筆巖書院(필암서원)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사적 제242호

DSC00892[筆巖書院(필암서원) 전경]

장성읍 고속도로 톨게이트 교차로에서 함평 가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장성읍에서 약 8km 떨어진 필암마을에
경상도 안동문장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장성문장 필암서원이 있다.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선조 23년(1590)에 河西(하서) 金麟厚(김인후, 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42)에 다시 지었다.
유생들의 소청으로 현종 3년(1662) 임금께서 ‘筆巖書院(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사액서원’이 되었다.

호남의 으뜸가는 선비로 추앙받는
河西(하서) 金麟厚(김인후)선생을 모셨으며,
현종 13년(167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울 때에
그의 사위인 梁子徵(양자징)을 추가 배향하였다.

사대부의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확연루 앞에는 수령 200년된 은행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DSC00893[홍살문과 筆巖書院(필암서원)]

河西(하서) 金麟厚(김인후,1510 – 1560),
호. 河西(하서), 湛齋(담재). 시호. 文正(문정).
河西(하서)는 전남 장성 출생으로 본관은 蔚山(울산).

성균관에 들어가 李滉(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博士(박사), 說書(설서), 副修撰(부수찬)을 지냈다.

그는 김안국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과 교류하면서
심성학을 연마하였고 을사사화 후에는 퇴거하여 출사하지 않고
오직 誠(성), 敬(경)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서원 앞에는 신성한 구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DSC00897a[필암서원 배치도]

DSC00896a[건물 배치도와 안내 글]

IMG_4974a[廓然樓(확연루) 현판]

廓然樓(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IMG_4952[廓然樓(확연루)]

그가 살았던 시대는 훈구 재상들이 젊은 문신들을
내몰아 죽이거나 혹은 유배시켰 던 때이며 기묘사화가 일어나
참화를 당했던 일군의 뛰어난 학자들이 정치 사회 혼란 속에서
뜻을 펴지 못한 채 은거하여 독서에만 전념하던 시기이다.

그 외에도 천문, 지리, 율력에 밝아 주역관상편을
비롯하여 여러 저술과 시문집인 河西集(하서집)을 남기고 있다.

사원 동북쪽 담장 밖에 있는 장판각에는 金麟厚(김인후)선생의
문집인 하서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 등 1300여권의 책과 보물 587호인 노비보 등이 보관되어 있다.
확연루 오른쪽 문은 입구 왼쪽문은 출구

DSC00895a[확연루 안내글]

DSC00900a[筆巖書院(필암서원) 현판]

筆巖書院(필암서원) 편액은 屛溪(병계) 尹鳳九(윤봉구)의 글씨다.

DSC00899[筆巖書院(필암서원)]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20년 되던 해 동궁에 대화재가 났다.
아무도 조광조 등 사림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거론을 못하던 때
하서가 나서서 왕에게 군자의 도를 전언했다.

“예로부터 善治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며,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의 기묘사화는 죄가 아니심을 밝히시고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정의와 악을 잘 가려서 사회기강을 세우시옵소서.”

그러나 중종이 이 상소를 흔쾌히 윤허하지 않자
하서는 부모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니 옥과현감에 제수되었다.

IMG_4959[敬藏閣(경장각)]

하서 김인후선생을 문묘에 배향코자 할 때 정조대왕께서
內帑金(내탕금)으로 敬藏閣(경장각)을 세웠으며 인종이 하사하신
御筆墨竹(어필묵주), 墨竹圖(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柱心包(주심포)식 팔작지붕으로
귀공포와 네 모서리에 3마리의 용머리가 돋보인다.
액호는 정조의 어필이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친필 초소이므로
벌레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이 쳐져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 매년 4월에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春享祭(춘향제)가, 9월에는 秋享祭(추향제)가 열린다.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1545년 겨울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하였다.

