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2리 502
시도민속자료 제54호
[陶巖亭(도암정) 전경]
봉화읍 들어서기 직전의 한적한 거촌 황전마을에는
1650년 조선 효종 때 문신이였던 黃坡(황파) 金宗傑(김종걸, 1628~1708)이
세운 陶巖亭(도암정)이 있다.
당대의 유림들이 모여 時流(시류)를
논하고 풍류를 즐기며 交遊(교유)를 다진 곳이다.
김종걸 선생은 학식이 높았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팔도에 유명했다.
死後(사후)에 儒林(유림)의 추천으로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인물이기도다.
[陶巖亭(도암정) 현판]
[陶巖亭(도암정)]
유림들이 세상사와 시를 읊던 곳으로
남향 건물이며 앞에는 인공섬을 갖춘 연못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식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홑처마이다.
[도암정 옆 쉼터]
아름드리 느티나무(수령 300여년)가 여름한철이면
그 세월 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으로 그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쉼터에서 시원하게 쉴수 있도록 해 줄것같다.
‘孝(효)는 百行(백행)의 根本(근본) 경상북도 효시범마을’
이란 작은 碑(비)도 세워져 있었다.
고색창연한 옛집들 사이로 잘 꾸며진 정원과
채소밭과 돌담길이 정겹게 오밀조밀 들어앉아 있는
이 황전마을은 봉화군의 전통문화체험마을의 하나로 선정이 되기도 했다.
연못과 함께 陶巖亭(도암정)을 운치있게 꾸며주는 것은
아무래도 정자 바로 옆에 서 있는 늙은 느티나무와 아름드리 바위다.
[안내판 글 내용]
[陶巖亭(도암정) 현판이 걸린 정자 안 모습]
선생은 효종때의 대표적인 문신으로 學問(학문)과
德行(덕행)뿐만 아니라 孝誠(효성)이 지극하여 팔도에 알려졌다.
그 한 예로 부모님의 병을 고치기 위해
小太山(소태산)에 祈天壇(기천단)을 設置(설치)하고
7일간 禁食(금식)하며 하늘에 기도한 후 藥(약)을 구하러 나서니
호랑이가 길을 引導(인도)하여 名藥(명약)을 얻어 부모의 病(병)을
고쳤다는 美談(미담)이 전해져 내려온다.
사후에 儒林(유림)의 추천으로
同知義禁府事嘉善大夫吏曹參判(동지의금부사가선대부이조참판)을 追敍(추서)받았다.
[협문쪽에서 담은 陶巖亭(도암정)]
이곳 황전은 누른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연유는… 옛날에 이 동네 앞산에 황학이 떼를 지어 서식을 했다고 한다.
그 황학들이 마을 밭 에 내려와 앉아 있으면 온 들이 누렇게 아주 장관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모습을 보고 황전이라고 불렀다한다.
지금은 의성 김씨 집성촌입니다만
본래는 영양 남씨가 살던 마을이었다 한다.
지금으로부터 사 오백 년 전 어느 날 의성 김씨 중시조되는
무과급제 훈련원 삼사 관실부호군인 김흠이 시종을 데리고 이 마을 뒤
구봉산에 올라 매를 날리며 꿩사냥을 하였는데, 산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매에게 쫓긴 꿩이 황전의 진사 남구수네 집으로 날아들어 갔는데, 그의 딸이
꿩을 감추어 두었다가 매가 가고 난 뒤에 그 꿩을 살려 보내는 광경을 보고
아주 후덕한 규수라 여기고 청혼을 하였다고한다.
그리고 남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전에 와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남씨가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 20년이 채 못 가서 한 집도 남지 않고
다 떠나버려서, 의성 김씨가 자리를 잡게 되었 다고 한다.
[좌측 뒤에서 담은 陶巖亭(도암정) 전경]
지금도 황전에서는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 다고 해서
외손은 물론 타성도 살지 못하고 바깥 마을로 옮겨 가서 산다고 한다.
진사 남구수 선생이 지어 살던 경암헌고택(민속자료 제 53호)도
사위에게 물려져 지금까지도 황전 의성 김씨 종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자옆 쉼터의 느티나무]
정자 앞의 연못, 인공섬, 큰 바위들과 노송 등
주변 경관과 정자가 잘 어우러졌지만, 특히 연못 한가운데
만들어진 當洲(당주, 작은섬)의 소나무가 운치있게 하늘향해
뻗어있는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미관을 잘 드러낸 건물이라 한다.
[가까이에서 담은 도암정 전경]
[다시 담아 본 陶巖亭(도암정) 전경]
글 공부에 여념이 없던 선비들이 정자 앞에 연못을 파서 만든것이나,
그 연못 가운데에 인공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어 가꾼 것을 보면
옛 사람들의 자연과 풍류에 대한 안목이 얼마나 깊이 있는 것이였는지 충분히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