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
[역사탐방실 출입구 전경]
[역사탐방실 안내 글 내용]
[이곳에 들린 어린이들의 색칠하기 작품들]
[입구에서 담은 역사탐방실 내부 전경]
‘역사 탐방실‘은 우리나라 문화재를 집적
손으로 만져보고 배워보고 느껴보는 체험공간이다.
물론 국보와 보물 같은 문화재는 모조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며, 암각화 문양 찍어보기, 탁본, 토기 제작 등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비치되어 있는 색연필과 밑그림을 가져가서
중간 테이블에서 색칠도 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백제]
1993년 12월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뚜껑위 봉황장식]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는데, 뚜껑 위에 달린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몸체 뚜껑]
몸체 뚜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 다섯 명이 있고,
그 아래 산봉우리 74개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사자, 원숭이, 코끼리, 멧돼지,
개, 뱀을 물고 있는 거북이 같은 65마리의 각종 동물상,
폭포, 불타는 모양의 무늬 같은 화려한 무늬도 백여 개 있습니다.
[몸채와 받침대]
뚜껑 장식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편 채 날고 있으며,
받침대는 용이 승천하는 형상으로 몸통을 떠받치고 있다.
이 향로에 향을 피우면 12개 구멍을 통해
향이 피어오르는데 이는 매우 독창적인 발상이라 합니다.
금 도금 슬은 현대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다는 평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백제]
진흙탕 속에 묻혀 있었기에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는 대향로,
그 대향로가 세상에 다시 얼굴을 드러낸 1993년 12월 12일은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확인할 수 있어 우리 겨레에겐 기쁜 날입니다.
[전시실 내부 전경]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삼국]
대체로 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상은 경주 五陵(오릉)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 모양을 한 三山冠(삼산관)을 쓰고 있다.
얼굴을 앞으로 숙였으며 상체에는 2줄 목걸이만 걸쳤고,
허리에 얇은 옷을 걸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른쪽 무릎이 솟아오른 부분에는 옷 주름이 생략되어
전체에 생동감을 주며 미묘한 근육이 묘사되어 사실감이 돋보인다.
중국 북주. 북제 시대 반가사유상 형식이나 더욱
단순화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더 발달된 단계로 보인다.
일본 고류사의 목조 반가사유상과 유사하여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범종과 뒤쪽 설명 글 전경]
범종은 절에서 시간을 알릴 때, 사람들을 모을 때, 의식을 행할 때 주로 사용하며,
또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게도 합니다. 그 소리는 지옥까지 울려 퍼져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까지 모두 구제하고 다시 편안한 세상으로 갈 수 있게 한다 합니다.
[범종]
범종 앞에 놓인 망치로 범종을 쳐 볼 수도 있게 해두었다.
[전시된 자료]
[빗살무늬토기,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음식을 보관할 때 썼던 그릇으로
신석기시대에는 빗질을 한 것 같이 무늬를 새긴 빗살무늬토기가 많았습니다.
[빗살무늬토기, 신석기 시대]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보다는 단단하지 않지만,
곡식을 저장하기도 하고 음식을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집 모양 토기, 가야]
네모난 흙판 위에 집 모양을 본떠 만든 토기로 삼국시대
가야 사람들이 살던 집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러한 집 모양토기는 곡식을 담는 창고로서,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사회의 전통적인 신앙과 저승에서도 퐁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바라는 염원으로 보인다 합니다.
[굽다리접시, 신라]
[녹유합, 통일신라]
이 기와는 사람의 얼굴을 막새기와에 사용한 것입니다.
눈, 코, 입과 양볼만을 만들고, 귀와 머리카락은 생략하였다.
눈은 은행알 모양인데 삼국시대 말기의 불상의 눈과 비슷합니다.
입은 일부 파손되어 확실한 모양을 알 수 없지만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 무늬 암막새, 통일신라]
[토우 장식 항아리(신라)]
토우란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기를 말합니다.
