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
[복식문화실 출입구 전경]
섬유복식 산업을 바탕으로 근대도시로 성장한 대구의 지역 특성을 살려
우리네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옷의 역사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자 마련한 전시실입니다.
실, 직조, 색채, 옷이라는 4개의 키워드를 통해 실이 만들어져서 직물이
짜여지고 옷이 되는 과정과 우리 전통 색과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씨날과 날실이 만나다]
언제부터 실을 만들고, 실을 엮어 옷감을 만들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초기의 옷은 동물의 가죽이나 식물의 껍질을 두르는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러 도구 가운데 가락바퀴는 회전력을 이용하여 실을 만드는 도구인데
가락바퀴의 발명으로 견고한 실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옷감의 제직이 가능해졌습니다.
실잣기의 경험은 곧 직기의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직기의 최초 모습은 5세기 고구려의 마선구 1호 무덤에 벽화로 남아있으며,
광주 신창동유적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바디 및 실감개와 같은 부속이 발굴되었습니다.
[가락바퀴] [가락바퀴와 실타래] [뼈로 만든 바늘 도구 들]
언제부터 실을 만들고, 실을 엮어 옷감을 만들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초기의 옷은 동물의 가죽이나 식물의 껍질을 두르는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러 도구 가운데 가락바퀴는 회전력을 이용하여 실을 만드는 도구인데
가락바퀴의 발명으로 견고한 실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옷감의 제직이 가능해졌습니다.
실잣기의 경험은 곧 직기의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직기의 최초 모습은 5세기 고구려의 마선구 1호
무덤에 벽화로 남아있으며, 광주 신창동유적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바디 및 실감개와 같은 부속이 발굴되었습니다.
[가락바퀴 사용모습과 가락바퀴, 실타래, 추]
[방직기 사용 모습]
[五方色(오방색)
오방색이란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색을 말한다.
오행사상에서 유래되었으며 方(방)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각각의 빛들이 방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파랑은 동쪽, 빨강은 남쪽, 노랑은 중앙, 하양은 서쪽, 검정은 북쪽을 뜻한다.
[문무백관의 옷(애니메이션 편집)]
조선시대의 남자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되면 품계와 의례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관복을 입었습니다.
관복의 종류에는 朝服(조복), 祭服(제복), 常服(상복)이 있습니다.
조복은 왕실의 경축일이나 조칙을 발표할 때 혹은 중요한 자리에
文武百官(문무백관)들이 입고 참가하는 옷입니다.
제복은 종묘사직에 제사할 때 착용하는 옷으로 조복과 구성이 같으나
옷의 색상과 장신구가 다릅니다. 상복은 평상시 집무할 때 착용하는 옷입니다.
[사용법 알아보기]
[특별한 날 왕실의 옷(애니메이션 편집)]
왕실복식은 신분에 따른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면서도
아름다움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간혹 중국으로부터
관복을 사여 받기도 했지만, 왕실의 옷은 우리의 문화와 특색을 반영하면서
왕실문화의 일부분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일상품과 복식은 尙衣院(상의원)에서 담당하였는데,
상의원은 바느질을 담당하는 針房(침방), 자수를 담당하는 繡房(수방), 실꼬는
일을 하는 고얏방 등으로 분업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왕실의 복식은 당대 최고의 재료와 기술이 집약된 예술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례 부부의 인연(애니메이션 편집)]
혼례는 冠婚喪祭(관혼상제) 중 가장 경사스러운 의례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혼례 때는 일반 서민들도
궁중예복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형편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신랑은 관리의 복식인
청색 團領(단령)을 입었고, 신부는 붉은 색의 원삼이나 활옷을 착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부의 홍색차림과 신랑의 청색차림은
음과 양의 조화, 즉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뜻합니다.
[고이댕기] [쪽두리] [댕기] [비녀]
비녀 밀화와 용 장식 비녀는 왕실이나 반가에서 예장용으로 사용하였다.
용비녀는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였다.
조선말기에는 민가에서도 혼례식에 한하여 사용하였다.
보통 비녀보다 길이가 매우 길어 댕기를 양쪽에 감아 늘이기도 한다.
[의관정제(애니메이션 편집)]
전통사회에서 남성들의 옷차림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연결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성들은 외출 시에는 물론 집안에서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다양한 겉옷을 입었으며 각 옷차림에 맞는 모자류도 발달했습니다.
또 머리를 다듬기 위한 다양한 머리수식도 함께 갖추었습니다.
일상복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철릭, 직령, 도포, 창의, 두루마기 등이
있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답호와 전복이 있습니다.
[안경과 안경집, 경대, 광다회, 망건과 대모풍잠, 망건통, 갓, 갓끈 등]
[생활속의 옷(애니메이션 편집)]
우리 옷은 저고리, 바지, 치마, 겉옷으로 이루어진다.
주변국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부분적으로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적인 구조는 큰 변화가 없이 유지되었다.
고대의 복식은 기원전후 시기부터 주변국가와의
외교관계 속에서 변화를 맞이하였다.
고려시대 원의 침략기에는 몽고풍이 크게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그 흔적을 남긴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한복의 모습은 이러한 긴 변화 과정을 거쳐 조선시대에
정착된 것이다.
개화기 이후에는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한복과 양복이 혼용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떨잠] [대삼작노리개]
떨잠은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의 여인들이 예복을 입고
큰머리나 어여머리를 할 때 중앙과 좌우에 꽂는 장신구이다.
금사로 가늘게 용수철을 만들고 그 위에 꽃, 나비, 새
모양과 진주를 붙여 장식하여 움직일 때마다 하늘거린다.
