다.
‘선생을 위하여 직접 藍輿(남여)를 메어드리자’는 것이다.
정철, 고경명, 임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시에 가마를 붙들고
옹위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대에 없는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송순의 관용과 대도의 삶은 곧곧한 선비들로 하여금
선생을 위해서 가마를 메는 돌쇠를 자청하게 했었다.
데레사
2016년 4월 29일 at 7:33 오전
오늘은 댓글이 제대로 올라갈려나 모르겠어요.
전라도 까지 가셨군요.
담양은 소쇄원밖에 못 가봤어요.
댓글 달때 마다 올라가나 안올라가나 걱정이 되서….
초아
2016년 4월 29일 at 7:57 오전
올라왔어요.^^
담양에는 볼거리가 참 많아요.
특히 정자는 더 많구요.
이제 날도 풀리고 하였으니
열심히 답사 다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