실망을 떨치고 심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하여
‘태극도설’‘서명’을 완역해 수천번 읽더니 48세 때 ‘주역관상도’,
‘서명사천도’를 저술하고 이를 배우는 자들에게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강기니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죽통을 부레로
연결시켜 둥근 하늘의 형체같이 만들고 배분을 사용하여 그 위에 그리되
일월성신이 북극을 잡고 빙둘러 한바퀴 돌면 좌시하는 형상의 도표를 짜냈다.

우주의 진리를 과학을 이용해 풀어내는 작업을 16세기 이 선현이 해낸 것이다.
특히 하서는 저서를 통해 유교적 입장에서 불교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불교의 출가 삭발은 제 몸 하나 편하자고 천리를 어겨
인륜을 끊고 부모에게 받은 몸을 해하는 것으로 큰 불효라고 말했다.

꺼진 불이 다시 타지 못하고 마른 물이 다시 흐르지 못하는 것처럼
물질의 질료라 할 수 있는 氣가 없어지면 그에 따라 그 물질의 존재와
운동의 까닭인 理도 없어지기 때문에 사람은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살다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는 것이라하였다.

남원 露峯書院(노봉서원), 玉果(옥과) 詠歸書院(영귀서원) 등에도 배향되었다.

DSC00907a[경장각 안내 글]

DSC00908[사묘]

청절당 뒷편 중앙에는 사묘로 들어가는 신문이 있었지만,
이곳은 굳게 닫혀있어서 밖에서만 보고 돌아왔다.

IMG_4960[進德齋(진덕재)]

동쪽에있는 동재인 進德齋(진덕재)이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IMG_4961[崇義齋(숭의재)]

서쪽에있는 서재인 崇義齋(숭의재)이다.
그 뒷편 서측의 숭의재와 동측의 진덕재는 영조와 고종 때
개수된 것으로 서원의 동서재를 이루고 있는데 재호는 모두
동춘 송준길의 글씨며, 각기 6칸으로 대청과 좌우에 협실이 있다.

IMG_4950a[淸節堂(청절당) 현판]

DSC00912[淸節堂(청절당)]

문루를 들어서면 단층와가인 강당 淸節堂(청절당)이 보이는데,
이 건물에는 9칸 대청과 좌우 3칸의 夾室(협실)이 있고, 대청에는
同春(동춘) 宋浚吉(송준길)의 편액이 있으며, 처마 밑에는
屛溪(병계) 尹鳳九(윤봉구)의 글씨로 사액된 ‘筆巖書院(필암서원)’
이라는 편액이 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삼아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시와 문장에 뛰어나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고,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로, 창건당시부터
보존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인조 2년(1624)부터 1900년경까지의 자료들이다.

DSC00901a[청절당 안내 글]

DSC00911[우동사]

사묘인 4칸반의 우동사가 있다.
북변에는 하서를 동벽에는 고암을 모시고 있다.

지정된 유물을 보면,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 ‘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
‘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 ‘필암서원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 ‘장성부사하첩’등이다.

이것들은 필암서원의 운영과 구성을 살펴 볼 수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지방교육제도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IMG_4962[藏版閣(장판각)]

유생들의 학습을 위한 책판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하서선생 사후 3차례에 걸쳐 간행된 하서선생 文集(문집) 649판,
호방용무하게 초서로 남긴 ‘草千字文(초천자문)’ 18판, 초학자의 학습을
위하여 매 글자마다 음을 달고 뜻을 풀이한 ‘百聯抄解(백련초해)’ 13판,
‘筆法(필법)’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6호로 지정된 판각들이 보관되어 있다.

DSC00910a[장판각 안내 글]

IMG_4973[서원 안에서 담은 廓然樓(확연루)]

하서 김인후는 시와 시조를 잘 짓기도 하였는데
‘자연가’‘소쇄원48영’ 시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 중 ‘자연가’ 한 수를 올려봅니다.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청산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녹수)도 절로절로

山自然 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산 절로 물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己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이라, 늙기도 절로 절로하리라.

IMG_4976[확연루 아랫 출입문]

선생의 저서 : ‘周易觀象篇(주역관상편)’ ‘西銘四天圖(서명사천도)’
‘百聯抄解(백련초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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