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 24-29번지
[퇴계 이황선생 묘]
退溪(퇴계) 李滉(이황, 1501~1570)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동방18현의 한사람,
본관 진보, 호 退溪(퇴계), 도산 온혜리에서 좌찬성
李埴(이식)과 춘천박씨 사이의 7남1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묘와 상석과 묘비]
6세에 천자문, 12세에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우고
특히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였으며, 20세에는 주역공부에 몰두하였다.
27세에 진사, 성균관에 들어가 사마시에
급제한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官界(관계)에 진출 하였다.
박사. 전적. 지평. 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을사사화 후
건강을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고 46세에 고향인 토계(하계)에
양진암을 지어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묘비]
묘비의 방향이 전면이 아니고 측면이다.
퇴계선생은 1571년 12월 8일 71세로 돌아가시기 전날
장조카를 불러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것,
비석은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세길것,
유밀과를 쓰지말것등을 유언으로 당부하였다 한다.
후손들이 예장을 거절하였으나 조정에서 재차 예상을권고하여
어쩔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하며 그래서 비석에 관직을 새기지 않았고
비석위치도 정면을 향하지 아니하고 옆으로 향하여 세웠으며 그 뜻을 받들어
지금도 후손들은 제수를 간단히 준비하여 검소한 제례를 지낸다고 전하고 있다.
[묘비와 문인석]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그 뜻은
‘늘그막에야 도산에 물러나 숨어산 진성 이공의 묘’
라는 뜻이며, 퇴도만은은 퇴계의 호이고, 진성이씨는 본이다.
[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언뜻보아서 초라하지도 호화롭지도 않은나
예사롭지 않은 소박한 묘소임을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다.
퇴계 묘소와 관련한 일화를 소개하면 퇴계선생 사후
宣祖(선조)가 국가의 이름난 지관을 보내어 묘지를 물색토록 명하여,
지관이 도산에 도착하여 여러날을 인근 산천을 답사한 끝에 건지산골에
‘황룡도강’의 명지를 잡아 싸리나무를 묶어 표시를 해 두었다.
바로 황룡이 강을 건너는 형국인 ‘황룡도강’의 명당이 었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2]
다음날 제자들이 퇴계선생의 묘소는 예장을 하지 말라는
유계에 따라 제자중에서 월천 조목이 물색한 지금의 묘소로
장사 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인근의 사람들이 필요없게 된 ‘황룡도강’의
명당터를 너도 나도 먼저 차지하려고 건지산골에 올라가니
온 산천이 싸리나무로 묶여 있어서 어느곳이 진짜 명당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하며 아직까지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명당을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Pingback: 退溪宗宅(퇴계종택)과 詩碑(시비)동산 - 草阿(초아)의 삶과 그리움
초아
2016년 7월 21일 at 6:15 오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