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좌측에서 담은 묵계서원 전경]
寶白堂(보백당) 金係行(김계행, 1431~1517) 과
凝溪(응계) 玉沽(옥고, 1382~1436)를 봉향하는 서원으로
보백당 김계행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3년(1687)
후손들이 세워 유생들을 교육시켰던 곳이다.
[進德門(진덕문) 현판]
[서원의 외삼문인 進德門(진덕문) 전경]
서원의 외삼문인 進德門(진덕문)이 잠겨 있기에,
다른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좌우측을 살펴보았다.
[우측에서 담은 안내판과 외삼문]
[묵계서원 안내판 글 내용]
[묵계서원 안내판 영문 글 내용]
[담너머로 담은 묵계서원]
[서원옆 고직사 전경]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없어졌다가 다시
세워졌으나, 고직사는 그대로 남아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挹淸樓(읍청루) 현판]
[담너머로 담은 挹淸樓(읍청루)]
挹淸樓(읍청루) 누각은 막힌 벽이 없이
여러개의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탁터인 구조이다.
[담너머로 담은 묵계서원 전경]
본관 안동. 자 取斯(취사). 호 寶白堂(보백당).
세종 29년(1447)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金宗直(김종직)과 교유하였다.
성종 11년(148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담 너머로 담은 克己齋(극기재) ]
고령현감. 副修撰(부수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三司(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연산군 때 大司諫(대사간)에 있으면서 척신들의 비위를 논박하였으나,
시정될 가망이 없음을 알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豊山(풍산)에 은거하였다.
거택 옆에 작은 정자를 지어 보백당이라 이름 짓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서 寶白先生(보백선생)이라 불렸다.
[담너머로 담은 읍청전뒤 전경]
다행히 서원으로 통하는 협문이 열려 있기에
그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서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克己齋(극기재) 현판]
[克己齋(극기재) 전경]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큰 화는 면하였다.
철종 10년(185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定獻(정헌)이다.
[默溪書院(묵계서원) 현판]
[默溪書院(묵계서원)]
고종 6년(1869)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 건물 등을 복원했다.
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默溪書院(묵계서원) 강당]
[立敎堂(입교당) 현판]
[묵계서원 내삼문 전경]
[淸德祠(청덕사) 현판]
[담너머로 담은 淸德祠(청덕사)]
[담너머로 담은 淸德祠(청덕사) 전경]
[서원쪽에서 담은 입구쪽 전경]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10년이나 섬겼던 그의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인품이 어떠하셨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인것 같다.
데레사
2016년 5월 3일 at 7:55 오전
안동 김씨네 종가집을 찾아 다니던 여행을 한적이 있어요.
그때 묵계서원을 갔었는데 안에는 못 들어갔어요.
문이 닫혀 있어서.
지금 안동에 사과꽃 피어 있었는지요?
사과꽃 핀 봄날의 안동을 다시 가고 싶은데..
초아
2016년 5월 3일 at 7:52 오전
정문인 외삼문은 닫혀 있었지만,
담을 따라 올라가면 중간쯤에 있는 협문은
열어두었드라구요. 그래서 들어가서 담아왔지요.^^
사과꽃요? 벌써 폈지요.
지금쯤은 아마 지고 있을것 같은데요.
또는 지금 막 개화하기 시작한 곳도 있을거에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