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기념관. 이장가문화관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명천로 43번지 대곡 성당 건너편

20171222_144728[상화기념관. 이장가문화관 안내글]

20171222_144033a[상화기념관. 이장가문화관 현판]

민족 시인 이상화 시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등
대구 근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경주 이씨 논복공파 가족
‘이장가’를 알리는 ‘상화기념관·이장가문화관’이 지난 18일
개관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됐다.

20171222_144635[상화기념관. 이장가문화관 전경]

민족시인 이상화(2남)를 비롯해 대한 독립군으로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이상정 장군(장남), IOC 위원으로 활동한
이상백 박사(3남), 저술가인 이상오 선생(4남) 등 4형제와 4형제의
백부이자 이자가 종손으로 구한말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이일우 선생 등의
필기도구, 서적, 공책 등 유품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20171222_144056[상화기념관. 이장가문화관 내부]

1, 2층으로 나누어져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우선 1층부터 둘러보겠습니다.

20171222_144105[1층 전시된 자료]

이장가 일가의 미공개 사진 50여 점과 이상규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기증한 이상화 시집도 만나볼 수 있다.

20171222_144113[1층 전시된 자료]

특히 이장가의 가보인 ‘이장록’.  ‘우현서루 편액’,
그리고 이상정 장군의 딸인 선희 여사가 시집갈 때 상화 선생이
직접 본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해 선물한 ’24효도 병풍’
한국 근대사를 알아볼 수 있는 주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20171222_144118[가계도]

20171222_144128[1층 전시실 내부 전경]

20171222_144133[1층 전시실 내부 전경]

20171222_144148[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이상화]

李相和(이상화, 1901~1943) 일제 강점기의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이며, 교육자, 권투 선수이기도 하다.
본관은 慶州(경주)이고, 호는 尙火(상화), 想華(상화), 無量(무량), 白啞(백아)이다.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피신하였으며,
1921년 잡지 백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20171222_144156[추억의 사진 전시]

20171222_144156a[추억의 사진 전시]

20171222_144209[세째 李相佰(이상백)]

李相佰(이상백, 1904~1966)은 일제 강점기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체육인, 작가, 언론인으로, 호는 想白(상백), 百無一齋(백무일재)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운동가이며, 이상화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시인, 작가이며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20171222_144232[1층 전시된 자료]

20171222_144246[1층 전시된 자료]

20171222_144259[전시된 자료]

20171222_144306[1층 전시실 내부에서 담은 입구쪽 전경]

20171222_144317[2층 전시실 오르는 계단]

1, 2층 나누어서 소개를 하려다, 제가 들렸을 때는
전시관 불도 꺼져있고, 불러보았지만, 아무도 안 계셔서
불 켜는 곳도 몰라 낮이라 해도 햇볕이 들어오는 곳만 밝아
담아 온 사진이 흐리고 서두느라 초점도 맞지 않은 사진들이 많아서…
함께 소개합니다.

20171222_144332[2층 계단 위쪽 액자 속 자료]

20171222_144342[2층 전시실 내부]

20171222_144354[友弦書樓(우현서루] 현판]

20171222_144423a[소남 이일우]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운동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또 이후 각계에서 일어난 항일운동가 상당수
키워낸 곳이 바로 友弦書樓(우현서루)였으며, 1920년대 교남학교로 발전,
현재는 대구 대륜중·고등학교로 자리를 잡았다.
소남 李一雨(이일우, 1870~1936) 선생이 이곳을 운영하였다.

友弦書樓(우현서루) 는 1911년 강제 폐쇄 때까지
新知識(신지식) 보급은 물론 抗日(항일) 지식인의 사랑방이자
학숙으로 대구 抗日(항일) 운동의 산실이자 애국지사의 양성소였다.

그는 일찍 목숨을 잃은 동생 이시우의 4형제를 거둬 교육하기도 했다.
이시우 선생의 아들 4형제를 龍鳳麟鶴(용봉인학)이라 불릴 만큼 걸출했다.
이가 바로 시인 이상화의 4형제였다.

20171222_144350[2층 전시된 자료]

20171222_144401[2층 전시된 자료]

20171222_144408[24효도 병풍]

이 병풍은 이상정 장군의 딸인 이선희 여사가 시집을 갈 때
이상화 선생이 직접 주석을 달아 선물한 것으로 이장가의 가보 중 하나다.

20171222_144413[2층 전시된 사진 자료]

20171222_144455[전시된 사진 자료]

20171222_144450[전시된 사진 자료]

20171222_144502[1928년 항저우에서  맨 앞이 이상정 장군, 바로 오른쪽이 권기옥 여사]

20171222_144435[전시된 책 날개옷을 찾아서]

근대문명의 꽃인 비행사가 되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독립운동을 했던
신여성 권기옥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개옷을 찾아서’ 가부장적으로 표상되어 온
기존의 여성독립운동가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여성독립운동가인 권기옥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 저자 정혜주 / 하늘자연 펴냄

20171222_144441[이상정 장군]

청남 李相定(이상정, 1897~1947) 상화의 맏형 이상정은 중국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으로 1923년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 중국군
고위 장교와 임시정부 의원을 역임하는 등 평생 독립운동을 한 군인이 되었다.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중국 하북성 등지에서
풍옥상군 참모부의 막료로 근무하였으며,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는 서예와 전각에도 능하였고 1923년에는 시인으로 문단 등단하기도 하였다.
특히 전각에 뛰어난 예술가였으며, 유고집으로 ‘중국 유가’가 있다.

20171222_144521[2층 전시실에서 담은 1층 계단 쪽 전경]

경주 이씨 금남 공파와 논복공파를 함께 일컫는 가문 명인 ‘이장가’
금남 이동진 선생이 재산 일부를 가족과 친지, 종족들을 위해 나눈 일을
‘李庄(이장)’이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기념관 주위에는 상화 시인을 비롯한
이장가 가족묘로 향하는 300m가량 둘레길이 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7년 12월 30일 at 8:50 오전

    가족 묘두가 애국의 길을 걸은 훌륭한
    가문입니다.
    학창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달달 외우던 생각이 납니다.

    • 초아

      2017년 12월 30일 at 7:07 오후

      한명도 나오기 힘든데…
      4형제가 다 같이 특출하시니
      대단한 가문 맞습니다.
      저도 달달 외웠지요.
      그 덕에 요즘도 드문드문이지만, 외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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