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관덕정순교기념관 전경]
순교기념관이 세워진 이곳은 아미산이라고 불리던
언덕바지 땅으로서 조선시대 사상범을 처형하던 형장이었으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처형된 곳도 바로 이 곳이라 한다.
[관덕정순교기념관]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때 천주교인 25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으며,
대구의 경상감영 옥사에서 순교한 이들도 31명에 이른다고 한다.
[천주교 성지 관덕정순교기념관 오르는 계단]
[성 이윤일 요한 동상]
계단을 오르면 실내로 들어가기 전 입구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동상은 성 이윤일 요한으로 1866년 12월26일 이곳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분으로 이유일 요한이 시성되면서 관덕정 순교성지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돌 형구]
당시 중죄인들을 처형할 때 사용되었던 돌 형구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 뿐만 아니라 동학의 창시자 최재우도
1864년 이곳에서 처형되었으며, 을해박해, 정해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 25명의 천주교인이 참옥한 방법으로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1층 내부 전경]
[관덕정순교기념관 안내판]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분]
[치명]
로비 중앙의 스테인드글라스
미술학 박사 김은호의 ‘치명’(1989년 작품)
[한국 성모상]
조선 시대 말기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치를
입증하는 척화비가 한국 성모자상과 더불어 있다.
[斥和碑(척화비)]
조선 고종 8년(1817)
척화비는 흥선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던 당시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요구게 직면해 서양 세력과 일절 교역하지 않는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했다.
병인양요가 끝난 후 조선 정부는 척화비를 만들기
시작하여 신미양요 후에 전국 각지의 교통의 요지에 세웠다.
척화비로 상징되는 강경한 양이정책으로 인하여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서양 세력과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임오군란 이후 척화비는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다.
비문에는 ‘洋夷侵犯(양이침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非戰則和(비전즉화)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主和賣國(주화매국)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척화비는 영천시 신녕면에서 발견된 것이다.(안내글 참조)
[上宰相書(상재상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호교론서]
상재상서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1839년 정하상이 己亥迫害(기해박해) 때 박해의 주동자인
右議政(우의정) 李止淵(이지연)에게 카톨릭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작성한 한국 최초의 護敎論書(호교론서)이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박해를 중단시켜야 할 이유와
주장을 밝힌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하였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 산 표본이라 하겠다.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써 실증하였다.
[한국순교성인 103위]
관덕정순교기념관은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여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성지 개발 사업으로 건립된 것으로,
처형터로 고증된 땅 512.40㎢를 확보한 후 1985년부터 1990년까지의
공사기간을 거쳐 순교기념관 건립하였고, 1991년 5월 개관식을 가졌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옥 누각 형식 건물이다.
[성 이윤일 요한]
우리나라 성인 103위 가운데 맨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평신도다.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1867년 1월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이윤일 요한은 1867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으며, 1984년 5월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이후 미리내에 있던 성인의 유해를 교구로 옮겨
모시면서 1987년 1월21일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로 선포됐다.
[십자가의 예수님]
성인들의 유해가 모셔진 관덕정에는 지하, 1층 지상 3층
그리고 누각까지 전체적으로 천주교의 발전사와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1층 소개를 마칩니다.
2층과 3층은 다음날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데레사
2017년 2월 22일 at 7:10 오전
당시의 사남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기꺼히 바쳤지요.
덕분에 우리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고마움을 잊을 때가 많지요.
초아
2017년 2월 22일 at 11:21 오후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저 역시 그 고마움을 잊을때가 더 많아요.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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