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남산 100년 향수길 벽화 전경]
[봄 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화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샬트르 수녀원 코미넷관]
[대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축성(1915년)]
[백백합 보육원의 모습과 아이들]
[사랑의 찬가 / 사도 바오로(코린토 1서 13, 4-7)]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백백합 보육원 마당과 아이들의 모습]
[백백합 보육원 이야기]
1915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안세화)주교는 계산성당
교우 집에서 양육되고 있던 보육원 아이들 50여 명을 수녀들에게 맡겼다.
현재 남산동 수녀원 자리에 새로 보금자리를 마련한 백백합 보육원은 일제
강점기 아래 살림살이가 궁핍했다.
아이들이 늘어나자 수녀들은 아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뽕나무도 키우고 누에를 쳐서 고치를 팔아
아이들의 양육비를 벌었다.
밭에 목화를 심어 물레로 목화씨를 뽑아 무명베를 짜서
아이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였다.
수녀들은 아이들의 부모 역할을 하며 한글과 교리를 가르치고 사랑을 쏟아 부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굶주렸던 시절에 아이들에게 충분히 해 줄 수 없음이 언제나
안타까워하곤 했었다.
50명으로 시작했던 보육원은 1940년대에는 250명이 되었고, 한국 전쟁시에는
전쟁고아들로 붐비게 되었다. 수녀들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원아들과 피난길을 떠났고,
먹을 식량과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대구의 첫 보육원이었던 백 백합 보육원은 대구 최초의 아동복지시설이었고,
사회복지시설의 역할을 다 하다가 시대 변천에 따라 점점 고아들이 줄어들게 되면서
1991년 폐원되었다. 당시 보육원의 자리는 현재 백합 어린이집으로 단장하여 지역의
어린이들이 꿈을 키워가는 유아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빨래하는 보육원 아이들]
[남산 200년 향수길 전경]
[축 복 / 교황 프란치스코]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거나
신앙을 아예 갖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의 양심을 존중하며, 또한 여러분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하길 바랍니다.
[별을 헤는 아이들 / 김 효임 골롬바 수녀]
아이들아
별이 빛나는 곳이면
반드시 새벽이 온단다
오늘 밤에는
어제보다 더 많이
우리 지붕위로 별들을 모아들이자
내일 밤에는
오늘보다 더 많은 별들과
우리 지붕위에서 놀이를 하자
그 별들의 수만큼
더 밝고 아름다운 새벽이 올거야
아이들아
[성요셉시약소 모습]
[성요셉시약소 이야기]
1915년 신축된 수녀원 내의 백백합 보육원 원아들을 위한 작은 약국,
성요셉시약소가 있었다. 수녀들은 그곳에서 보육원 어린이 치료뿐만 아니라
약주머니를 챙겨 들고 가난한 병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약을 나누어주었고
생을 마감하는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그들의 임종을 도왔다.
병원과 치료 약도 부족했던 시절이라 이런 수녀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자
많은 환자가 요셉 시약소에 몰려들게 되었다.
한편,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성직자도 전염병과 여러 가지 질병으로 죽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드망즈 주교는 대구대교구 성직자들을 위해 수녀원 내의
성요셉시약소에 의무실을 두어 성직자들을 돌보게 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무료로 진료를 해주었다.
그러자 진료소에는 많은 환자로 넘쳐났다.
어떤 날은 하루에 360명의 환자를 진찰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드망즈주교는 수녀원의 협조를 얻어 1934년 7월, 성요셉진료소를
증축했는데 모든 진료와 치료가 무료였기 때문에 대구의 의사와 약사 조합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요셉진료소를 천주교진료소, 성교당병원, 수녀당병원이라 불렀다.
무료 진료소는 1955년 정식인가를 얻어서 <성요셉의원>으로 운영되다가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1973년 문을 닫게 되었다. 어려운 여건하에서 오랜 세월 동안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의약품을 나누어 주던 손길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성요셉시약소 앞에서]
[왜관 소화여학교 가사시간]
[배움의 창문을 열고 새 세상을 향하여]
개화기 조선 천주교회는 사회계몽 운동에 발맞추어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고 여성교육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수녀들에게
여성교육 분야에 많이 투신하도록 요청하였다.
1910년 대구에서는 여성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여 계산성당에서
성립학교여자부(1916년 해성학교 여자부, 1939년 효성소학교로 개칭,
현 효성초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2년부터 수녀들은 이곳에 파견되어
여아들에게 한글, 산수, 노래, 교리 등을 가르쳤다.
또한 수녀들은 본당에서도 교리, 한글, 풍금 등을 가르치면서
여성, 어린이교육, 문맹 퇴치 및 민족교육에도 헌신하였다.
