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生家(생가)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효자로 342

20171215_151811[포은 정몽주 선생 생가 표석비 전경]

포은 정몽주 선생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여 2015년에 준공하였다.

포은 정몽주 생가터 추정지에는 생가의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이 드러나 있으며 인근에서 기와 조각과 도자기 파편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20171215_151904[포은 정몽주 선생 생가 앞 소공원 전경]

그리하여 고려 말 충신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선생
生家(생가)가 700여 년 만에 영천 생가터에 복원되었다.

20171215_151919a[포은 정몽주 선생 생가 안내도]

20171215_151931[포은 선생 탄생지 표지석]

鄭夢周(정몽주, 1337∼1392) 고려 말의 학자
초명 夢蘭(몽란), 夢龍(몽룡). 시호 文忠(문충).

20171215_151924[입구 쪽에서 담은 생가 솟을삼문 전경]

공민왕 6년(1357)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藝文檢閱(예문검열). 수찬. 衛尉寺丞(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韓邦信(한방신)의 종사관으로 女眞族(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典寶都監判官(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丹心歌(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생가터 앞쪽 소공원 넓은 뜰에는  정몽주 선생의
시조와 시조 풀이 해설 안내글이 시비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요기 에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171215_152902[관리실]

20171215_152857[좌측에서 담은 표석비와 솟을삼문 전경]

포은 정몽주 선생은 1337년 영천 울목마을(현재 우항리)에서
태어났으며 고려에 충성을 다하며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선죽교에서 순절했다.

20171215_152858[忠 義 丹 誠 표석비]

20171215_152838a[표석비 설명 글 내용]

20171215_152024[포은 정몽주 선생 동상]

20171215_152046[동상 아랫쪽 설명 글 내용]

20171215_152117a[聖臨門(성임문) 현판]

20171215_152102[聖臨門(성임문) 솟을삼문]

20171215_152153a[안내글 내용]

20171215_152202[안채와 머슴방 전경]

안채, 존양당, 부엌채, 성임문, 영정각을 고쳐 짓고
부대시설인 관리실, 화장실, 소공원, 주차장 등을 만들었다.

20171215_152237a[存養堂(존양당) 현판]

20171215_152221[存養堂(존양당)]

20171215_152248[디딜방아간과 머슴 방 전경]

20171215_152328[머슴방 내부]

이부자리, 멍석, 짚, 짚신, 새끼, 소쿠리 등이 보이네요.

20171215_152344[우물과 장독대]

20171215_152255[안채 전경]

학문. 외교. 경제. 군사. 정치 등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20171215_152357[부엌  내부 전경]

선반, 소쿠리, 광주리, 바가지, 무쇠솥, 아궁이, 함지박 등이 보이네요.
아직은 제 눈에도 익은 모습들이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20171215_152419a[光風霽月堂(광풍제월당) 현판]

20171215_152416[안채 거실에 걸린 光風霽月堂(광풍제월당) 당호]

光風霽月(광풍제월) 이란?
비가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
그리고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뜻이라 한다.
포은 선생님의 마음이 그러했기에 당호를 光風霽月堂(광풍제월당)이라 하였나보다.

20171215_152459[影幀閣(영정각) 일각문 전경]

20171215_152515[일각문 쪽에서 담은 影幀閣(영정각) 전경]

麗末三隱(여말삼은, 혹은 고려 삼은)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삼은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을 꼽는다.

여말삼은에는 길재 대신 陶隱(도은) 李崇仁(이숭인)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 야은 吉再(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여말선초에 어지간히 이름을 남긴 인물치고 정몽주의 제자나 문인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며 그들을 통해 비록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지만 조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은
조선왕조에서 높이 숭상되었기에 그 후손은 조선왕조 내내 혜택을 받았다.

20171215_152555a[影幀閣(영정각) 현판]

20171215_152543[정면에서 담은 影幀閣(영정각)]

종손인 정래정씨가 생가 중창을 기념해
기증한 동상과 영정은 소공원과 영정각에 설치했다.

20171215_152607[우측 안쪽에서 담은 影幀閣(영정각) 전경]

影幀閣(영정각)의 문이 닫혀 있어서 들여다보지 못하고
되돌아 서야 하는 아쉬움에 影幀閣(영정각) 전경만 좌측 우측 정면의
전경만 담아 보았다.

20171215_152650[影幀閣(영정각) 일각문에서 담은 앞 전경]

20171215_152431[포은 선생의 어릴적 이름 설명]

20171215_152437a[夢蘭(몽란) 1세부터 9세까지의 설명 글 내용]

20171215_152442a[夢龍(몽룡) 9세부터 관례까지 이름 설명 글 내용]

20171215_152707[포은 선생의 일대기]

page[1세~42세까지]

page-2[44세~돌아가시기까지]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정몽주는 이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일 사람 얼굴을 봐서 뭐 하겠나라는 설도 있고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되는데 그 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것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것과, 수행하던 종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종이 그것을 거부하고 함께 죽은 것 등

아들이 독단으로 정몽주를 죽인 것을 안 이성계는 대노하였다 한다.

20171215_152736[안뜰 시비와 해석 안내글]

20171215_152736-1[종성. 종본 두 아이를 생각하며]

20171215_152144[마굿간]

그의 시신은 산중의 중들이 충신의 시체를 방치할 수 없다 하여
목숨을 걸고 밤에 몰래 옮겨 장사지냈으며, 시중의 상인들도 며칠간
상점을 철시하고 충신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한다.

정몽주가 죽어간 다리는 당시 선지교라는 이름이었으나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붉은 참대나무가 났다 하여 이름이 선죽교로 바뀌었다.
개성에 남아있는데, 다리에 있는 검붉은 얼룩이 정몽주의 피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1월 22일 at 8:51 오전

    우리는 선죽교를 생각하며 정몽주 선생이
    개성사람인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영천사람이었네요.

    • 초아

      2018년 1월 22일 at 6:42 오후

      저도 그런줄 알았어요.
      영천사람이란것은 서원과 포은선생님의
      생가를 들려보고 알았습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