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판교1리(애일당 터)
[시비 안내팻말]
이곳에서 조금 헷갈렸다.
어디에도 시비가 있음직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여쭈어 볼만한 사람도 없고, 포기하고 갈까 하다가 행여나 하고
사진으로 보이는 건물이 10월 펜션인데, 펜션 뒤쪽으로 내려가니
시비가 있는게 멀리 어름풋이 보였다.
[시비 전경]
반가움에 걸음은 빨라지고…
[멀리서 담은 허균 시비 전경]
許筠(허균, 1569년∼1618년) 조선시대 문신 소설가.
자 端甫(단보), 호 蛟山(교산) 惺所(성소) 白月居士(백월거사). 본관 양천.
아버지 초당 허엽의 둘째 부인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형 筬(성)과 蓬(봉)과 누이 蘭雪軒(난설헌) 모두가 한시에
이름을 날려 명의 尙書(상서) 전목재도
“허균은 그의 형 봉, 성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라고 찬탄할만큼 그의 시적 정서와 재질이 선천적으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가까이서 담은 시비 전경]
선조 27년(1594) 문과에 급제, 1597년 문과 중시에 정원 내외직을
역임한 후 벼슬이 좌참찬가지 올랐고, 정부사로 명나라에 5차례나 다녀왔다.
[시비 뒷면]
시문에도 뛰어났고, 소설, 희곡, 비평 등에도
조예가 깊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과 문집인 ‘성소부부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평론집인 ‘학산초담’과 기타 ‘성수시화’등이 있다.
사회제도의 모순과 정치적 부패상을 질타하고, 정치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시비에 새겨진 글]
12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래 그의 형과 누이 등이
모두 요절하는 비극을 겪었고, 오십이 되던 해에 능지처참 형을 당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허균은 홍길동전과 같은 꿈을 꾸었는지 모르지만
말년에 역도로 몰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가 죽은 후 허씨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그의 무덤조차 전해오지 못하게 되었는데,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에 문중에서 조성한 가묘가 전해올 뿐이다.
[시비 앞면]
비문 앞면에는 하학 김동욱이 번역하고 쓴 허균의 싯귀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문학박사 소재명이 짓고 정양완이 쓴 글이 적혀 있다.
[蛟山(교산) 詩碑(시비)]
빈 항아리 차를 거우르고
한잡음 향 피우고
외딴집에 누워
견곤고금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살지 못할니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져
라는 시가 쓰여져 있다.
과연 허균이 꿈꾼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시비쪽에서 담은 앞 전경]
이곳에 왜 시비를 세웠을까?
궁금하여, 알아보았더니…
허균은 외가인 사천면 판교리 애일당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상당한 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하네요.
외가집 앞산의 산새가 흡사 이무기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해서 산 이름을 蛟山(교산)이라 불렀으며, 허균은
자신의 호를 蛟山(교산)이라 스스로 지어 불렀다 한다.
현재 이 시비가 서 있는 자락이 蛟山(교산)이다.
[왕벚꽃]
왕벚꽃이 활짝 펴서 유혹을 하네요.
결국은 홀려서 한참을 노닐다 왔습니다.^^
[몇장면을 담아 애니메이션으로 편집]
[짙어가는 풋풋한 새잎]
애일당의 터만 남아 있어 흔적은 찾기 어렵고
그곳에 허균을 기념하는 시비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데레사
2016년 5월 12일 at 10:28 오전
이 시비는 생가와 그 근처 공원에 있는게 아닌가 보군요.
나는 안 가본것 같아요.
집에서만 있기에 심심해서 오늘은 수영이나 하고 올려고
나갑니다.
초아
2016년 5월 12일 at 6:52 오후
허난설헌 생가와는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저도 이번이 초행이었습니다.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찾아갔지요.
그렇게 하셔요. 집에만 계시지 마시구요.
수영도하고 산책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심심하지 않게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