그들은 최소한 생활비 외 보수를 받지 않아 학교 운영에 도움이 되었고 수녀들이
본당과 학교에서 여성 교육에 정성을 쏟는 열성적인 모습은 부모들과 지역사회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해방 이후, 중등학교와 본당에서 수녀들의
활동이 점차 확대되어 사람들이 배움의 창문을 열고 새 세상을 향하는 데 일조하였다.
1946년 9월, 개교한 대구 대건중학교에 여자부가 설립되어 수녀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효성여중. 고의 시작이었다. 교회학교에서
수녀들을 요청한 이유는 학생들의 올바른 인격형성과 정서교육에 대한 기대와
학교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투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녀들은 1910년 초부터 100여 년 동안 대구, 경북, 그 외의 지역에서
사랑과 열성으로 시대별 어려운 교육 여건 하에서 학생들의 교육과 특히
인성교육에 최선을 다하면서 학생들이 사랑과 희망을 키워가도록 노력해 왔다.
또한, 수녀들은 한국교회 초기부터 본당에서 종교적 가르침과 그들의 모든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지금까지
봉사해오고 있다.
[베아트릭스 수녀와 죽음의 행진 이야기]
1906년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한 수녀가 있었다.
그 수녀의 이름은 베아트릭스였고 간호사였다. 지역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약을 들고 다니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에 전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베아트릭스 수녀는 1948년, 한국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첫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한국 수녀들에게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우선적으로 외국인들에게
자신의 나라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베아트릭스 수녀는 이를 포기하고 한국 수녀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를 원했다.
수녀는 당시 수련장이었던 으재니 수녀와 함께 1950년 7월17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다른 외국선교사들과 함께 평양을 거쳐 개성에 도착,
감옥 생활을 하였다.
그해 7월 말, 수녀는 개성을 떠나 다른 외국 포로들과 걸어서
10월 고산진 수용소까지 가게 되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상태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걷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다 버렸고 베아트릭스 수녀 또한
묵주와 주머니칼,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한국 순교자들의 유해만 지녔다.
죽음의 행진 중, 추위와 배고픔으로 건강은 더욱 쇠약해졌고 더는 걸을 수가
없게 되자 수녀는 마지막 유언으로
“한국 수녀들에게 성 바오로회의 규칙을 잘 지키라고 말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11월 3일 중강진 부근에서 총살되었다.
베아트릭스 수녀는 낯설고 물설던 먼 한국 땅에서 40여 년 지극한 마음으로
한국 사람들을 사랑했고 신앙을 위해 희생되는 ‘썩는 한 알의 말알’이 되었다.
지금도 한국인에 대한 수녀의 사랑과 희생은 수녀들의 마음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고 선교 열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멜 베아트릭스 수녀의 모습]
[歸天(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수도회 한국진출 125주년(2013년)]
[수녀! 사랑의 길을 가는 사람]
삶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하신 예수를 따라 나서 그 길을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여행 채비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이 추구하는 것. 그것들과는 정반대의 길.
바로 가난과 정결(독신). 순명이란 여행 옷을 입고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이 옷을 동여매고 삶의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특히 소외되고 뒤쳐지고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등불을 밝혀 드립니다.
그들 또한 사람이 부족하고 약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그 길은 기도 없이
따라 나설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불립니다.
한 수녀 시인은 ‘수녀’를 이렇게 시로 표현합니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
이라고 말입니다. 생명을 창조해 주시고, 진리를 밝혀 주신 분의 뒤를 따라
오늘도, 내일도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바로 수녀들입니다.
[천주교 순교 성지 관덕정 순교기념관]
[대구대교구청내 성모당 전경]
[계산성당 전경]
[사랑은 행동입니다. / 마더 데레사]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만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 행동은 곧 봉사입니다.
[아랫쪽에서 담은 남산 100년 향수길 전경]
벽화가 그려진 남산 100년 향수길은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쪽으로
가는 길과 대구대교구청쪽으로 가는 길에 그려진 벽화길이 있다.
대구대교구청으로 가는 길 벽화를 보시려면 요기 클릭 하셔서 들려보셔요.
데레사
2017년 4월 24일 at 8:07 오전
초아님
정말 자세하게 소개해 주어서
고마워요.
이제는 우리도 해외 선교를 나가는 나라가
되고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도 계셨고
모두가 우리를 위해 애써주신 덕이지요.
초아
2017년 4월 24일 at 8:55 오후
아닙니다.
저도 언니덕분에 외국여행까지
해 보는걸요.
여행기속에서 글속에서
함께하는 착각을 느껴보곤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