具常(구상) 文學館(문학관)

소재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5-84

DSC07536[具常(구상) 文學館(문학관)]

시인은 유달리 물과 강을 사랑했다.
어린시절 자랐던 원산 덕원마을 앞 들판을
유유히 흘러 가는 적전강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은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었다는 시인은 강에 대한 상념을
종종 詩의주요한 소재로 삼곤 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 왜관으로 흘러온 시인은
아예 낙동강변에 사랑채를 짓고 ‘觀水齋(관수재)’라 했다.

DSC07539[觀水齋(관수재) 입구]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다’
‘觀水洗心'(관수세심)’은 시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정신이기도 했다.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기꺼이 한강이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한 아파트에 기거했고, 그 집의 문패 역시 ‘觀水齋(관수재)’ 였다.
시인 구상선생이 거주할 당시 관수재의 모습을 복원하여 두었다.

왜관은 그에게 친정 같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들고 나가 관수재에서 시를
쓰는 동안 아내는 묵묵히 시인을 뒷바라지 했다.

DSC07528[具常(구상) 詩人(시인)]

영상실에서 담아본 시인님의 모습.

시인이 세상을 뜨기 이태 전 칠곡군이 관수재를
복원하고 그 옆에 구상문학관을 지어 헌정했다.
하지만 세상 영화에 무심했던 시인은 생전에 단 한번도 그곳을 찾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2만여권의 도서와 자료를 보내
그 애틋한 마음의 한자락을 살포시 드러내 보였을 뿐이라 한다.

DSC07533[具常(구상) 詩人(시인) 초상]

시인의 詩 한 두어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 20

오늘도 神秘(신비)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오물과 폐수로 찬 나의 暗渠(암거) 속에서
그 淸洌(창렬)한 水精(수정)들은
거품을 물고 죽어 갔다.

진창 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

日月(일월)도 제 빛을 잃고
은총의 꽃을 피운 사물들도
이지러진 모습으로 照應(조응)한다.

나의 現存(현존)과 그 의미가
저 바다에 흘러들어
영원한 푸름을 되찾을
그날은 언제일까?

혼자 논다.

이웃집 소녀가
아직 국민학교에 안들어 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기에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몰라
란다. 그래 나는
-그거 안좋은 거야!
하고 말해주었다.

올해 그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 유쾌했다.

임종고백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 도취마저 하여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綺語(기어)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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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 걸려있던 詩(시) ‘꽃자리’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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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을 비롯하여 박정희 대통령, 공초 오상순,
마해송, 삼중스님, 정주영 회장에서 걸레스님 중광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폭넓은 교류를 통해 숱한 일화를 남겼다.

시인은 마치 奇人(기인)들과의 교류가 취미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들과 함께 하기를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까 재미가 없잖아.
非규격품인 奇人들은 재미없는 사회에 재미도 주지만
거리에 청량감을 주는 살수차 역할도 하기 때문”
이다라고 하셨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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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였던 시인의 아내는 왜관에
‘순심의원’ 을 열고 동네 주민들을 돌보기도 했다.

더구나 왜관은 시인이 원산에서부터 평생의
지기로 삼았던 화가 이중섭과 동거하면서 어렵사리
창작활동을 계속해 나가기도 했던 곳이어서 더욱 애정이
각별할 수 밖에 없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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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문학관’은 200여평의 규모의 2층 건물로,
1층에는 문단 활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와
문우와 주고 받았던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2,000여권의 소장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집필실이자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들렀던
觀水齎(관수재)는 관람객들에게 시인의 문학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구상문학관이 개관될 정도로 문학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였던 구상 시인이 2004년 5월 11일 85세에 폐질환으로 별세.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8월 6일 at 7:50 오전

    참 소탈했었나 봅니다.
    생전에 기념관도 안 찾으시다니요?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이런 정신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래봅니다.

    • 초아

      2016년 8월 6일 at 9:33 오후

      오늘은 많이 바빴습니다.
      이제야 응답을 합니다.
      많이 소탈하셨다 들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도 이런 소탈함을
      꼭 가졌으면 좋겠지만.. 현실은..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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