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월항면 대산리 421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4호
[凝窩宗宅(응와종택) 표지석]
성주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의 집성촌이자 한옥보존마을이다.
북비고택은 한개마을의 ‘터줏대감’ 집이다.
한개마을의‘한개’는 ‘큰 나루’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라 한다.
옛날 낙동강 물길을 따라 이동하던 나룻배가 백천의 물길을 거슬러서
이 마을 앞까지 오르내렸으며, 당시 교통의 요충지이자 큰 나루터를 끼고 있던
한개마을은 경상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백천은 작은 쪽배 하나도 떠다니기가 어려울 만큼 수량이 적어서
옛날의 나루터 풍경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북비고택은 별도의 살림채로 담장을 두르고, 대문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를 대지 안에 구성하고 있다.
대문채를 통해 본가에 들어서면 사랑채와 마주하는
‘北扉(북비)’의 일각문을 통해 남쪽으로 북비고택이 있고,
사랑마당을 통해 행랑채를 거치면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한개마을의 다른 가옥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모든 동선이
대문채 – 사랑마당 – 행랑채 – 안마당 – 안채의 순서를 따른다.
마을의 대부분의 가옥이 18세기 후반 이후에 지은 것이어서
이미 조선시대의 중심사상인 성리학이 무너지는 조짐이 보인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실제 다른 지역의 18세기 이후의 가옥을 보면 오히려
내외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 집의 배치를 보이는 점과 비교할 때
북비고택에서 보이는 사랑마당을 통한 안채의 출입은 한개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여겨진다.
북비고택도 일부 행랑채 등이 소실되어 공간이
허허로운 점도 있지만 전체 동선의 흐름 등을 볼 때
전체 배치의 아름다움보다는 각 채의 모습이
아름다우나, 사랑채가 더 아름답다.
사랑방과 대청, 툇마루의 구성이 치밀하고 대청에서
바라보는 마을의 전경은 이 집이 사랑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안채는 일반적인 남도의 평면구성으로 짜여 있고,
툇마루에는 다시 문을 달아서 한옥의 자연스런 변천을 보인다
내력 깊은 한개마을에서는 이름난 선비와 학자도 여럿 배출되었다.
조선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으로 평생토록 절의를 지킨 돈재 이석문.
조선 말기에 성주를 빛낸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응와 이원조.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유명한 한주 이진상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현재 한개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과
옛 건물에도 이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순조 21년(1821) 손자인 사헌부 掌令(장령) 奎鎭(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신축하였으며, 사랑채는 그후 증손이며 한말의
유학자로 공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지낸 源祚(원조)에 의하여
고종 3년(1866)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藏版閣(장판각) 1채, 안 대문채, 馬房(마방),
아래채는 멸실되었으며, 독립사랑채, 안채의
口자형배치 및 솟을 대문 등은 당시 高官家屋(고관가옥)의
특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비교적 연대를 믿을 수 있는
건물로 韓屋住宅史(한옥주택사) 편년에 기준이 될 중요한 자료이다.
북비고택과 관련된 실존인물 이석문(1713~1773)을
주인공으로 한 대하소설인 ‘北扉(북비)’가 발간돼 주목받고 있다.
‘북비’는 북쪽으로 난 여닫이 외문짝이라는 뜻으로
한개마을의 北扉古宅)(북비고택)을 택호로 사용한데서 연유하고 있다.
이석문은 호를 遯齋(돈재)라 했으나 北扉公(북비공)으로
더 알려져 있는 인물로, 영조 15년(1739) 27세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으로 활약했다.
북비공은 1762년의 임오화변에 사도세자의 참변을
직접 목격하고 영조에게 잘못이라 간하였으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세손을 업고 어전에 나아가 세자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낙향한 北扉(북비) 이석문의 고택에는 북쪽으로 문을 내고
세자가 묻힌 북녁을 향해 매일같이 절을 올렸던 충절의 신하였다.
영조가 지난 일을 후회하며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세종 때에 이우가 처음 마을을 조성한 뒤로 약 500년의
내력을 이어온 한개마을에는 지금도 수 백년 된 고택이 여럿 있다.
교리댁,북비고택, 월곡댁, 진사댁, 하회댁, 극와고택 등의
고택과 고택을 이어주는 고샅길에는 전통미와 자연미를 물씬
풍기는 돌담이 길게 둘러쳐져 있다.
대문마다 빗장을 채우지 않아 낯선 나그네가 불쑥
들어가 구경해도 나무라지는 않겠지만,들어가기가 조심스럽다.
대문에 붙어있는 ‘개조심’이라는 글과 낯선 나그네가
들어서면 컹컹 큰 소리로 짓는 개들이 고택의 정막감을 깨운다.
이 북비고택은 사랑채 마당에 잔디를 깔아놓아
퍽 깔끔해 보이고, 안채 마당의 한쪽에는 가지런히
돌담을 두른 장독대가 아주 인상적이다.
[遯齋(돈재) 李公神道碑(이공신도비) 전경]
북비 고택 앞 길건너에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 안내석 글 내용]
李碩文(이석문) 자 士實(사실) 호는 돈재다.
1762년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의 반목으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할 때 왕명을 무릅쓰고 세손(후일의 정조)을
업고 들어가 영조에게 부당함을 간하다
곤장을 맞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무괴지심(떳떳하고 부끄러움 없는 마음)이란
편액을 벽면에 써 붙이고 조석으로 대좌하며 두문불출 하였다.
후일에 영조가 다시 훈련원주부를 제수하고 조정의
대신들이 출사를 권유 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에 병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그의 손자 이규진이 장원급제 했을 때 정조가 특별히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
고 하였다.
[李公神道碑(이공신도비)]
데레사
2016년 7월 29일 at 2:37 오후
그러고 보니 상주땅을 밟아 본적이 없네요.
직장의 후배 한사람이 지금 상주로 귀향해서 농사짓고
있는데 다녀가라고 하지만 허리가 아파서 못 갔지요.
이제 좋아지면 한번 가야겠어요.
더위 잘 나시기 바랍니다.
초아
2016년 7월 29일 at 5:22 오후
완쾌되신다면, 한번 다녀오셔요.
상주에는 다녀올 곳이 많아요.
*
성한사람도 견기기 힘든 무더위
해복중이라해도 힘드실거에요.
힘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