이 토기는 개구리, 새, 거북이, 사람 등의 토우를 붙였는데
이러한 토우들은 생산, 풍요, 귀신을 물리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토우들은 당시의 정신세계와 풍부한 감정 표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도깨비(용) 무늬 기와, 통일신라]
이 기와는 이마에 뿔이 돋아난 도깨비 얼굴을 입체적으로
무섭게 만든 것으로 악귀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만든 기와입니다.
건물의 내림마루 끝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된 마루 장식 기와인데
아래쪽은 내림마루 등에 올리기 위해 반원형으로 잘라내어 오목한
모양이고 이마에는 기와를 고정시키기 위해 뚫어 놓은 못 구멍이 나 있습니다.
보상화는 불교의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꽃입니다.
이 벽돌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건물 주변에 깔았던
통일신라의 벽돌을 본떠 만든 것으로, 나무틀에 보상화 무늬를
새기고 흙으로 찍어 무늬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구웠습니다.
네 모서리에도 보상화를 배치하여 벽돌을 연결하면
새로운 무늬가 보이도록 한 것이 특징입니다.
[말 탄 사람 모양토기-주인(국보 제91호), 신라 말 딴사람 모양토기-하인(국보 제91호), 신라]
삼국시대에는 사람이나 동물, 물건의 모양을 본떠 만든 토기가 유행하였다.
특히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동물 모양토기 가운데는 오리나 말의 모습을 본뜬
것이 많았다 합니다.
[말머리 장식 뿔잔, 가야]
[장식 달린 방울 잔, 신라] [창 뚫은 병, 신라]
[풍로, 통일신라]
안압지에서 출토된 풍로를 본떠 만든 것으로 불을 지피는 아궁이,
연기를 뿜는 굴뚝, 취사 용기를 걸치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취사 용기를 걸치는 윗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 용기를 걸 수 있도록
하였고 풍로 겉면에는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새 무늬와 점무늬를 찍어 장식하였습니다.
[부리토기, 신라] [굽다리바리, 신라]
[전시실 내부 전경]
[상서로운 동물 모양토기(보물 제636호), 신라]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 둥근 굽다리 위에
상서로운 동물 모양을 만들어 붙인 토기입니다.
동물의 가슴과 몸통 경계에 물 또는 술을 따르는 긴 부리가 붙어 있고,
꼬리 쪽 몸통 뒤쪽에 작은 잔을 붙였는데 바닥이 뚫려 있어 내용물을 넣는
곳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말 모양 주전자(삼국)] [오리모양 주전자(삼국)]
[수레 모양토기(신라)]
수레 모양토기는 배 모 양 토기나 말 모양토기, 새 모양토기 등과
같이 영혼을 저승으로 나르기 위한 교통수단의 의미로 여겨집니다.
이 토기는 수레의 몸체와 바퀴를 따로 만들어 결합하도록
하였고, 차축을 끼울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당시 신라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수레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배 모 양 토기(신라)]
배의 모습을 본뜬 상형토기로 토기에서 나타나는 배는 영혼을
저승으로 나르기 위한 교통수단의 의미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뱃사공은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데 마치 노 젓는 것이
힘든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토기는 당시 신라의 작은 배의 형태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입니다.
[전시실 안 쪽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삼국]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오른쪽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입니다.
머리에는 三山冠(삼산관)을 착용하고 상반신에는 단순한 목걸이만을
착용했습니다. 국보 83호인 이 반가사유상은 뛰어난 주조기술을
보여주며 일본의 목조 반가사유상과 매우 비슷해서 고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金銅冠(금동관), 삼국]
冠(관)이란 권력을 상징하는 복식 가운데 머리에 착용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왕족의 관은 주로 황금으로 만들어졌고, 그 아래 중앙과
지방의 지배자들은 도금한 金銅(금동) 또는 銀(은)으로 만든 관을 하사받았다.
한 나라 안에서 관은 대체로 같은 모양이지만
직위에 따라 재질을 엄격히 나뉘었다.
달성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은 신라에서 가장 널리
쓰였고 고유한 의장인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의성 탑리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새 깃털 모양
장식을 달았는데, 4세기 말부터 전래된 고구려의 의장을
본뜬 것이라 한다.