睡隱(수은) 姜沆(강항) 선생 묘

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강항로

20161021_140519[내산서원 옆쪽 묘소 가는 길]

20161021_135611_010[묘소 가는 길]

姜沆(강항, 1567~1618) 조선 중기 학자.
세조 연간에 활약했던 姜希孟(강희맹)의 5세손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1567년 영광 불갑산 밑 유봉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太初(태초), 호는 睡隱(수은). 私淑齋(사숙재).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 가주서. 교서관박사를 거쳐 1596년
공조좌랑에 이어 형조좌랑이 되었다.

20161021_135706[아랫쪽에서 담은 강항 묘역 전경]

1597년 휴가로 고향에 머물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군량미 수송임무를 수행했고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金尙寯(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향인 영광마저 함락당하여
가족과 함께 해로를 통해 탈출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20161021_135735[좌측에서 담은 강항 묘 전경]

강항 선생과 그의 부인(2명)의 幽宅(유택)으로
소나무 숲, 양지 바른 곳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문인석 1쌍, 망주석 2쌍, 拜禮石(배례석), 羊石(양석) 1쌍,
묘비 2기가 유택을 지키고 있으며 묘역 주변으로는 후손들의 묘역이
조금 떨어진 곳에 듬성 듬성 자리하고 있다.

20161021_135739[묘 입구쪽에서 담은 묘앞 전경]

포로가 되어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남은 가솔들과 함께 왜열도로 이송되어 오사까에서
1년 정도 머물다가 1598년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옮겨졌다.

그는 학식이 높은 유학자로 비록 포로신분이지만
현지 쇼군 將軍(장군)에게 특별대우를 받았다.

쇼군은 그에게 2명의 奴婢(노비)를 주었으며
제한적이긴 하지만 주변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도 주어져 오사까와 교토 지역의 지리, 풍토, 군사시설 등을
살펴 인편을통해 몰래 조선정부에 보고하였다.

20161021_135818[우측에서 담은 묘 앞 석물]

1600년 4월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가솔과 함께
교토를 떠나 5월 오매불망 그리던 고국으로돌아왔다.

부산을 통해 귀국하여 한양으로 상경, 宣祖(선조)를 알현하고
왜국 생활의 실상과 행적을 보고하고는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스스로
부끄러운 죄인이라 칭하며 문을 닫아걸었다.

1602년 조선 정부는 그에게 관직을 제수했으나,
받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관직을거절했다.

다만 후학 양성에는 열심이라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장가들이 배출되었다.

20161021_135830[입구쪽에서 담은 묘앞 석물]

20161021_135838[안쪽에서 담은 묘앞 석물]

20161021_135859 [舊(구) 墓碑(묘비) 앞면]

舊(구) 墓碑(묘비)는 묘 앞에 바로 세워져 있지 않고,
특이하게도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무슨 뜻일까?

20161021_135907[舊(구) 墓碑(묘비) 뒷면]

20161021_135845[新(신) 墓碑(묘비)]

20161021_135921[舊(구) 묘비와 新(신) 묘비]

1618년 부친상의 상복을 벗은 그 이듬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생을 마치니 그의 나이 51세였다.

그가 세상을 뜬 후, 조선 정부에선 그에게 이조판서를
追增(추증)했으며 내산서원에 賜額(사액)을 내려 그를 배향하였다.

20161021_140009[묘 뒤에서 담은 앞 전경]

看羊錄(간양록)
간양록은 그가 왜열도에 있을 때, 왜국의 지리, 풍토, 인문, 군사시설 등과
정유란의 실상을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포로가 된 1597년부터 귀국한1600년까지의
일기를 涉亂事蹟(섭란사적)이란이름으로 卷末(권말)에 첨부하였다.

책의 원래 이름은 巾車錄(건거록)으로 이는 강항이
죄인을 자처하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 한다.

20161021_140004[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그가 왜열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상당하여
왜국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가 남긴 간양록은
그 시절의 실상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 귀중한 자료로
史料(사료)적, 국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왜정은 간양록을 禁書(금서)의 하나로 취급하여 절대로 읽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책에 쓰인 내용(왜국의 실정과 임진,정유란 시절 왜군의 온갖 행태들)이
그들에게는 부끄럽고 참혹했던 과거이기 때문일 것이다.

20161021_140347[내려오며 줌으로 당겨 담은 후손의 묘]

건거록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수은 강항이 친히 짓고 쓴 원본을 필사한 것이다.

이 필사본 가운데 ‘강감회요’, ‘운제록’, ‘건거록(간양록)’
3종은 편찬 이후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1980년에 신봉승 작가가 쓴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인데
조용필이 부른 간양록 들어보셔요.

훌륭한 선조님이 계셨던 우리나라가
어찌하여 이렇게 국정이 물란하게 되었는지…
피를 토할 일입니다.

제발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욕심을 버리고
나라를 위한 충정의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4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11월 16일 at 7:53 오전

    대톨령이 첫째 잘못 했지만 그를 질타하기에만 바쁜 야당의
    모습도 곱지는 않아요.
    아무도 정국 수습의 의지같은건 없어요.
    각자 자기 입지 굳혀볼까 싶어서 전전긍긍중, 국민만
    슬퍼요.

    뉴스를 안 볼수도 볼수도 없으니….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초아

      2016년 11월 17일 at 6:06 오전

      어제는 죽어라.. 열어주지 않았어요.
      대여섯번을 시도하다 그냥 잤습니다.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보다는
      이 나라를 위해주었으면 합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수 없듯이..(요한복음 12:24)

  2. journeyman

    2016년 11월 16일 at 11:12 오전

    조용필의 간양록은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
    원곡이 외국곡이더군요.
    멜로디가 하도 구슬퍼서 우리 정서에 딱 맞는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 초아

      2016년 11월 17일 at 6:08 오전

      원곡이 외국곡이라 저도 매우 섭섭했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며, 간혹 듣곤합니다.
      말씀처럼 멜로디가 구슬퍼서..
      이제야 응답글을 드립니다.
      어젠 인터넷이 말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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