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 55-1
[한양조공정암선생묘역 안내 표지석]
靜庵(정암) 趙光祖(조광조,1482~1519)
중종 5년(1515)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새롭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관직에 나섰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유교로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至治主義(지치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고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呂氏鄕約(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표지석 뒷면]
金銓(김전). 남곤. 高荊山(고형산). 심정 등은
熙嬪洪氏(희빈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중심으로
희빈홍씨를 통해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갖게 했다.
1519년 11월에 홍경주 등은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자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靜庵趙先生 辭世之絶句(정암조선생 사세지절구)]
絶命詩(절명시)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를 걱정 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했도다
白日臨下土(백일임하토)
밝고 밝은 해가 세상을 굽어보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거짓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
이것이 진정 죽음을 앞둔 絶命詩(절명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조광조는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네 집에 묵었으므로 마침내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凶變(흉변)을 보이고 네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
말을 마친 조광조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4배를 드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군신의 예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유엄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든 조광조는 단숨에 들이켰다.
의지의 선비 조광조는 이렇게 갔다.
[文貞公靜庵趙先生神道碑(문정공정암조선생신도비) 전경]
신진사류들과 함께 잘못된 제도의 개혁 및 그에 따를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노력하였지만 기성세력이었던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역사 교과서에 크게 기록되어 시험에도
곧잘 나오는 己卯士禍(기묘사화) 결국 ‘走肖爲王(주초위왕)’ 사건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文貞公靜庵趙先生神道碑(문정공정암조선생신도비)]
선조 18년(1585)에 세웠으며,
비문은 蘇齋(소재) 盧守愼(노수신)이 짓고,
鵝溪(아계) 李山海(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
斗巖(두암) 金應南(김응남)이 전액을 썼다 합니다.
[아랫쪽에서 담은 정암선생 묘역 전경]
선조 1년에 조광조는 신원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되는 등 명예가 회복되었다.
[정암 조광조선생 묘 전경]
부인과 함께 합장 되었으며, 제일 윗쪽에 안장되었다.
[墓(묘)와 墓碑(묘비)]
改革(개혁)은 문자 그대로 죽음과 맞바꾸는 아픔을 동반한다.
혁명은 밭을 갈아엎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개혁은 판을 깨지 않고 가는 길이라,
그래서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묘뒤에서 담은 앞 전경]
유배갔던 전남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았다.
당시 유일한 친구이던 양팽손이 어느 골짜기에 가묘를 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조상이 묻혀있는 이곳으로 이장을 하였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담은 묘 입구쪽 전경]
진정한 우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화순 죽수서원에 두분이 나란히 배향된 되었다.
묘 앞쪽 건너편에 있는 선생을 모신 심곡서원은 예전에 소개해 드렸지만,
행여 게시물을 보시지 못하신 분들은 요기를 클릭하셔서 들려보시면 됩니다.
데레사
2016년 9월 2일 at 9:13 오전
이 동네는 친구가 살아서 자주가는데…
초아님 덕에 다음에 가면 찾아 봐야
겠어요.
초아
2016년 9월 2일 at 5:28 오후
완쾌되시면 친구집도 들릴겸
심곡서원과 묘소에도 들려보셔요.
유원지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으실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