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203-2
시도유형문화재 제7호
[홍살문과 심곡서원 전경]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靜庵(정암) 趙光祖(조광조, 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49)에 세워 ‘深谷(심곡)’이라는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으며,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본관은 漢陽(한양), 자 孝直(효직), 호 靜庵(정암).
조선 개국공신 溫(온)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元綱(원강)이다.
17세 때 魚川察訪(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金宏弼(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웠다.
처음에는 그의 위패를 모현면에 있는 鄭夢周(정몽주)를 배향하던
忠烈書阮(충렬서원)에 모셨다가,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이곳으로 옮겼다.
설립과 함께 사액을 받았으며, 梁彭孫(양팽손)을 추가 배향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안내판과 심곡서원 안내표석]
[深谷書院(심곡서원) 현판]
[深谷書院(심곡서원) 외삼문]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 외삼문, 강당인
일소당,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현재 심곡서원이 위치한 곳은 본래 靜菴(정암)선생이
부친의 장례를 모신 후 여막을 짓고 侍墓(시묘)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후 1974년 10월15일
외삼문을 해체 복원한 것을 비롯, 강당과 내삼문, 정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한다.
[日詔堂(일조당)]
일조당은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合閣(합각) 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木板壁(목판벽)으로 각 칸마다 板子門 扉(판잠문비)를
달아 사면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강당은 원내의 여러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 안쪽 벽에는 숙종어제어필의 현판을 비롯하여
서원의 規約(규약). 重修記(중수기). 題詠(제영)등이 걸려 있다 한다.
[일조당 뒤 藏書閣(장서각)]
심곡서원에는 齋室(재실)이 없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교육공간으로서 보다는 제향위주의
서원으로 주목되면서 재실의 의미가 적어진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당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었고,
대신 주변에 장서각등을 필요에 따라 마련된 것이다.
[일조당 뒤 治事齊(치사제)]
조선시대 중종조에 개혁을 추구하다 참화를 당한
개혁가 조광조. 그의 개혁은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번째는 향약을 바탕으로 한 지방자치이고,
두번째는 현량과를 통한 인재등용,
세번째는 기득권층인 공신들의 제거였다.
道學政治(도학정치)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勳舊(훈구)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일조문에서 담은 외삼문]
중종반정 공신들 중 대다수가 거짓 공훈으로 공신에
올랐다 하여 이들의 거짓 공훈을 박탈하고자 하였으나,
자신들의 거짓 공훈이 삭제될 것을 두려워한 훈구파 신하들이
오히려 조광조를 무고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남곤, 심정 등의 무고를 받은
조광조는 전남 능주(지금의 화순)에 유배되어 1519년(기묘년)에
사약을 받고 숨졌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인종 원년에 복권되고 선조대에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文正(문정)’의 시호를 받았으며,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5현’ 이라 일컫기도 한다.
[심곡서원 내삼문 전경]
대개의 서원이나 향교의 문은 닫혀있는 곳이 많다.
이곳도 닫혀있어서…밖에서만 올려다 보고 돌아서야 했다.
하긴 항상 열어두는 것은 관리하기에 힘들 것 같다.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게 되면 훼손도 문제며, 주위의 경관도 손상되기 쉽다.
문화재급 기물들을 훔쳐가기도 한다니…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재를 아끼고 소중히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언젠가는 활짝 열어둘 날도 있으리라..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쪽을 보고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보호수]
[보호수 안내글 내용]
원내에는 수령 5백년의 느티나무가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 되어있다.
[인증샷]
보호수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부터 있는 건지, 아니면 근래에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진찍어준다며 자꾸 서라고 재촉하는 옆지기의 성화에 얼른 포즈를 취해보았다.
[서원쪽에서 담은 홍살문 전경]
개혁의 거두 조광조 선생을 기리기위해 세워진
심곡서원 바로 건너편에는 선생의 墓(묘)도 이곳에 있다.
데레사
2016년 8월 5일 at 7:23 오전
저 동네 친구가 살아서 더러 가는데
이런곳이 있는줄은 몰랐네요.
오는은 어제보다 더 더울거라 해서
이침부터 걱정입니다.
초아
2016년 8월 5일 at 7:33 오전
더러 가셨다구요.
요즘 같았으면 둘러보셨을텐데..
그땐 친구와의 만남이 더 좋았겠지요.
완쾌되시면 친구도 만날겸 들려보셔요.^^
*
대구 더위아시죠.
겨우 숨만 쉽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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