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
경북도기념물 제78호
[마을 입세에서 담은 우측 조지훈 문학관 전경]
주실이라는 마을은 배 형상으로 생겨서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생겨 가라 앉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옥천종택’에만
우물이 있었다 한다.
주실마을의 우물은 이것 하나 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물을 길어다 먹는 불편함도
감수하고 살았다 한다.
현재는 어떤지는 몰라도…
[입구쪽에서 담은 壺隱宗宅(호은종택) 芝薰(지훈) 생가 솟을삼문 전경]
주실 마을은 일월산 일자봉 자락의 지맥이 끝을 맺으면서
곳곳에 명당 터를 만들고 문필봉과 연적봉을 비롯한 三峰(삼봉)이
앞 다퉈 달려오는 듯한 형상을 하면서 수 없는 인재들을 배출한 곳이다.
주실마을은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도 일제 강점기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선비의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글 내용]
[壺隱宗宅(호은종택) 芝薰(지훈) 생가 솟을삼문]
집의 구조는 경북 북부지방의 일반적 형태인
안 채와 사랑채가 폐쇄된 ‘ㅁ’자형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랑채 전경]
이 곳 주실 조씨를 가리켜 칼날같은
남인 집안이라 하여 ‘劍南(검남)’이라 불렀을 정도다.
검남의 집안으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삼불차(三不借)의 가훈을 철저히 지켜 내려왔다.
財不借(재불차) : 재물을 빌리지 않고
文不借(문불차) : 남의 문장이나 학문을 빌리지 않고
人不借(인불차) : 사람을 빌리지 않음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풍이 후세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이 마을에서만도 인문학 분야의 석학들과 문인들이 상당수 배출되었다.
과거 300여 년간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가 63명이나
된다 하니, 이 쯤이면 가히 인문학의 요람이라 해도 좋을 법하다.
[좌측 안채]
마을 앞산 문필봉을 바라다 보면,
과연 芝薰(지훈)같은 文士(문사) 몇 명 쯤은 낳을 만한
地利(지리)라며, 옆지기가 감탄을 한다.
[정면 안채]
경북 영양의 조지훈 생가(호은종택)은 집의 원형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6.25때 소실된 것을 복구하면서
안채에 유리문을 다는 등 다소 변형된 부분도 있다.
[우측 안채]
가는 날이 장날인가?
내부 수리중이라…집안팎이 어수선하였다.
마침 점심시간때라 짜장면이 배달되어오는 것을 보고..
얼른 사진을 찍고는 돌아섰다.
시인의 흔적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시 27편을 돌에 새긴 시 공원은 마을 뒤편 탐방로를 따라
꾸몄고, 시인의 숲도 조성되어 있다.
시인의 숲과 문학관은 앞서 소개를 하였기에..
27편의 대표시가 새겨져 있는 시공원은 다음날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데레사
2016년 8월 10일 at 11:30 오전
정말 구석 구석 많이도 다닙니다.
덕분에 나같은 사람 갈곳도 생기고요.
탱큐!
초아
2016년 8월 10일 at 10:47 오후
훗… 한 지역을 가게되면,
구석구석 살펴본답니다.
그리곤 나누어서 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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