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35 (천전리)
경상북도 기념물 제137호
[입구쪽에서 담은 白下舊廬(백하구려) 전경]
이 가옥의 堂號(당호)인 白下舊廬(백하구려)는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헌신한
백하 김대락(1845~1914)선생이 42세(1855)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하구려는 백두산 아래에 살았던 김대락 지사의 옛집이라는 뜻이다.
김대락 지사는 무려 65세나 되는 나이에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꾼 후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일제에 맞섰던 지사이다.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白下舊廬(백하구려) 현판]
[좌측에서 담은 白下舊廬(백하구려) 전경]
백하의 웃대 鎭麟(진린) 호 愚坡(우파)공이 道薦(도천)으로 都事(도사)를
지냈으므로 세칭 ‘도사댁’이라 하는데, 지례의 지촌댁, 망천의 화동댁과 함께
‘글 안 빌리고, 제수祭需 안 빌리고, 말[馬] 안 빌리는’ 三不借(삼불차)의
집이라 하여 渡滿(도만) 이전까지는 형세 좋기로 인근에서 으뜸으로 여겼다.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안채로 통하는 중문]
이 집은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1845∼1915) 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있는 집이다.
그의 나이 42세(1885)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옛집이다.
[열린 안채 중문]
가옥은 앞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층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래층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안채]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앞채의 아래방에 접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장식하였다.
[우측에서 담은 白下舊廬(백하구려) 전경]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아래방·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
[뜰에핀 자목련]
감시를 피하여 도만 길에 올랐을 때,
만삭 잉부의 몸인 손부를 소달구지에 싣고 북만주 그 먼 길을 떠났다.
타고 걷기 달포 넘는 고단한 길 끝에 압록강을 건너고,
손부가 해산하자 태어난 아이의 아명을 ‘快唐(쾌당)’이라고 짓는다.
원수 일제의 아귀를 벗어나 중국에서 아이를 얻으니 통쾌하다는 뜻이다.
[뜰에 핀 자목련 2]
1912년 2월 초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한 백하는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6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열어 후일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는 많은 군인들을 길려냈으며
간도참변으로 한인사회가 무너진 1920년까지 독립군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하는 1911년1월 6일부터 1913년 12월30일 까지의 파란 많은
망명 여정을 그린 ‘백하일기’에 이같은 내용을 소상하게 남기고 있다.
백하란 호는 백두산 아래에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뜰에 핀 모란]
백하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이들 중 맏이는 석주 이상룡에게 출가
막내는 기암 이중업에게 출가, 響山(향산) 李晩燾(이만도)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이가 바로 안동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金洛(김락) 여사이다.
의병장 시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시숙부와 남편을 모셨고,
나라를 잃자마자 단식 끝에 순국한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켰고,
만주로 망명하는 친정 오라버니(김대락)와 조카들,
그리고 큰형부 이상룡과 언니를 눈물로 이별해야 했다.
3.1운동 때에는 그 자신이 예안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은 뒤, 11년 동안 통한의 세월을 보내며 두 번이나 자결을 시도했던 여인이다.
그 자신(애족장)을 포함, 시아버지 이만도(독립장), 남편 이중업(애족장),
아들 이동흠(애족장) 등 3대에 걸쳐 8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친가를 포함하면
훈장과 표창 등 위훈을 추서 받은 독립 지사가 무려 26명에 이른다 한다.
[도로에서 담은 백하구려 전경]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그의 애국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선생의 묘는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한다.
데레사
2016년 6월 13일 at 7:52 오전
백하구려, 당호 치고는 좀 특이하네요.
초아님 덕택에 나도 따라서 안동귀신 다 되었습니다. ㅎㅎ
초아
2016년 6월 13일 at 10:24 오후
죄송합니다. 답글이 늦었습니다.
저 덕에 안동귀신요?
그럼 전 원조안동귀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