대삼작노래개는 가장 호화로운 장신구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하였다.
옥 나비 한 쌍과 밀화 덩어리, 산호 가지에 생쪽 매듭,
장고 매듭, 병아리 매듭을 맺은 후 낙지발술을 달았다.
[비녀, 빗치개, 뒤꽂이 등]
[처음 맞이하는 생일(애니메이션 편집)]
돌잔치와 돌잡이 풍속에 관한 연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왕가의 기록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나타나며, 班家(반가)에서의 풍습은
‘養兒錄(양아록)’, ‘쇄미록’ 등 16~17세기의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첫돌에 아이는 흰색의 배냇저고리를 벗고
오방색과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남자아이는 저고리에 밑이 트인 풍차바지를 입었고,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었습니다. 또한 다섯 색의 천으로 만든
오방장 두루마기[까치두루마기]를 걸치고 쓰개를 썼습니다.
남자아이의 쓰개는 虎巾(호건)이나 福巾(복건)이고,
여자아이의 쓰개는 조바위라고 합니다.
[굴레, 돌띠, 타래버선]
[무덤에서 나온 옷, 출토복식(애니메이션 편집)]
조선시대에는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옷가지로 棺(관) 속의
빈틈을 채우는 수례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 넣은 옷의 재질과 수량은
집안의 경제력 및 신분에 따라 격차가 있었고, 옷의 조합은 남녀에 따라 달랐습니다.
출토복식은 대부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무덤을 이장할 때 수습됩니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계층은 예법에 따라 灰槨(회곽)에 매장하는
장례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이 회곽은 콘크리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석회로
관을 밀봉시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시신은 미라 상태가 되고 옷가지들도
고스란히 남겨질 수 있었습니다.
[운혜]
[장식 직물(2010년 정윤숙 기증)]
[아시아의 염색과 무늬]
아시아의 염색기법과 무늬는 각 지역의 자연환경과 풍토,
민족성에 따라 독특한 특징을 지닙니다. 특히 중국과 태국의 소수민족은
옷감 전체를 물들이는 단순한 기법을 넘어 밀랍을 바르거나 실을 묶어 염료가
스며드는 차이를 이용하여 무늬를 표현하는 고급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아시아의 전통 복식]
[銀花冠(은화관) 중국 묘족 20세기 김영숙 기증]
[목걸이와 귀걸이] [은 뒤꽂이(중국 묘족 20세기)]
[대구의 섬유산업사(년도별 소개)]
[원앙무늬 베갯모, 호랑이무늬 베갯모, 자수 베갯모 등]
[자수 베갯모(조선)]
[원앙무늬 베갯모(조선)] [호랑이무늬 베갯모(조선)]
비단실로 수놓은 자수 베개는 혼수의 주요 품목이었다.
여성들 사이에 베갯모 수놓기를 두고 겨룸이 있을 정도였다.
남성용은 호랑이. 소나무. 대나무 등을
수놓고, 여성용은 꽃무늬를 주로 수놓았다.
[화각 반짇고리(조선) 나전 새와 꽃무늬 반짇고리(조선 19세기) 인두, 다리미]
[조각보(1940년대)]조각보는 여러 조각의 자투리 천을
모아 만든 보자기로 한국 고유의 민속문화이다.
궁중보다는 주로 민간에서 쓰였던 것으로, 조선시대
천이 귀하던 시절에 옷이나 이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모아 붙여 물건을 싸거나 밥상을 덮는데 쓰였다.
대부분 비단이나 모시 등 쉽게 상하는 천연소재로 만들어져,
현존하는 조각보는 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시된 자료 전경]
[자수 봉황무늬 약낭(조선)]
비상시를 대비하여 구급약이나 환약과
같은 약재를 넣어 다니는 주머니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선조가 신하의 노고를 위로하며
자신이 패용하던 약낭을 내린 기록(선조 26년)이 있다.
귀한 선물이나 특별한 기념품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자수 꽃무늬 수저집(조선)]
수저를 넣어두는 주머니이다.
옛날 여성들이 혼수로 많이 준비했던 품목으로 실용성은 떨어진다.
입구는 매듭으로 장식하고 앞뒤로 길상무늬를 수놓았다.
[자수 장생무늬 귀주머니(조선)]
귀주머니는 양측이 직각으로 튀어나온 것에서 이름 지어졌다.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해. 산. 물. 돌. 소나무. 달 또는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무늬가 있다.
이는 중국의 신선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단령(조선 20세기 초), 쌍호흉배(조선 19세기)]
단령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일상복으로 사모 및 허리띠와 함께 착용하였다.
초기에는 허리띠로 품계를 나타냈다.
단종 2년(1454) 이후 부터는 단령에 흉배를 달아 직위를 표시하였다.
1900년에 문관복장규칙이 제정되어 관리의 관복이 서구식 양복으로 바뀐다.
그 이후 단령은 신랑의 혼례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데레사
2018년 3월 16일 at 8:46 오전
나도 배게모나 수저집 수를 놓았던 적이 있어요.
대구를 이렇게 샅샅이 구경시켜 주어서 고마워요.
언제고 한번 초아님 발자위 따라 대구구경 한번 가야겠어요.
초아
2018년 3월 16일 at 10:09 오후
전 배게모나 수저집 수는 놓지 않았지만,
레이스 뜨기는 많이 했습니다.
고맙긴 제가 더 고맙습니다.
댓글로 늘 힘을 주시니까요.
대구구경 할 곳 참 많습니다.
계획을 세워 내려오시면 더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