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
[중세 문화실 출입구 전경]
[대구, 경북의 불교문화 안내 글]
[전시실 내부 좌측 전시된 자료]
대구, 경북 지역의 불교문화와 유교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실입니다.
불교문화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양식을
대표하고 조형미가 우수한 불교조각품과 불교공예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보살, 반가사유상, 부처 등]
유교문화는 대구, 경북지역의 사원을 중심으로 사원에서 서원으로
옮겨가는 시대적 전환과 영남학파의 활동을 관련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유교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궁극의 목표인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강조한 ‘수신’, ‘제가’, ‘치국’을 전시 개념에
도입하여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시실 내부에서 입구 쪽 전경]
佛像(불상)은 불교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인 조형 매체로 표현한 것입니다.
넓게는 부처佛(如來 여래)는 물론 菩薩(보살), 羅漢(나한), 神將(신장) 등을 모두 포함하며,
좁게는 부처佛의 상만에 해당됩니다.
[관음보살, 부처, 관음보살, 두 부처가 앉아 있는 불상 등]
삼국 중 불교 수용이 가장 늦은 신라에서는 7세기에
이르러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조상 활동이 성행하였습니다.
반면 불교문화의 수입 창구이자 신라불교의 보급 통로인
경북 북부지역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성행하였습니다.
[전시실 내부에서 담은 전시된 자료 전경]
영주, 봉화, 안동, 군위, 구미 등의 여러 지역에
삼국시대 금동불과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마애불과
석불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경북지역에서 이른 시기부터 활발한 조상 활동이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영양) 통일신라(9~10세기)]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불법)가
우주 가득히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은 ‘화엄경’에 의겨하여 제작되었다.
부처(불, 여래)의 모습을 하고 지권인의 손갖춤을 취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불상이다.
[자료 전시]
[길항사 동. 서삼층 석탑 사리 갖춤]
길항사지 사리갖춤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7년, 불심이 깊었던
세 오누이가 길항사에 두 개의 탑을 세운 뒤 그 안에 자신의 바람을
담은 사리갖춤을 만들어 동탑과 서탑에 납입한 것이다.
27년이 지난 뒤, 누이의 아들이 신라의 원성왕이 되었다.
언적법사와 조문황태후 그리고 그녀의 누이, 그들이 어떤 소망을 갖고
사리갖춤과 탑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문황태후의 바람은 이루어진 듯하다.
이 석탑은 1916년 2월 12일 도굴범들에 의해 탑이 일부 무너졌다.
그해 6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사리갖춤은 1916년 갈항사지 석탑을 조선총독부박물관(현 경복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위치는 기단 아래에 마련된 사리공이었다.
발견된 사리갖춤은 사리호 2점 사리병 2점 준제지언다라니 1점 등
총 5점이다. 항아리 모양의 사리병 안에 정병 모양의 사리병이 각각 들어 있었다.
준제진언다라니는 사리병 안에 놓여 있었다.
사리갖춤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금동판, 내화리 삼층석탑 사리갖춤]
[동화사 금당암 사리갖춤]
대구 동화사 금당암 서삼층석탑(통일신라 9세기)
[장연사 터 동삼층석탑 사리갖춤, 봉서리 삼층석탑 사리갖춤]
청도 장연사 터 통일신라(9세기 후반), 문경 봉서리(고려 12세기)
[용머리 앞면, 좌,우 옆면 애니메이션 편집]
용머리(보물 제1410호)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 윗부분 장식으로
여의주 뒤쪽으로 도르래가 있어 실용성을 갖췄다고 하며, 지상 20cm
위에 장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용머리 설명 글]
[전각형 사리기]
사리함, 가운데 녹색으로 보이는 유리는 그 옛날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것이고 그 안에 유곽에 사리가 들어있었다 합니다.
송림사 오층천탑 사리갖춤(보물 제325호) 통일신라시대
[나뭇가지 모양 관식, 여러가지 공예품, 청자상감 국화무늬 합 ]
[종과 징 등 자료 전시]
[‘보암사’명 종, 종, ‘기축’이 새겨진 종, 종, ‘덕산사’가 새겨진 쇠북, 바라, 정병, 향완]
[금강경, 금강저, 경상, 사자, 용머리]
[수신 전시된 자료]
유학을 공부하여 그 이념과 도덕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사회를 교화하는 것을 임무로 여기는 지식인을 선비라 합니다.
자기 절제를 통해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자한 선비는
선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유교경전을 익히고 이론을 심화하는 한편,
마음 수양에 부단히 힘썼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여유로운 눈길과
멋스러운 정서를 시詩, 서書, 화畵로 형상화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들 예술작품에는 선비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과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사서삼경, 시전언해, 논어집주대전]
[속자치통감강목, 심경발휘, 심경부주]
[오달재가 그린 묵매도]
[사랑방의 생활용품(필통.필격.연적.벼루)]
[전시된 자료]
[어사서, 사례고증, 문묘함사록, 상례비요]
[현풍 곽씨 편지, 회혼례첩, 나무 기러기]
[감실, 교의]
[사원에서 서원으로]
[소수서원 현판과 안향 초상]
[도동서원 안내도와 설명글 아랫쪽 도동서원 모형도 전경]
도동서원 道東書院(사적 제488호)은 한훤당 김굉필을 1568년 儒林(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祠宇(사우)를
지어 享祀(향사)를 지내오다가 1573년 雙溪書院(쌍계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1597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 합니다.
[도동서원 안내도]
1605년에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다시 짓고 甫老洞書院(보로동서원)이라
하였다가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도동서원 전경 모형]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주요서원 중의 하나입니다.
[전시된 자료]
유교에서는 개인이 도덕적인 삶을 살 때 비로소 사회혼란이 극복되고
좋은 세상이 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도덕성은 일반 백성들보다 직접
다스림을 맡은 군주와 사대부에게 더욱 요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여러 왕들은 유교의 교육과 학습을 바탕으로
관료들과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사회 전반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하였습니다.
왕과 함께 유교 정치의 중심을 이루는 관료大夫는 유학자로서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고,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러한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해동삼강목, 오륜행실도, 근사록, 주자증손여씨향약]
[갑오식년사마방목]
고종 31년(1894)에 치뤄졌던 갑오년 사마시
소과 급제자 명단을 재주정리자로 간행한 책이다.
급제자의 성명, 자, 생년간지, 본관, 주소 등을
비롯하여 아버지의 관위 등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마패]
[서매수 초상과 앞쪽 호패]
[서매수 초상]
[대구. 경북의 유교문화 설명 글]
[영남의 사림과 서원]
영남지역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선비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16세기의 士禍期(사화기)에 勳舊(훈구), 戚臣(척신) 세력에 대립한
在野士流(재야사류)로서 士林派(사림파)는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여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이황, 조식 등 영남 출신의 선비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전시된 서책 자료]
[전시된 자료]
[사자 보물 제202호]
사자(보물 제202호) 통일신라시대(의성관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